[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마지막 순간이 온 거야. 그래, 거기… 그게 제일 행복한 순간이야"

세 여자가 방 안에 있다. 91세의 부유한 노인인 A는 병으로 누워 있고, 52세의 간병인 B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온 26세의 C가 그 옆에 있다. 치매 증세가 있는 A는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적 쇠약함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평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중년의 B는 까다로운 노인 A를 보살피면서 위로와 조롱을 일삼는다. 젊은 C는 늙은 A의 무례한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난감해 한다. A는 파편화되고 왜곡된 기억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한다. 모든 가족과 자기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A는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돌연 세 여자는 쓰러진 A의 분신이 되어 불행했던 한 여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국립극단이 가을마당 두 번째 작품으로 10월 3일부터 선보일 연극 '키 큰 세 여자' 이야기다.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에드워드 올비의 작품으로, 박정자와 손숙이 7년 만에 한 무대에 서는 자리기도 하다. 강렬한 카리스마의 박정자와 냉정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배우 손숙이 펼칠 연기대결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 연극은 특별한 두 배우의 만남으로 더욱 의미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고집 세고 까다로운 한 여자의 인생을 재치 있게 그려낸 작품 속 박정자는 죽음을 앞두고 알츠하이머 증세로 기억을 잃어가는 90대 할머니 A를, 손숙은 A의 변덕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50대 간병인 B 역할을 맡아 중년의 불안함과 담담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늙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 하는 당돌한 20대 C는 국립극단 시즌 단원 김수연이 연기한다. 국립극단이 표방하는 '배우중심' 연극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병훈 연출이 진정한 배우예술로서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키 큰 세 여자'의 작가 에드워드 올비는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으며, 미국 최고의 연극상 '토니상' 최우수극작 및 평생공로상의 영예를 얻은 바 있다. 유럽 부조리극의 경향을 반영한 초기작 '동물원 이야기'와 현대 미국 중산층의 소외를 그린 사실주의 작품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사실적 인물에 판타지적 표현주의를 가미한 '미묘한 균형'으로 찬사를 받으며 20세기 미국연극을 대표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80년대에 들어서며 한동안 주춤했던 그는 1991년 발표한 '키 큰 세 여자'로 완벽한 재기에 성공한다. 이 작품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과 양어머니의 오랜 세월에 걸친 불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곡임을 밝혔다. 그러나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부각하기 보다는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생은 죽음이 있기에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키 큰 세 여자'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인 세 여인이 만나 첫사랑에서부터 결혼, 자식과의 절연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돌아보는 희곡이다. 이 작품은 점차 파편화되고 소멸해가는 자신의 기억으로 인해 변덕과 심술이 끊이지 않는 90대 노인을 50대와 20대 여인이 간호하고, 대화하고, 다투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2막에서 50대와 20대 여인이 90대 노인의 분신으로 등장해 한 사람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오가며 인생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인 독특한 구성에 촌철살인의 유머가 더해져 죽음을 앞두고 지난 삶을 돌아보는 한 노인의 모습이 재치와 감동으로 그려진다. 특히 각각의 세대가 자신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삶의 유한함과 그 안에서 발견하는 '행복'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1999년 극단 여인극장의 공연 이후 16년 만에 만나는 국립극단의 '키 큰 세 여자'는 섬세한 텍스트 연구를 통해 충실하게 원작을 재현하며 세련된 무대 구성을 보여주는 이병훈 연출의 해석으로 사실적이고도,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대디자이너 박동우는 고급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의 무대 전면에 커다란 액자 틀을 설치해 한평생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온 A의 고립감을 극대화한다. 또, '문제적 인간 연산' 등에서 의상으로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탁월하게 표현했던 송은주 의상디자이너가 합류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죽음'이란 주제를 비극적 코미디로 풀어가는 이 작품은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끝이 있기에 인생이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알려준다. 피할 수 없는 숙명. 10월 3일부터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키 큰 세 여자'를 통해 한층 성숙한 인간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문화뉴스 전주연 기자 jy@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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