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서정준 기자] 지난 7일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이하 병동소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예술의전당에서 3년 만에 제작한 창작 초연 연극 '병동소녀'는 재독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들은 흔히 '파독간호사'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 정부에서 '파견'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간호사들 스스로가 '재독간호사'로 호칭을 변경했다.

 

이 작품은 이들 '재독간호사'가 살아온 삶을 추적한다. 막연한 꿈을 좇아 독일로 건너간 간호여성들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명자 역에 전국향, 순옥 역에 이영숙, 국희 역에 홍성경, 재엽 역에 정원조, 민경 역에 이소영, 정민 역에 김원정, 헬레나 역에 윤안나, 알리 역에 필립 빈디쉬만이 출연한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재엽은 이번 작품을 위해 2년 전부터 독일에 거주 중인 재독간호여성들과 교류하며  알게된 그녀들의 행적을 무대 위에 펼친다.

1976년에 있었던 이주 간호여성들의 체류권 허가를 위한 서명운동,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 당시 재독여성모임을 만들어 광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게끔 힘쓴 일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의 상황들까지.

이 과정에서 재독간호사들은 여성모임 등을 만들어 보다 직접적인 행동으로 독일 사회, 세계 속에서 끊임 없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삶을 실천했다.

 

연극 '병동소녀'는 이런 거시적 관점에서 그려지지 않은 개인의 삶, 개인의 역사를 보여줘 자료로만 존재하던 재독간호사들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가깝게 전달하는 의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연극 '병동소녀'는 단순히 재독간호사의 실상을 그려낸 다큐멘터리적 접근에서만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주연은 배우 전국향, 이영숙, 홍성경 세 명의 중년 여성 배우다. 여성 서사, 여성 작품이 드문 이 시기, 특히나 중장년, 노년층 배우들의 설자리가 없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구성은 연극 '병동소녀'를 최근 연극계에서 무척 의미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김재엽 연출은 "저도 남자인데 연출가나 작가가 남자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여성 이야기를 잘 모르고 잘 못쓴다"고 전제한 뒤 "우리는 좋은 여자 선배님들이 많은데, 그런 연배나 삶의 내공이 쌓인 연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역할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남자 작가 입장에선 삶의 내공이 부족하다 보니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형적인 여성상에 머무르고 살아있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작품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제가 이 작품을 특별히 쓸 수 있던 건 선생님들을 베를린에서 가까이서 만난 시간이 있어서다. 제가 여성을 잘 알기보다 보편적인 인간상 안에서의 여성성이 더 많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다.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제가 어릴때부터 많이 뵌 선배님들. 개인적으로 흠모한 배우님들과 함께 했다. 다른 작품에서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해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작품이 주는 페미니즘적 가치를 언급했다.

 

약 120분의 작품 전막 시연이 이어지는 동안 기자들과 함께 작품을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들은 결코 '추억팔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등장하는 작품의 빈티지한 요소나 유머에 함께 공감하고 즐거워했다.

전막 시연이 끝난 뒤엔 주연 배우 전국향, 이영숙, 홍성경과 김재엽 연출, 실제 재독간호여성인 김순임, 송금희, 서의옥 씨가 함께 간담회를 진행하며 작품에 관한, 당시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좌측부터 김순옥, 송금희, 서의옥 씨

김순임 씨는 간담회를 통해 "연극을 보니 너무나 사실 그대로 잘 표현돼서 다시 설명을 드릴 이야기가 없다. 정말 사실적이다"라며 작품을 칭찬한 뒤 "한 가지 서명운동을 통해서 저희가 배운 건 서명운동을 통해 저희가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사회생활을 하게 됐다"며 당시 서명운동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송금희 씨는 광주 민주항쟁 당시 독일의 분위기에 대해 "그때만 해도 여성모임이 빨갱이라며 독일사회에선 수군대는 게 있었다. 그래서 저도 접근을 좀 했었지만 공산당으로 몰릴까봐 참여는 못했다. 그러던 중 힌츠 페터 기자의 취재가 독일에 알려지는 순간 정부에 배반당한 느낌, 슬프고 원망스럽고 그런 분노가 치솟아올라 무서운 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길가로 나갔다. 그땐 저뿐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로 길가로 나와서 시위를 하고, 간담회도 열고, 포스터도 붙이고, 전단지도 돌리고 서명운동도 받고, 음식 판 돈을 한국에 보내기도 하고. 문화활동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연극 공부한 분도 있어서 연극도 했다. 덩치가 (연출)선생님보다 큰 분이랑 할 때였는데 너무 긴장하신 나머지 옆 집에서 빌려온 총을 책상에 내리쳤다 총이 부러졌었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며 웃곤 한다"고 살아있는 경험담을 전했다.

 

서희옥 씨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던 날에 대해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며 "11월 9일은 독일 역사에 있어 무척 중요한 날이다. 히틀러도 1938년 11월 9일 무렵부터 유태인 학살을 시작했던 날이기도 하다"고 기억을 더듬은 뒤 "갑자기 장벽이 무너지고 인파가 서베를린으로 쏟아져 오는 거다. 처음엔 TV에서 생중계를 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장면인가보다 하며 눈을 의심했다. 그런데 곧 거리에 정말 사람들이 쏟아졌고 서베를린 시민들도 샴페인을 구해와서 동독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함께 밤새 축제를 벌였다. 형제가 다시 만났다는 분위기고 외국인들도 함께 즐겼다. 다음날 직장 갈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말 밤새 축제를 했다. 저희에게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언제 통일될까 싶은 부러움도 있었다. 그래서 이젠 우리 차례라는 희망을 갖고 몇몇 동기들이 다음날 베를린 장벽에 가서 '코리아 이즈 원' 현수막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독일이 완전 통일됐다"라며 장벽 붕괴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컸다. 자기를 보호해주던 국가가 갑자기 사라지고 그간 해왔던 모든 일이 범죄시되며 발판을 잃은 상실감에 많이 시달렸다. 동독 주민들 입장에선 아직도 그렇게 회상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게 되면 이런 시행착오를 벗어나 흡수통일이 아닌 제3의 길을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라며 직접 통일 과정을 보고 겪었던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 김재엽 연출

김재엽 연출 역시 "한국 사람은 베를린에 가면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를 관광코스처럼 꼭 가는 것 같다"고 밝힌 뒤 "베를린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이미 통일사회에서 태어나 살고 있어선지 그런 감정이 별로 없더라. 우리에겐 역사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계를 넘어서야만 이후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데 너무 오래동안 남북한이 갈라진 것, 지금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상황에선 새로운 대안에 대한 상상력 등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벽을 넘어선 경험을 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 다음 세대는 과거의 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그런 장면을 생각했다"며 베를린 장벽 붕괴와 세대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을 함께 다룬 연출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 좌측부터 홍성경, 이영숙, 전국향 배우

이영숙 배우와 전국향 배우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영숙 배우는 "실제 역사를 살아오신 선생님들의 이야기다보니까 그걸 어떻게 두시간 안에, 인물을 통해 해야할지 숙제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실감했던 건, 그리고 분통이 치밀어 올랐던 건 똑같이 세금을 내고도 복지의 대상에서도 제외되며 그야말로 낯선 땅에 가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거 아닌가. 살기 위해 무언가를 쟁취하고 행동해야 하는 부분이 제겐 너무 감동적이었고 선생님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얻어서 연극이 끝나고 나면 좀 더 성숙된 이영숙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감사를 표했다.

또 "어떻게 보면 여성의 삶이 너무나도 바깥으로 표현되는 게 단편적이었던 것 같다. 그걸 우리가 들여다 보며 개인을 떠나 가족, 사회, 지역, 지구, 우주까지 포함할 수 있는 깊이를 아우를 수 있는 커다란 것을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척 뿌듯하고 연기하는데는 도움이 얼마나 됐는지. 그런 걸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작품에 참여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전국향 배우는 "이 사건(재독여성모임을 통해 독일에 방영된 힌츠 페터의 비디오가 다시 한국으로 보내진 것)을 통해서 한국 여성들도 그렇고 한국 교민들, 독일 사회도 함께 연대했고, 재독간호사 분들이 정말 힘이 대단했다. 저희는 전혀 몰랐다"라면서 눈물을 보였다.

홍성경 배우는 "저는 실제 계시는 분의 삶을 약간 재연한다는 느낌으로 역사와 더불어 연기했을 때 허구를 많이 가미하지 않고 실제의 삶을 연기해낼 수 있다는 게 일종의 영광이었다. 그분들의 치열했던 삶에 근접할 생각조차 못할 정도인데 그분들의 삶을 저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줘야한다는 사명감, 책임감도 느껴지면서 저희 역시 배운 바가 무척 컸다. 어떻게 저렇게 치열하고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선택을 택했을지 감동적이었다. 많이 고되셨을텐데 그걸 생각하면 열심히 안 할 수 없었고 외람되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 가장 컸다. 어찌보면 이분들 삶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는데 누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며 이 작품에 참여한 것을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외에도 많은 것을 담은 작품이다. 특히 "고향이 별 거냐. 사는 데가 고향이지"같은 대사부터 해서 단순히 '재독간호사의 삶을 재연한 작품' 혹은 '중년 여성이 주연인 페미니즘적 가치를 담은 작품' 등으로만 보기에는 풍성한 텍스트가 담겼다. 연극 '병동소녀'는 12월 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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