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연극 '빨간 피터'로 국내 무대에 오르다

   
 

[문화뉴스] 주호성 배우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기 전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를 만나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오늘은 따님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였다. "오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자 주호성 배우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냈다. 

"예전엔 연극을 쭉 했을 땐, 기자들도 많이 오고 방송 촬영도 많이 왔는데, 지금은 내가 공연한다고 하면 '따님은 오나요? 안 오나요'를 묻게 된다. '안 온다'라고 말하면 오지를 않았다. 연예인을 둔 가족이라면 늘 나오는 말이라 감수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주호성의 딸인 배우 장나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본인이 꺼내지 않은 이상 담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13년 만에 국내 연극무대 공연 중인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 이야기만 해도 1시간이 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연극 '빨간 피터'는 프란츠 카프카의 1인칭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로 세계 각국의 많은 배우가 모노드라마로 공연한 유명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도 작고한 연극배우 추송웅이 초연한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필두로 김상경, 장두이, 이원숭 등의 배우들이 열연한 바 있다.

'빨간 피터'는 인간에게 포획돼 '유인원 인간화 훈련'을 마친 원숭이의 눈으로 본 인간 사회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목표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빨간 피터'는 인간이 삶을 반추하고 관조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원숭이 피터의 눈으로 본 인간군상의 부조리를 설파, 참된 인생을 논해 보는 작품으로 4월 3일까지 공연된다.

주호성 배우에게 13년 만에 국내 연극무대에 오른 소감과 2008년 중국 초연무대에서 '빨간 피터' 당시 에피소드, 추송웅 배우에 관한 이야기, 연극배우가 된 사연 등을 들어봤다. 우리가 몰랐던 '장나라 아빠' 주호성의 이야기. 먼저 영상으로 인사말을 살펴본다.

13년 만에 국내 연극무대에 올랐다.
ㄴ 말로는 13년 만이긴 하지만, 연극을 떠나 있던 적은 없었다. 그동안 '꽃마차는 달려간다' 등 연출도 하고, 후배 양성도 했다. '원숭이 피터의 멋진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빨간 피터'와 같은 작품을 중국어로 중국에서 공연했다. 남의 나라말로 연기를 했다는 것이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고 있었고 만 13년 만에 국내 무대에 선다.

어린 시절부터 '빨간 피터' 작품을 하고 싶었다. 돌아가신 추송웅 선배님께서 공연하셨고, 그런 후에 김상경, 장두이, 이원숭 등 선배님들이 공연하셨다. 내가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용기를 내서 2008년 중국에서 하게 됐다. 그때 작품을 현대화하고, 사회 참여화 시키는 데에 상당히 애를 썼다. 지난해 12월에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하고 난 후 한국어로 더 나이 먹기 전에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었다.

한국어로 하려고 중국어로 한 것을 바로 번역하면, 전혀 한국 관객들에게 이해가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오래전부터 같이해 온 김태수 극작가에게 부탁해서 한국어 대본을 완성했다. 중국어로 다 외우고 있던 내용을 각색했다. 그런데 내용 차이가 없는데도, 한국말로 외우는 것이 중국말로 하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웠다. 한국말이 더 어렵다는 것이 참 우스운 말인데, 연기로 우리말 표현할 생각을 많이 하면서 연기 하다 보니 중국어 연극보다 훨씬 더 힘이 들고 그랬다.

젊은 시절에 했었던 연극보다 훨씬 더 좋은 연극으로 관객에게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동안 연기를 하다 보니 제자들도 꽤 있다. 이젠 그 제자들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데,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했던 여러 이야기 중 하나인 "연극답게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래서 더 가슴설레고, 공연날짜 하루하루가 기다려지고,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다.
 

   
 

작품을 꼭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ㄴ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많은 배우가 배우 자신을 심판받기 위해 모노드라마로 많이 하고 있다. 모노드라마라는 것이 대부분 배우로 자신을 심판받기 위해 한다. 나는 사실 40대 초반에 '술'(1987년)이라는 1인극을 해서 나름 많은 칭찬을 받았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 부문 최우수남자연기상 상도 받고 했다. 그땐 1인 17역을 하는 1인극이었는데, 1인극이라는 견해도 나름 생겼다. 나름대로 무대 위에서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겨났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치자면 20년이 지난 다음에 '빨간 피터' 연극을 하게 됐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판타지卍'(1969년), '술'(1987년) 등 두 편의 1인극을 한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의 1인극 견해는 무엇인가?
ㄴ 세상도 많이 달라졌고, 나는 그때 당시 배우만을 하고 있었는데, 20년의 간격에선 차이도 크게  생겨났다. 그 20년 동안 학교나 학원을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고, 연기를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있었다. 그러면서 연예인을 소위 포장하는 일인 기획, 음반을 만들고, 콘서트를 하고, 연예 활동하는 전반적인 일을 다루게 됐다. 그래서 하는 일 자체가 20여 년 전과는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 동네의 안목 자체가 더 넓어진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 특히 연예계를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14년 전에 당시 한국인한텐 척박한 곳이었지만 딸 손 붙들고 중국에 갔다. 아는 사람 없고, 의지할 곳 없고, 선배가 진출해서 행적 쌓지도 않는 동네에 가 새롭게 개척하면서 딸의 연예 일을 하게 됐다.

10여 년이 지나고 나니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한류 본체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남다른 입장도 생겼다. 그래서 중국에서 연극을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입장과 견해의 차이가 크다. 한류라는 본질에서 한국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중국에서 본 한류와는 격차가 많았다. 그야말로 한류에 대한 전문가적 견지를 갖게 됐다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한·중 간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보니 세상을 보는 눈도 기준 자체가 변모한 것도 있다.
 

   
▲ 연극 '빨간 피터'의 한 장면 ⓒ 후플러스

너무나 직설적으로 사회를 이야기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연극이 할 일이 아니라고 봤다. 연극은 운동이 아니니, 은유하고 풍자해서 사람들이 이 사회를 느낄 수 있고,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의식이 연극에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술' 할 땐 사회성이 굉장히 강했는데, '빨간 피터'는 더 많이 숨어서 직설이 아닌 은유와 풍자가 훨씬 더 많이 가라앉아 침착한 연극 같다고 자평을 한다. 침착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1인극은 관객에게 친절하게 해결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지루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다. 사실 1인극도 지루하다. 한 사람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한 사람의 연기자적 다양함을 추구하면서, 그런 지루함이 없도록 극을 꾸며야 한다. 1인극 중엔 관객과의 교류나 호흡을 크게 상관하지 않고 극적인 구성으로 달려가는 1인극이있고, '빨간 피터'의 원작처럼 극적인 구성을 책 안에다 넣은 채로 그렇게 달려가는 연극이 많다.

내가 꾸민 '빨간 피터'는 끊임없이 관객의 반응을 유도한다. 관객의 지루함을 다 털어버리고 허심탄회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원맨쇼 형식의 연극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인데, 그러다 보니 학술적이고 문학적인 소설의 어려움은 프란츠 카프카의 원작이 가진 난해함에 있다.

그걸 어떻게 현대인에게 쉽게 보이게 할 것인가, 재밌게 보이게 할 것인가, 카프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호성은 왜 지금 하는가, 오늘 이야기가 꼭 필요한 건가를 끊임없이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1인극이 갖는 재미를 지루함을 털고, 한 사람의 연기를 보는 재미를 무대 위에 오롯이 보여주려 했다.
 

   
▲ 지난 17일 연극 '빨간 피터'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김태수 작가(왼쪽)와 주호성 배우(오른쪽)가 참석했다. ⓒ 후플러스

고인이 된 추송웅 배우도 이 작품을 했는데, 참고한 부분이 있었나?
ㄴ 초창기에 연극을 하니 많은 선배가 내가 추송웅 형이랑 비슷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따라 할까 봐 연극 학습기에 추송웅 배우의 연기를 안 보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가까웠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선 사촌형제로 같이 출연한 인연도 있다. 추송웅 선배님이 많이 이뻐하셨다.

이 연극이 대본대로 읽으면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1977년 당시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시작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오후 7시 공연인데 이미 오후 1시에 창고극장에서 명동성당까지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이다. 추송웅 형이 1시에 입장시키고 공연을 먼저 했다. 그리고 3시 공연과 5시 공연을 해도 줄이 길었다. 130명 들어가면 꽉 차는 극장인데 180~200명 가까이 넣으면서, 총 하루에 4번 공연을 하신 거다.

4번째 공연 끝나서 앉아 계시는데, "연극에 손님 많이 들면 축하할 일이니 축하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더니 "야, 저놈 새끼가. 형이 '필름'이야? 하루에 네 번씩이나 하고, 아 이놈이 나한테 필름이라고 했어"라고 답하셨다. 그래서 몇 년 지난 후에도 나만 만나면 "내가 필름이다, 인마"라고 장난치신 기억이 난다.

원숭이 분장만 1시간 30분이 걸리는데, 이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ㄴ 얼굴에 털을 붙이는 것 자체가 괴롭다. (웃음) 옛날에 "나는 절대 사극을 안 하겠다. 특히 여름엔 절대 사극 못하겠다. 혹시 내시라면 모르고"라고 말씀하신 어떤 선배 연기자도 있었다. 선배가 땀이 많은 체질이셔서 힘이 드신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분장은 세계 어느 곳이든 심하게 하면 배우가 공연 시간 내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중국에서 그렇게 하고 연기해보니 괴로운 때도 있었지만, 1시간 40분을 견디는데 못 견딜 일은 아니었다. 30~40대 때처럼 연극을 1년에 몇 작품하고, 몸부림치면서 연극을 하던 시절의 추억이 있던 입장에선 오랜만에 관객 만나며 헤비한 분장으로 기다린 시간조차도 이제는 행복하게 즐겨지는 것이 있다 보니 분장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 '빨간 피터'엔 판소리 장면이 등장한다. ⓒ 후플러스

오히려 헤비한 분장은 나름 즐거움이 자신에게 있다. 이 연극엔 느닷없이 판소리도 나온다. 내가 우리나라 사람이고, 우리나라 연극인데 나에게 맞게 각색을 한 연극이니 판소리 한 게 절대로 이상하지 않다. 중국에서 할 때도 판소리를 했는데, 판소리만 한국말로 했다. 한국 배우라면 당연히 탈춤 배운다거나, 판소리를 배우는 그런 기예를 익혀야 한다. 우리 선조의 흐름이고, 그런 느낌은 우리 관객 뼛속과 핏속에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ㄴ 먼저 우리 것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주장한다. 중국 진출하고 보니 판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중국에도 무수하게 있었다. 경극하면 이상한 여성적이고 "이양~"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 우리의 판소리나 우리 음악과도 굉장히 다른 것 같은데, 그런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류가 많다 보니 볼수록 이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는 자존심 하나를 북에서 본다. 중국에서 북은 다 엎어놓고 친다. 우리 판소리 북은 중국의 습관과 관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엎어놓고 치지 않았다. 뚜렷한 자존심이 음악에 있었다. 궁중 악기 중에도 편종이나 편경이 있다. 교류가 있다 보니 중국에도 관계가 있는 악기가 있는데, 모양이 다르다. 확연한 독창성을 발견했다. 모양만 다르고 두께에 따라 음을 다르게 만들었다.

"우리도 그걸 쓰지만, 너네와 똑같이 못 하겠다"는 선조들의 오기 같은 것을 발견했다. 판소리가 우리 음악적이고 잘 발달한 것이라 중국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너네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판소리를 하다 보니 고민을 했다.

중국 민속한 분에게 배워서 중국에서 공연 땐 연극이 끝나고 나서 바로 경극 수염으로 원숭이 '피터'가 귀에 걸고 경극의 한 대목을 공연했다. 판소리 단가하는 것처럼 했다. "대한민국의 민속을 이 연극에 소개했으니, 중국의 민속도 하나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 주호성 배우의 중국 공연 모습 ⓒ 후플러스

그쪽에선 중·한 교류라고 하는데, 한국과 중국의 우정을 위해 내가 이렇게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장예모 감독이 개막식을 맡았다. 그 연습 리허설 장면을 SBS가 촬영해 방영했는데, 중국 네티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정서적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절대 비밀로 해 놓고 뚜껑을 열고 보여주는 것이 문화인데, 우리나라는 미리 준비하는 걸 스케치하는걸 보여주고 소개하는 것이 문화였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다. 그 사건이 지나고 난 그해에 연극 공연 커튼콜에서 관객과 이야기할 때, "나는 한국의 나이 먹은 사람으로 여기 와서 보니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 마음이 '서로 자기 문화 차이지. 그런 게 아닌데'라는 점에 아무도 사과 안 한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사과한다. 용서해달라"고 절을 했다.

관객들이 전부 의자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면 좋은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자존심 상함'이 이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일어나서 같이 손뼉 치고 다른 이야기도 했었다.

한류도 사실 많은 오해를 받는다. "문화침략 아닌가. 드라마, 영화를 팔아먹는데 너희가 우리 건 얼마나 사는가"라는 견해차가 많다. 앞으로 태도를 고칠 건 반성해서 고치고,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 문화를 전파하려는 필요가 있다.

중국이 우리보다 인구, 영토 다 30배 이상 많다. 농산물부터 완벽하게 들여오면 우리는 정신 못 차릴 것이다. 우리 정신을 그들에게 전파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해야 한다. 연극도 내가 바보 같은 교류를 한 것이다. 무식하게 중국말로 연극을 해서 교류를 하나 싶다. 연극도 중국말로 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소개하고 활발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연극인, 연예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 모두 상당한 소질과 재주가 있는 민족이어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그런 자리로 흔쾌히 갈 수 있다는 노력을 정책적으로 보여줘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신 차려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주호성 배우 사무실에 있는 '빨간 피터' 캐릭터 트로피.

연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듣고 싶다.
ㄴ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선택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의 길로 서게 됐다. 어렸을 때, 시골 사랑방에서 '삼국지'를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앉아서 재미나게 읽었다. "관운장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라고 말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흐느껴 우셨고, '조조'가 얄미운 짓을 하면 화를 내시고 했다. 마치 성우처럼 읽던 추억이 어렸을 때 있었고, 남 앞에서 무엇을 하면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서울에 와서,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엔 교회에서 성극을 했다. 한 친구가 장군을 하면 나는 왕을 했었다. 그 친구가 손에다 빨간 크레용을 들고 총소리가 나면 칠하면서 "으악"하고 죽는 역할을 했다. 그 친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분장사가 됐다. 지금은 미국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유명한 친구였다. 교회에서 성극을 할 때 연극에 대한 꿈을 갖게 됐다.

대학교 와서 2학년쯤에 학교보단 무대가 더 좋아서, 학교도 다 다니지도 않고 그냥 빠져나와 극단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한 해에 7~9작품의 공연을 할 정도였으니 연극 무지하게 많이 했다. 결국, 나는 3학년 때 학교에 갈 상황이 아녀서 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후에 2006년 되어서 중앙대 박범훈 전 총장님이 중국 학교 자매결연 활동 등의 공이 커서 국악 공연을 할 때 같이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교직원을 모아놓고 나에게 연극영화학과 명예 졸업식을 열어줬다. 드문 일이었다.
 

   
 

1969년엔 성우 공채로 정식 데뷔했는데, 그때 당시 이야기를 들려달라.
ㄴ 정규모집을 해서 들어갔다. 전속 기간이 끝나면서 프리랜서가 될 때 성우를 그만둘 생각이 늘 있었다. 연극을 동시에 해서 목이 쉬면 당시 국장이 불러서 "방송한다는 사람이 목이 쉬면 어떡하냐"고 야단을 쳤다. 그러면 "그만두겠습니다"하고 사직서를 내밀면 오히려 "세상을 어떻게 살겠냐"고 말한 후 "자기가 좋아서 연극을 하는 거 이해는 하니까 목이 안 쉬도록 노력해라"라고 이야기했었다.

방송시간 잘 지켜서 하는데, 외관도 신경 안 쓰고 '자다 나온 놈'처럼 그렇게 다니지 말고 목도 관리를 잘하고 해라고 어른들이 타일러서 했다. 사실 연극이 하고 싶었지, 방송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연극은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송을 했다. 방송하는 사람한테 "밥벌이 안 되어서 돈 벌고 연극을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영화 후사 녹음을 많이 했다. 1시간 30분에서 2시간짜리 영화니 이틀 밤 정도 새면 그걸로 끝이 났다. 연속극을 하면 반년이 그냥 지나가서, 연극도 못했다. 그런데 영화녹음은 그걸로 끝나니 연속성이 없어서 마르고 닳도록 녹음했다. 1970~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영화에 내 목소리가 안 들어간 영화는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밤새우면서 작업하는 게 재미도 있었고, 돈도 잘 벌고 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등 후학 양성도 했는데,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ㄴ 연기라는 것은 누구한테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최민수의 연기를 똑같이 한다고 최민수가 될 수 없듯이 연기는 자신이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도와주고, 결함을 덜 드러내고,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 연기를 '교육시키는' 방법이다.
 

   
 

그냥 사람들은 발성 연습 시키고 하는데, 잘못된 경우도 우리나라엔 매우 많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는 발성법, 언어훈련을 해야 하는데, 서양식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 말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말이어서, 우리나라 말을 잘 배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국어교육이 잘못되어 있어서 문법, 독해력은 가르치지만 말하는 법은 어떤 과정에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화술과정이 제대로 없다. 나랑 나라랑 밥을 먹고 나서, 카드를 내밀고 "이게 뭐예요"라고 했더니 "이쑤시개 십니다" 이러고 있다. 이쑤시개에 존댓말을 붙인 건데 화술교육이 엉망이다. 클레임을 당하기 때문에, 언어 질서를 무시한 교육을 하는 이들이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교육을 줄이더라도 바른 우리말을 학교에서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튼,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른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문화뉴스와 인터뷰했다. 본인에게 문화란 어떤 의미인가?
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그 문화라는 건 말로 못 하게 중요하다. 우리는 한때 체육이 굉장히 중요한 줄 알았다. 어느 결엔가 체육 예산이 문화 예산보다 늘어나며, 문화는 불균형 발달을 시켜왔다. 근간에 와서야 좋아졌다. 한류도 있다 보니 문화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다.

지역구마다 구민회관이 있고, 지방 도시에도 문화재단이 있고 해서 진흥정책을 많이 쓰는데, 그러다 보니 낭비도 있고 조직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우리의 문화를 육성하고 보호하는 정신이 우선됐냐고 본다면 반성할 것이 많다. 물론 육성을 하다 보니 실수도 생기는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이 좋아졌다고 본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품위있는 문화이고,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가 고고하고 좋아졌다. 아시아에서 우뚝 설 수 있는 민족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만큼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