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막바지의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고/ 그들에게 이틀간 더  남녁의 따뜻한 날들을 베푸셔서/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더 해 주십시오/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 초조하게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가을날(Autumn Day)]입니다.

릴케의 시 '가을날' 독일어 원문
릴케의 시 '가을날' 독일어 원문

'고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체코 프라하 출신으로서 독어권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시인입니다.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사망한 시인’이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 회자되는 꽤나 낭만적인 일화(逸話)입니다. 그래서 그의 묘지는 붉은 장미로 덮혀있고 우연스럽게도 생전에 쓴 장미시(詩)가 묘비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플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욕망이여" 

그러나 그가 장미 가시에 찔린 적은 있지만 그것이 죽음의 직접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백혈병으로 인해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릴케는 젊은 시절 한때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의 비서였으나 사소한 오해로 인해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의 인연으로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릴케의 '가을날' 이라는 제목의 시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시로서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는 이 시의 영향을 받고 쓴 시이며, 수필가 전혜린의 수필 속에서도 등장하는 우리에게 친숙한 시입니다. 

특히 이 시는 고독의 깊은 의미를 표현한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서정시입니다. 이 시에 나타난 고독은 인간의 근원적인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여 즐기고 사랑해야 하는 그런 행복한 고독입니다. 

독일어의 '고독(Einsamkeit)’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로움'이고 또 하나는 '고요함' 입니다. 릴케는 이 두 가지 의미의 '고독'을 문학에서의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그가 "예술가에게는 깊은 고독이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듯이 이 '가을날'이라는 시는 [고독속에 행복을 느끼며] 태어난 그의 대표작입니다.

오늘은 ‘차이코프스키(Lev Nikolayevich Tolstoy)’의 피아노곡 '사계(The Seasons)’를 소개합니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인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사계(The Four Seasons)’에 견주어 흔히 이 작품을 후기 낭만파 시대 러시아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원래의 곡명은 ’The Seasons’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이루어진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와는 달리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 한 곡씩 모두 12곡으로 구성되어있고, 매곡 마다월별 특징을 살린 별도의 소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아무튼 두 곡 모두 회화(繪畵)로 표현하자면 맑고 투명한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비발디의 '사계'는 바로크적 수채화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낭만적 수채화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1875년 12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니콜라이 베르나르드(Nikolay Bernard)‘라는 사람에 의해 '누벨리스트(Nouvellist)’라는 월간 음악잡지가 창간되면서 이듬해인 1876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월별로 계절적 특색에 맞는 '푸쉬킨', '마이코프', '네크라소프', '프레시체예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시인들의 시를 선택하여 그 시 마다의 성격을 묘사하는 피아노곡을 부록으로 게재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에게 작곡을 의뢰했는데 이를 통해 탄생한 작품이 바로 '사계(The Seasons)'입니다. 

그중에서 제 10번 '가을의 노래(Autumn Song)’는 톨스토이의 시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매우 서정적인 곡입니다.

"가을/ 우리의 가련한 뜰은 초라해져 가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가네 (Autumn/ Our poor garden is all falling down/ The yellowed leaves are flying in the wind)“ 
<가을의 노래 'Autumn Song']>-- 톨스토이 

또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조선 후기의 문인 '정학유(정약용의 차남)’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이 '농가월령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예로부터 내려오는 농사와 세시 풍속, 놀이와 제철 음식, 명절 음식 등 우리의 미풍양속을 월별로 나누어 교훈하는 가사(歌辭)입니다. 여기서 '월령(月令)’이란 그달 그달의 할 일을 적어 논 행사표를 말합니다. 

"구월이라 계추(季秋)되니 한로(寒露), 상강(霜降)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 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碧空)에 우는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9월령(令), 양력 10월 송(頌)>-- 정학유

오늘은 차이코프스키 작곡 '사계(The Seasons)‘ Op.37 중에서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시에 의한 제10번 '가을의 노래'(Autumn Song)를 러시아의 거장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의 피아노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 5. 7~1893. 11. 6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 5. 7~1893. 11. 6

미하일 플레트네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특히 사계의 해석에 탁월한 연주자라는 평을 받고있는 ‘건반위의 짜르(Tsar)’입니다. <註: ‘건반위의 짜르’는 미하일 플레트네프에게 붙여진 별명으로 '짜르'는 러시아나 불가리아 등 동유럽 슬라브민족 국가에서 부르는 군주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는 그동안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지휘자로서도 그 성가(聲價)를 높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12년에는 KBS 교향악단이 '재단법인'으로 탈바꿈 한 후 11월 첫 공연에 초청되어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며 새로운 상임지휘자 물망에 올랐던 우리와 친숙한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가을의 카타르시스를 원한다면 차이코프스키를 만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차이코프스키를 가리켜 ‘우수의 작곡가’라고 말합니다. 

사전적으로 '우수' 라는 낱말의 뜻은 '마음이 시름에 쌓인 상태'로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憂愁', 즉 근심 '우(憂)‘와 근심 '수(愁)’입니다. 그리고 '수'(愁)는 가을 '추(秋)‘와 마음 '심(心)’을 합쳐놓은 말입니다. 결국 '우수'란 '가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수'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를 '가을의 남자'라고 칭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디를 뒤져봐도 그의 웃는 얼굴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세월의 순리(順理)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어느 가을날 차이코프스키(11월 6일)도, 톨스토이(11월 20일)도, 이 마음 시리게 행복한 '가을의 노래'만 남긴 채 낙엽되어 떠나고 말았습니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1828. 9. 9~1910. 11. 20)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1828. 9. 9~1910. 11. 20)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시와, 러시아 음악의 최고봉 차이코프스키가 함께 빚어낸 행복의 송가(頌歌) ‘사계’ 중 '가을의 노래'가, 러시아 피아니스트로서 ‘건반위의 짜르’라 불리는 거장의 손끝에서 울려날 것을 생각하니 위대한 예술작품이 새롭게 태어날 것 같은 기대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The Seasons)' 중 [10월, 가을의 노래 ‘October: Autumn Song’]를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의 피아노 연주로 들으시며 함께 행복에 깊히 젖어보시죠. 지난 2006년 6월 영국 런던에서의 독주회 실황입니다. 

Tchaikovsky/ The Seasons Op.37b, October: Autumn Song, Piano, Mikhail Pletnev

가을의 남자 차이코프스키가 만든 [가을의 노래], 들으신 감상이 어떠셨습니까? 가을의 서정 속에 깊이 잠기게 하는 매우 아름다운 곡입니다. 

수채화로 그려 마냥 곁에 두고 싶은,  신비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가을의 정경. 이 가을을 종이에 그리면 '그림' 이지만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 입니다. 

이 좋은 '가을날' 고독한 행복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의 '가을의 노래'를 들으시며 사랑하는 내 님 마음에 품고 행복한 가을 그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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