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공연에 매료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의 미래 관객은 없다. 계속 공연예술계에서 일하고 싶다면, 훌륭한 예술가라 생각한다면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의 본명은 '박승걸'. 그는 본명으로 활동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름을 '박툴'로 바꿨다. 자신에게 변화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인 'TUUL'을 쓰면 사람의 감동받은 표정이 보인다고 했고, 한글로 '툴'을 쓰면 감동하는 사람의 옆모습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바꿨다고 했다.

이처럼 사연이 있는 이름의 주인공인 그는 현재 어린이극을 넘어 뮤지컬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었을 작품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의 연출을 맡은 인물이다. 단순히 어린이극이 아닌 남녀노소 모두가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지, 전국 투어 이후 11월 21일부터 2016년 1월 3일까지 KT&G 상상아트홀에서 뮤지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를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연 연출에 빠지게 된 계기는?

ㄴ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단 교회를 잘못 옮겨서 빠지게 됐다. 당시 교회엔 연극에 관심이 높은 그룹이 있었다. 여기 출신 연기자들이 지금 꽤 있다. 아무튼, 중학교 때까진 기계공학자나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는데, 교회 중고등부를 잘못 가서 진로가 바뀐 것 같다. (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기자의 꿈을 꾸다가, 대학에 가선 연출가의 꿈으로 바뀌게 됐다. 공연 연출과 타 장르의 연출과는 하는 일이 달랐다.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도 영상을 배우지 않아 무대에 대해 전문화됐다.
 

   
 

데뷔작 이야기를 듣고 싶다.
ㄴ 2000년에 '홀스또메르 2000'을 했다. 어린이극은 아니었고, 말들의 이야기였다.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님이 출연하셨고, 목숨 걸고 작품을 만들었다. (웃음) 그전까진 극단 유의 레퍼토리로 호암아트홀 등 대극장 무대 공연으로 진행됐는데, 소극장 버전으로 만들어지게 됐다. 다른 작품으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정상 어렵게 되어 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해서 유인촌 전 장관님 주연 작품 중 한 작품을 고르게 됐다.

그래서 1997년에 조연출로 참여한 작품을 제 스타일로 바꿔보고 싶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내가 추구하는 양식과도 맞아떨어져서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29살 때 기회를 받게 됐다. 메인 극단에서 20대 연출이 거의 없었던 시기여서, 내가 50대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40대는 되어야 연출 데뷔를 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제 이름을 들어왔던 분들은 대체로 실제 나이가 10년 정도 많다고 생각하신다.

극단 유에서의 연출 데뷔작이기 때문에, 확실히 나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맹랑하고 당돌하게 작업했다. 20대 연출가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눈을 맞추기도 힘든 선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래서인지 말썽도 꽤 있었다. 내가 추구하는 양식은 일반적 사실주의와는 많이 달랐다. 말보다 몸짓으로 동작을 표현하는 것도 많았다. 또한, 한 인물에게만 분량이 쌓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주인공 대사를 코러스에게 나눠주게 됐다. 배우들이 자기 대사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대사량도 자신의 비중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자기 대사로 알고 있던 주·조연들의 불만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들 제 작품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흥행에 성공하면 앞길은 열렸다고 보는 것이고, 흥행을 못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하면 인상을 줘서 기회가 찾아오는 것 같다. 제일 힘들어지는 경우가 흥행은커녕 작품 만들 줄 모르고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인상을 줄 때다. 작품에 신선하면 좋고, 어린 티가 나면 안 좋다. 신선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다른 분위기로 내분 위기로 그 전에 했던 다른 연출의 작품과 비교되게 이게 "'박승걸' 내 색깔이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예술가는 개성이 곧 생명이라고 배웠다. 연출이면 작품의 자기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엄청나게 노력했고 힘들었다. 한 달 동안 다른 꿈을 꾸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두 번째 연출 작품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어린이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다.
ㄴ 처음 만든 어린이극이었다. 어린이극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극단에서 어린이극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전에 있던 레퍼토리를 해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그 작품이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였다. 3년 정도 품고 이걸 언제 하지라는 마음은 갖고 있었다. 인터넷에 우연히 습작 소설 하나를 보게 됐었다. 빈틈이 많았는데, 그 빈틈을 내가 채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 좋았다. 대본 작업도 하고, 지원금도 받고 해서 제작 기회가 나에게 온 것을 하게 됐다.

처음엔 반대가 많았다. 우선,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 결말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말 못하는 난장이로 주인공이 장애가 있다. 세 번째로 주요한 소재가 사랑인데, 그것도 가슴 아픈 짝사랑 이야기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린이극 소재라면 피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랑과 죽음이다. 금기시한다고 보는데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대만 극단에서도 만들어 내년에 하게 되는데 그곳 좌담회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사랑과 죽음을 전체적으로 어린이극에서 금기시하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것이 해로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잘 들려줄 수 있고, 들려주고 싶은 소재여서 하게 됐다고 해서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화라는 것이 존재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위험과 힘든 인생의 과정을 가르쳐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들었다. 중세시대 이전 동화들을 보면 끔찍한 소재들이 많았다. 세상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온 마을이 전쟁의 위험에 있었고, 불타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극복할 힘을 키우기 위해 정보 전달을 해주는 것이 동화였다.


▲ 지난해 뮤지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中 '잠들 수 없는 밤' 넘버 ⓒ 쇼플레이

나는 그런 끔찍한 것을 전달한 것도 아니었다. 힘들고 위험한 것이 있다면 미리 알려줘야 한다는 것에 동의가 있었다. 충분히 좋은 소재라고 봤고 많이 도와주셨다. 멘토라고 생각하는 어린이극 선배 연출님들도 아이들한테 험한 게 있다면 미리 알려줘야 한다는 것에 동의가 있었다. 또한, 은사님 중 한 분이 당시 제작자인 유인촌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는데 소재가 아주 좋다고 응원해 주시기도 했다.

내용 외적인 이야기로 '백설공주 이야기'가 어린이극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크다. 예쁜 공주, 난장이들 등 등장인물도 필요하고, 마법과 요술거울도 등장해야 한다. 그래서 제작비 부담 때문에 선택을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굉장히 연극적인 연극을 좋아한다. 말 많고, 문학성에 기대고 있는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TV 드라마나 영화 같은 형식보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연출을 좋아한다.

연극이라서 재미나는 것을 좋아한다. 어차피 연극은 영상물과는 달라서 사실적인 배경이나 소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사실적인 것을 가지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해 상상 속에 완성되는 것이 연극이라 철저히 그것을 이용했다. 오히려 기존 '백설공주'가 가진 것보다 스케일이 크면 컸다. 풍랑에 휩싸이는 공주, 산 넘고 물 건너 주인공 난장이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고난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오고, 안개꽃밭이 무대 가득 채워지는 등 스케일이 늘어났다. 작은 극장에서 적은 수로 해결한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어린이극은 어린이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ㄴ 먼저 어린이극은 어린이만 보러 오지 않는다. 절반의 관객이라 할 수 있는 어른 관객도 재밌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접근으로 디즈니와 드림웍스를 비교하면, 디즈니는 어린이 대상 작품을 만드는데 어른들도 재밌게 볼 수 있다. 드림웍스는 어른 대상으로 재밌게 만들면서 어린이들도 좋아한다. 나는 드림웍스의 취향을 추구한다. 디즈니 작품이 아름답고 예쁜 결말이 나오는 이유는 어린이 것이라는 강박감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정서가 강한데, 유럽 작품이었다면 별로 안 그랬을 것이다. 행복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연 당시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나는 어른들도 만족하게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내가 택하고 싶은 방법은 어린이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린이들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어린이극엔 오해라기보단 인식이 있었다. 저예산, 'TV 유치원 하나 둘 셋' 같은 느낌의 연기, 무명의 스태프가 공식화된 시절이었다. 우선 그것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데뷔작에 함께한 스태프들의 이름을 대본에 써서 줬다. 대본엔 원래 극작·연출밖에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같이하고 싶은 스태프들의 이름을 다 써버렸다. 그러면서 설득해서 거절하기 힘들게 했다. (웃음) 다들 개런티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해줘서 힘이 컸다.

결국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대박이 났다.

ㄴ 초연 당시 분위기를 전하자면, 연극계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이슈가 됐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연설하면서도 인용하고, 뉴스에도 나오고, 뮤직비디오 배경도 되는 등 전국구 작품이 됐다. 난리가 났다. 예매가 오픈되자마자 매진 행진이 3년 정도 이어갔다.
 

   
▲ 뮤지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오는 11월 서울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이다. ⓒ 쇼플레이

이후에 다양한 어린이 대상 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유의해서 만든 부분은 무엇인가?
ㄴ 'TV 유치원 하나 둘 셋' 식으로 하지 않으면 된다. 어른 대상으로 만드는 것에 템포만 당기면 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공연에 매료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의 미래 관객은 없는 것이다. 계속 이 공연예술계에서 먹고 살고 싶다면, 훌륭한 예술가라 생각한다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어린이극의 인식이 "유치한 것"이라며 무서워서 못한다는 것은 솔직히 관객을 만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 본다. 적나라하게 실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급문화가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으므로, 전체 연극이나 오페라, 무용 등 공연 작품에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그 바람에 한국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예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애들이 스스로 작품이 유치하다고 말을 하는 시대다. 공연 후 엄마가 "어땠어?" 이러고 묻는데, 5학년쯤 되는 애가 "유치하지 않았어"라고 말한 걸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최근 연극에서 뮤지컬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변신을 했다.
ㄴ 보통 대박 연극이 2만 정도 관객을 동원하는 것인데, 2년 넘으면 완전 대박이라 할 수 있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첫해가 5만 관객이었고, 두 번째 해 10만 관객을 넘겼다. 한 번도 연극을 안 본 사람이 관객의 대부분이었다. 이슈가 되고, 사랑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연인들도 열심히 보러왔다. '백설기 마을'이라는 팬클럽도 생겼다. 반복 관람이 많았는데, 팬클럽 분들은 많게는 100회 이상, 평균 3~40회 정도 보신 분들로 구성됐다. 워낙 오래 하고 있으니, 당시 중학생 팬클럽 회원이 지금 출연자가 되기도 하는 등 여러 에피소드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세월이 가면서 나름 트렌드가 바뀌게 된다. 투어 공연에선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관객 점유율도 90% 이상으로 높고, 거의 유일한 가족극이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에서도 초청하기에 좋았다. 문제는 서울 공연이었다. 우리와 같은 타켓의 공연이 많아졌다. 실제 그들에겐 요즘 트렌드가 계속 반영이 된다. 대부분 새롭게 라이센스로 들여오고 있고,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시장 규모는 엄청나게 다르다.


▲ 지난해 뮤지컬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中 '고백하겠어' 넘버 ⓒ 쇼플레이

우리 공연이 휴대폰 가게에 엄청나게 많은 휴대폰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만 해도 예매순위 1위를 기록했다가 지금은 예매 순위도 많이 바뀌었고 공연 시장도 넓어져 동력을 잃게 됐다. 서울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투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공연을 겨우겨우 했다. 그때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다. 같은 작품을 다른 버전으로 바꾼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욕심이 생겼다. 지금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만드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장 최적화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걱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됐다. 예전에 작품을 봤던 분들이 새 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이었다. 관객들 추억 속에 이 작품은 최고의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고, 추억으로 되어있는 순간이 더 아름다울 테니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나 역시 좋은 추억을 좋게 봐야 했는데, 완전 새롭게 만들다 보니 전 작품을 일부러 배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시간 허비를 많이 했다. 더 좋은 것을 찾으려다 시간을 낭비했다. 결과가 좋지 않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지난해 두 번째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대극장에서 다시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연극 버전에서 좋은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뮤지컬도 넘버를 많이 넣고 작곡가와 무대 미술가도 바꾸기도 했다. 훨씬 더 완성도를 높여 지난해 버전은 내 마음에 들었다. 연극을 본 분들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이 작품은 지금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갓 잡아온 작품들과는 상대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지금은 고민에 빠진 상태다. 이 작품을 그것들과 맞먹는 것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새로운 작품을 그 에너지로 만들 것인가였다. 완전 다른 버전인 인형극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 공연은 지금까지 나온 내용에 좀 더 보완한 뮤지컬을 선보일 예정이다.

연극 일 외로 최근엔 어떻게 지내고 있나?
ㄴ 집을 짓고 있다. 직접 디자인한 집이 있고, 내 힘과 시공하시는 분의 힘이 같이 합해져 하고 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가평에 살고 있다. 가평을 선택한 이유는 첫 번째가 취미가 캠핑이고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에 들어서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공연 등 지방 투어를 157회 정도 다녔는데, 반복해서 간 곳이 있어도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많이 간 팀이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작은 도시까지 다 다녀봤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살고 싶다, 여기는 내가 살기엔 안 좋다는 도시의 감상이 생겨났다.

서울을 떠나 전국에서 두 군데를 살고 싶었다. 곡성, 가평인데 곡성은 일을 청산해야 하니 가평을 가게 됐다. 돈이 많아서 가기보다는 이런저런 충동적인 이유로 가게 됐다. 처음엔 전세를 가려고 했는데, 시골이어서 전세가 없어서 집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월세를 구하면서 전세를 구하려다 마음에 든 땅을 발견했다. 그것 때문에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땅을 사고 돈이 생기는 것만큼 집을 세웠다. 한 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1년에 걸쳐 조금씩 지었다.

무대 연출도 해본 만큼, 공간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하니 공간 디자인은 내가 했다. 개성이 있는 집을 얻고 싶어서 재밌고 특이한 집이 탄생했다. 돈도 아낄 겸 무대 작업을 한다고 톱질과 망치질을 했는데, 그 감각으로 연장을 사서 직접 시공해 탄생했다. 물론 취미는 당연히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서울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고, 돈이 전세금밖에 없다면 충분히 나처럼 하면 전원주택을 잘 마련할 수 있다. 또한, 연극책이 아니더라도 책을 꼭 내려고 한다.
 

   
 

최근 세종액터스스튜디오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평소 교육관은 어떠한가?
ㄴ 내가 맡은 클래스는 중급에서 고급 클래스다. 제작 실습을 맡고 있고, 중급 연기와 스타일 연기를 하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강사로도 가끔 일하지만 본격적으로 연기 지도를 학원에서 한 건 올해 처음이다. 학생들에게 "현장에서 연출가로 들을 수 있는 말을 해주겠다. 내가 선생보다는 연출로 상대하면서,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현장 분위기가 어떤지, 너의 선택은 어떤지 체크해주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몸이 준비되지 않은 배우가 준비가 가장 덜 되었다고 생각한다. 몸을 준비시키는 쪽으로 웜업을 많이 가르쳐주고 있다. 공연 무대에 최적화되어 있는 웜업을 알려주고 있다. 이게 놀이 같기도 하고, 상상력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실제 작업에서도 많이 하고 있다. 내 눈높이를 낮추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엄청나게 힘들어한다. 너무 적나라할 정도다. (웃음) 나 역시 습관이 되지 않아서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괴롭혀서라도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학생이다. 완성보다 성장이 중요한 쪽으로 수정하고 있다.

제자가 좋은 연기를 선보이면 차기 작품에 캐스팅할 생각이 있는가?
ㄴ 제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잘하면 당연히 캐스팅해야 한다. 욕심이 나는 배우가 있는데, 내가 욕심나는 배우가 있으면 당연히 캐스팅한다. 아마 꼬실 것이다. 제자인데 내 작품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덕을 보려고 애를 쓰려고 한다. (웃음)

연극인을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ㄴ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웃음) 너무 포화상태다. 세상에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누군가는 된다. 그 누군가가 내가 아니라는 법은 없으니 그렇게 무모하거나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이라고 해서 반드시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만약 일하고 싶다면 열심히 하려는 지원자나 희망자만으로도 포화상태니 목숨 걸어야 한다.

어린이극을 접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ㄴ 요즘 직업과 관련한 교육이나 프로그램을 학교에서 많이 한다. 딸이 중학교에 다니니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는데,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그 나이 때 겪었던 일은 지금은 참고사항이 될 수 없다. 본질적인 부분은 비슷하지만, 현상적인 디테일은 전혀 다르다. 10년 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직업이나 직종이 많다. 지금보다 10년 후는 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에겐 기성세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경계를 하고 싶다. 어른들 역시 미래를 제시할 때 조심해야 한다. 잘못 지도했다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으면 좋겠다. 서로 조심하고 경계하고 해야 한다고 본다. 청소년들에게 세상이 이러다 보니 그래서 더더욱 학교 공부만 잘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정말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재미있다. (웃음)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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