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16 노덕 감독의 '특종: 량첸살인기'

   
▲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최근 JTBC에서 방영 중인 '송곳'이라는 드라마엔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이수인(지현우)이 장래 희망에 '꼰대'라고 쓰는 장면. '송곳'이 웹툰 때부터 인기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수인이 '꼰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회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알아가는 것들이 있죠.

그 꼰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에 대한 저항은 마블 코믹스의 초인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대중이 '송곳'이라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특종: 량첸살인기'(이하 특종)는 '송곳'과 달리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주인공이 꼰대 되기를 수용하는 영화입니다. 

'세븐' vs '특종' '책과 살인'
'책 속의 내용이 단서가 되는 살인사건'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충격적인 결말과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 '특종'을 보고 이 영화가 떠올랐다면 과했을까요. '세븐' 속의 범인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살인하듯, '특종'의 살인마는 '량첸살인기'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어 살인을 계획합니다. 미스테리의 중심에 책이 있고,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 이 책이 큰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전개는 살짝 닮았습니다.

책을 소재로 일어난 연쇄살인이었다는 점에서 같지만, 범죄의 목적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죠. 허무혁(조정석)의 인생과 '량첸살인기' 사건이 평행선을 달리며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이 '특종'의 매력입니다. '세븐'의 살인마(케빈 스페이시)는 자신이 타락한 세상을 벌하겠다는 생각으로, 신곡에 언급된 죄악을 범한 인간을 죽이죠. 하지만 '특종'의 살인마는 애초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언론을 통해 '량첸살인기'라는 책의 존재를 알게 되죠. 이후 살인마는 대중이 그 책 속의 살인이 재현되었다고 '믿게 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믿게 하다'라는 것의 흥미로운 점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두 영화 모두 결국엔 진짜 범인이 죽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죠. '세븐'에서 살인마의 죽음은 거대한 계획 중 하나였고, 그 죽음으로 연쇄살인의 퍼즐은 의도대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특종'에서 살인마의 죽음은 계획되지 않은 일이었고, 연쇄살인의 퍼즐은 기이하게 완성됩니다. 진범은 세상에 밝혀지지 않고, 그 누고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살인사건이 해결 된 거죠. 그리고 이 사건을 새롭게 구성하는데 언론이 큰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특종'의 연쇄살인은 언론의 프레임이 봉합하고 완성한 사건입니다. 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연관이 있죠. '세븐'이 타락하고, 서로에게 무정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였다면, '특종'은 타락한 언론에 대한 조소였습니다.

   
 

잘려나간 프레임, 잘려나간 언론
'특종'의 화면은 답답한 편입니다. 풀 샷에서조차 헤드룸(인물 머리 위의 공간)이 좁아 인물들만으로 화면이 꽉 차는 느낌을 주죠. 이는 인물을 화면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는 느낌과 함께, 프레임이 무엇인가를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인물 주위의 도구와 배경 등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 같죠. 동시에 영화가 언론의 '프레임 이론'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추구한 좁은 프레임은 분명 특별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임 이론'이란 대중이 언론이 정해준 틀 안에서 보고, 사고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영화의 좁은 프레임, 미장센과 연관시키면 어떨까요. '특종'의 이야기는 허무혁이 조작한 이야기가 중심에 있습니다. 허무혁은 그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많은 정보를 배제하고, 사건은 한 부분을 확대하여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혹은 대중이 믿을 법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제조해내죠. 이처럼 그가 작은 정보를 프레임에 꽉 차게 담아, 엄청난 진실로 둔갑시키는 과정과 이 영화의 답답한 프레임이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가 추구한 프레임을 통해 관객은 좁은 시야를 간접 경험할 수 있죠. 허무혁이 대중의 시야를 좁혔듯, '특종'을 관람하는 관객도 좁은 영상 프레임 때문에 배경을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고, 시야가 좁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영화 속 언론과 프레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종'에서의 언론은 윤리적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정의롭다는 말과도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허무혁은 광고주와 얽혀있는 민감한 뉴스를 보도합니다.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직 처분이었죠.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그림 중에 광고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 카메라의 프레임에 광고주와 관련된 그림이 들어올 자리는 없고, 이 말은 카메라가 비출 수 있는 세상도 그만큼 좁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고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외에도 '특종' 속의 언론이 중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청률이라는 것이죠. '특종'은 시청률이 보도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언론사가 '특종'이 필요한 이유도 타 매체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다는 힘 때문이죠. 허무혁은 의문의 살인마를 먼저 보도해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일념으로 현장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큰 실수,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성급하게 보도해 일을 꼬이게 하죠.

이 첫 오보를 숨길수록, 가짜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는 살이 붙고, 대중이 믿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목표는 진실의 추구가 아닌, 대중이 믿게 하는 이야기를 담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특종'의 살인마와 언론은 교집합을 이룹니다. 살인마가 대중이 믿게 하기 위해 살인을 조작했다면, 언론은 그들이 보도한 이야기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 프레임을 좁혀 필요한 정보만을 부각해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특종'에서 언론 종사자들의 대사 중엔 국민의 '알 권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국민의 권리를 위해 보도해야 한다, 나중에 보도 때문에 경찰과의 마찰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론인이라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의 뉘앙스를 가진 대사들이 종종 있죠.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알 권리'라는 것은 방송사의 이익 여부에 따라 가변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광고주와 얽힌 사안에서 '알 권리'는 무시되었죠. 그런데 연쇄살인을 다룰 때는 방송사가 법적인 문제, 경찰과의 마찰 등의 위험에 빠질 수 있음에도 '알 권리' 때문에 보도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 속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 문제 때문에 알 권리는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법적, 윤리적 문제를 회피하고서 특종을 보도하고 싶을 때는 알 권리 뒤로 숨어버리죠.

   
 

그렇게 꼰대가 된다
무혁의 오보는 살이 붙고 리얼리티를 얻습니다. 그가 거짓을 추가할 때마다 이야기(거짓말)는 살이 붙지만, 언론의 프레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죠. 많은 정황 중 무혁의 이야기에 적합한 것만 선택되어 조명받고, 대중은 그 조명이 비추는 프레임이 사건 전부라 믿습니다. 이 리얼리티를 갖춘 살인 이야기에 살인자는 응답하죠. 언론이 만든 허구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 살인자가 동참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무혁의 노력 덕분에 그 살인은 막을 수 있었지만, 재미있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죽은 살인자는 용감한 시민이 되었고, 살인을 막은 무혁은 살인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TV의 프레임이 재구성한 이 어이없는 보도를 보며 무혁은 언론에 회의를 느끼고 사직서를 준비합니다. 카메라의 프레임은 좁아졌지만 그 좁은 프레임만으로도 언론은 원하는 현실은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비정한 대사가 등장하죠. '세상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봐' 무혁의 사표는 끝내 취소되고, 그 역시 현실에 동조할 수밖에 없음을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아내(이하나)가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숨긴 것에 대해 무혁은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역시 오보를 진실로 둔갑시켰으며,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했죠. 그리고 그 거짓 이야기 덕분에 명성을 얻고, 다시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를 탓할 수 없었고, 아이의 유전자 감식 결과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니까. 드디어 기자의 의무, 직업 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진짜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은 무던히 잘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그는 꼰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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