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강해인] 존경하는 여인을 위해 쓴 편지들. 그런데 우연한 일로 그 편지의 순서가 뒤섞이고, 심지어 한 장의 편지는 전달되지도 못합니다. '시간'의 순서가 얽히고 공백이 있는 이 편지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원래의 편지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이번 시간에 읽어드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입니다.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는 영화네요. 올해 가장 뜨거운 감독과 무엇하나 명확히 떨어지는 결론을 내기 힘든 영화라 시작하기 전에 걱정부터 됩니다. 상영 당시 관객 수가 3만 9천 명이었던 작품이기에, 이번 주 시네 프로타주를 보실 분이 많지는 않겠지만,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다루는 입장이지만, 스무 편이 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 중 직접 본 게 네 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세계를 아우르는 관점을 쓰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관해 깊게 말하기 위해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 및 비평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저 역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공부한다는 입장에서 이번 편을 만든 거죠.

 

시간의 해체와 조립

별다른 지식 없이, 이번 영화에 관해 '영화 읽어주는 남자'의 의견을 말하자면, '자유의 언덕'은 일반적인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을 해체하고, 새로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봤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반복되는 이야기 안에서 미묘히 다른 지점이 있었습니다. 이 차이를 통해 과거와 기억, 꿈, 그리고 인간의 민낯을 보여줬었죠. 하지만 이번엔 반복이 아닌 시간이란 구조의 변형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려 합니다. 사실, '자유의 언덕'이 하고자 했던 말은 이 장면에 들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잠과 꿈, 그리고 영화

잠과 꿈을 표현하려 하는 것도 홍상수 감독의 관심사입니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 모리는 잠을 심하게 많이 자고, 또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도 꽤 있습니다. 영화에서 잠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요. 영화관이라는 암실에서 스크린을 보는 건 꿈을 꾸는 행위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 덕분에 영화라는 매체는 꿈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죠. 그래서 '잠'이라는 요소는 영화적인 표현 수단이 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비평가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영화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자유의 언덕'에서 꿈에 관한 요소를 몇 가지 짚어보자면, 꾸미라는 강아지가 있고, 바로 이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으스스한 분위기와 함께 '죽음'이란 걸 연상하게 하기도 하죠.

 

 

 

글과 이미지의 간극

'자유의 언덕'의 재미는 편지에 적힌 글과 관객이 보는 영상 간의 간극에서 출발합니다. 관객은 편지의 내용을 이미지로 보게 되죠. 그런데 이 이미지는 실제 모리가 겪은 걸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리가 재구성한 가공된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관객은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를 변별하는 것에 관해 해답을 제시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인터뷰어가 무안할 정도로 단답형이고 모호한 대답이 많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편지에 없던 내용도 관객이 본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편지에 쓰이지 않았지만 모리의 꿈, 혹은 상상한 것이 이미지로 보인 것 같죠. 모리가 영선과 함께 밤을 보낸 일을 굳이 존경하는 여인에게 편지로 말했을까요?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언덕'에서 관객이 본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모리의 기억, 가공된 과거, 꿈, 그리고 욕망을 표현한 이미지가 섞여 그의 다양한 의식 체계를 보여줬다'고 말이죠. 여기서 '무엇이 진짜고, 뭘 말하는 거야?'라는 문제를 홍상수 감독은 관객의 몫으로 넘깁니다. 그래서 '자유의 언덕'을 더불어 그의 영화는 답이 없고, 언제나 열려 있죠.

 

 

 

홍상수 감독의 촬영 스타일

지금부터는 조사한 내용을 더해 영화에 좀 더 다가가 볼까 합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홍상수 감독은 촬영 전날까지 시나리오를 미리 쓰지 않습니다. 촬영을 계획할 때도 촬영 날짜와 장소만 미리 정한다고 하죠. 대신, 촬영 당일 날씨와 현장의 분위기를 반영해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쓴다고 합니다.

더 유명한 건, 극 중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으면, 배우들이 직접 술을 마시는 거로 유명하죠. 이번 영화의 주인공 카세 료도 꽤 많은 술을 마셨다네요. 과감해 보이는 이 제작방식은 현장의 생동감과 배우의 진실한 감정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참여한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성취감이 꽤 크다고 하죠. 말로는 쉬워 보이는 작업 방식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돈이 많이 투자되는 상업영화일수록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 방식입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은 우연이라는 요소를 꽤 신뢰합니다. '자유의 언덕'은 편집을 할 때도 우연의 효과에서 힘을 찾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죠.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는 과거 유준상이 무릎팍 도사에서 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홍상수 감독의 촬영에 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자신이 우연히 가져온 소품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죠.

 

 

'자유의 언덕'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모리가 가지고 다니는 『시간』이라는 책은 홍상수 감독이 구한 책이 아니라, 카세 료가 가져온 책 중 하나를 고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평소 읽는 책을 가져와 달라는 요청은 있었다고 하네요. 그래도 영화와 그토록 잘 어울리는 책이 한국까지 왔다는 건, 너무도 놀랍고 적절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우연마저도 필연적 의미가 되는 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세계인가 봅니다. 그리고 이런 우연을 가장 영화적인 요소를 끌어올 수 있는 게 홍상수 감독이 긴 필모그래피를 통해 구축한 힘이자 아우라 같네요.

그밖에도 '자유의 언덕'에서 흥미로운 건, 모리가 자신을 거울처럼 반영한 순간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표적인 순간이 화장실에 갇힌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앞서 불륜 남성이 화장실에 있다 위기의 순간을 피한 장면을 상기시키죠. 불륜 남성처럼 모리도 편지를 보내는 '권'이 아닌, 다른 여성, 심지어 남자 친구가 있던 영선과 그런 일을 겪은 겁니다.

이 외에도 남을 함부로 평가한다며 화를 내던 모리가 자신도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과하게 말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표본처럼 보이네요. 그런데 이런 지점은 현실 속, 홍상수 감독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더 흥미롭습니다. 예술은 자기반영적이라고도 하는데, 홍상수 감독의 예술도 그 끝엔 결국 자신의 자화상이 있는 걸까요. 이에 관해서는 저 역시, 감독님의 영화처럼 판단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언급한 것 외에도 '자유의 언덕'은 파고들 것이 많습니다. 제 식견이 부족해 더 이야기할 수가 없어 아쉽네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논할 게 많기에 비평가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나 봅니다. 저 역시, 감독 스스로가 예술의 경지에 이른 듯한 경외심도 있습니다.

끝으로 영화에 관해 감독과 배우가 했던 말을 인용할까 합니다. 카세 료는 '자유의 언덕'을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고 싶은 '프리즘 같은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에 관해 '시간이란 틀의 압력이 좀 약해지면 읽는 내용들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는데 뭐가 달라질까? 그런 걸 조금 체험해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라고 했다네요. 유독 길었던 이번 편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영상이 '자유의 언덕'을 오르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starskylight@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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