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 리그에 깃든 닥터 맨해튼의 망령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 이호양 ctiger661@mhns.co.kr 습작가 겸 대중문화소비자이자 작가.

[문화뉴스] 평소 아메리칸 코믹스 기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왓치맨'은 요약하자면 신과 인간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바꾸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인간(오지만디아스 대 로어셰크와 동료들)을 어떤 것에도 개입할 의지가 없는 신(닥터 맨해튼)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왓치맨'의 배경은 사람들이 더는 영웅을 사랑하지 않게 된 시대의 이야기다. 방사능 사고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지식 등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된 닥터 맨해튼, 영웅 중 유일하게 '초능력'이랄 만한 것을 가진 오지만디아스, 그리고 그 외에는 모두 평범한 인간인 영웅들. 이 중 오지만디아스는 세계 냉전 종식을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의 위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닥터 맨해튼과 손을 잡고, 바로 자신이 제3의 위협이 되어 핵폭탄(원작에서는 폭탄이 아니라 다른 무기이다)으로 대도시 인구의 절반을 죽이려고 한다.

누군가 위험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어셰크는 다른 영웅들을 모아 이를 저지하려고 하나, 그 범인이 옛 동료 오지만디아스라는 것을 알고 절규한다. 결국, 핵폭탄은 떨어지고, 미국과 소련은 위협을 막기 위해 평화 협정을 맺는다. 진실을 알리려던 로어셰크는 오지만디아스와 닥터 맨해튼에게 저지당하고, "죽여, 어서!(DO IT!)"이라고 외친 후 닥터 맨해튼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나 그간 오지만디아스를 지지하는 듯 보이던 닥터 맨해튼은 실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강제된 평화는 곧 끝날 것임을 암시하고, 그는 아예 지구와 인류를 떠나버린다.

그런데 우습게도, 원작 코믹스와 비견하여 '왓치맨'을 비판하는 논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신이 원작에서처럼 충분히 냉혹하지 못하다."

이런 비평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잭 스나이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잭 스나이더는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을 '충분히' 냉혹하게 그릴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가 최근 그가 낸 '왓치맨'의 속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다. 

   
 

속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닥터 맨해튼과 달리 전지전능한 신이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오지만디아스만큼 유능한 한 인간이 지구 평화를 빌미삼아 그를 파괴하려고 하고, 로어셰크와 같은 평범한 영웅이 그에게 "날 죽여, 어서!"라고 외친다면? 그래도 그는 인간을 구할까?"

이 질문에서 나온 속편이 바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신은 자애로우며, 인간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왓치맨'과 어떤 점에서 비견할 수 있는지 말하기에 앞서, 우선 다른 모든 불만족스러운 점은 접어두기로 한다. 도입부 자막을 본 순간 번역가에 대해 분노를 느끼다 못해 그만 실소를 터뜨린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기껏 고담에 와서는 남의 값비싼 자동차를 부수며 협박이나 하는 남자가 영웅 취급을 받는 것은 각본가가 영화 외적으로 75년간 쌓인 이미지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하겠다. 감정이입을 할 만하면 전환되는 산만한 - 아마도 꼴라쥬 내지는 의식의 흐름과 같은 거창한 기법을 염두에 둔 듯한 - 플롯도 일단 넘어가겠다.

영화 시작과 함께 느껴지는 '왓치맨'의 추억

'속편'의 영화 속 세계에도 영웅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영웅치고 무능하다. 슈퍼맨은 자연재해를 막기는커녕 이미 생긴 자연재해, 또는 인재(人災)에서 몇 사람 구하기도 벅찬지라 모든 이들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뇌에 빠진다. 코믹스 원작에서 슈퍼맨과 힘이 비등하다던 원더우먼은 둠스데이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급하며, 광속의 수억 배로 달린다던 플래시는 영화에서는 겨우 인간이 만든 CCTV에 찍힐 만큼 느리다. 원작에서는 세계 모든 무술을 통달했다던 배트맨은, 영화 속에서는 만약 복장에 방탄 기능이 없었다면 그 서투른 전투 능력 덕분에 진작 죽었을 것이다.

영웅으로서의 무능만 말할 것이 아니다. 실생활은 이들을 더 강하게 제약한다. 도입부에서 브루스 웨인이 운전하는 차는 참으로 현장감 넘치게 흔들리는데, 그렇게 액셀을 밟아봤자 그는 무너지는 건물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이것이 만화였다면 그는 갈고리 총을 써서 수십 층을 올라가고는, 창문에 매달린 사람을 건물 붕괴 직전 가까스로 구해내어 옆 건물로 탈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인 기업의 직원이 재난과 같은 비극 앞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것뿐이었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브루스 웨인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데 클락 켄트의 경우는 현실의 제약이 더 심하다. 그는 연인과 좁은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처지이다. 원작에서는 수 분 만에 기사 하나를 써내고 슥 훑어만 봐도 교정을 끝낼 수 있던 그는, 영화에서는 편집장의 잔소리 때문에 쓰고 싶은 기사도 마음껏 쓰지 못하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부차적 요소마저도 현실적이다. 의회는 영웅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고, 인명과 재산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다. 원작에서는 기사가 있는 곳은 어디건 기자를 파견했을 정의로운 언론의 상징, 데일리 플래닛은 예산 문제로 이코노미석 탑승을 권장한다. 심지어 화면의 질감조차도 사실성이 넘친다. 다시 말해, 영웅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현실은 지극히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현실은 실은 '왓치맨'도 지니고 있었던 기본적인 틀이다.'왓치맨'의 거의 모든 영웅들은 평범한 인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자경단이다. 닥터 맨해튼과 오지만디아스를 제외하면 그들에게 있는 능력은 오직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뿐이며, 초스피드도, 투시 능력도, 눈에서 나가는 레이저도, 강력한 완력과 힐링 팩터도 없다. 실루엣은 (마찬가지로 아무 능력도 없는) 동성애 혐오자들에 의해 애인과 함께 살해당했으며, 실크 스펙터는 결혼과 함께 영웅 일에서 '은퇴'했으며, 심지어 로어셰크는 돈이 없어 매번 옛 동료들에게 신세를 지는 처지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이 눈물나게 갑갑한 현실 세계를 자기 세계로 받아들였고,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이 영화가 '왓치맨'의 닮은꼴이라는 것은 배경에 더해 영화가 진행되며 인물들이 등장하는 동안 더 뚜렷해진다. 왜냐하면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속편에 난입한 '왓치맨'의 캐릭터들

속편에 나온 '왓치맨' 캐릭터는 총 세 명이다. 닥터 맨해튼, 로어셰크, 그리고 오지만디아스다. 한 명은 신이고, 다른 두 명은 인간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변동한 것은 신인데, 왜냐하면 바라만 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개입하는 신으로 개심했기 때문이다.

우선 닥터 맨해튼. 과거 (인간의 관점에서) 전신 나체로 출현했던 그는 파랗고 빨간 쫄쫄이, 아니 '갑옷'을 입고 출현했다. 지구인의 입장에서 볼 때 슈퍼맨은 전지전능한 신 그 자체이다. 그는 날 수 있고, 완력으로 행성 하나를 옮길 수 있으며, 상처가 나도 곧 회복한다.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지능도 높아서 그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글을 이해할 수 있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으나 대개 크립토나이트는 그에게 고통을 줄 뿐 능력을 없애지는 못한다. '왓치맨'의 모두가 무슨 수를 써도 닥터 맨해튼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이번에는 신은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다. 신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며, '왓치맨' 시절과 달리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신은 손수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인간의 방식에 맞추어 살고자 하고, 하층민을 위한 기사를 써내며 자신을 길러준 인간 어머니를 걱정한다. 요컨대 그는 지극히 자애로운 신의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탐정으로 전직한 로어셰크, 아니 배트맨은 여전히 어딘가 비뚤어졌다. 로어셰크가 그랬듯이. 영화 종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그는 시종일관 슈퍼맨이 인간에게 위협이 될 존재이며, 따라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의 근거는 그에게 주어진 작은 상징들인데, 별 근거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마저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성공한다. 다시 말하지만, 로어셰크가 그랬듯이.

"신이 하는 일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흔한 종교적 변명은 그를 멈추지 못한다. 그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은 그가 조사한 증거들과 증거에 기반한 그 자신의 정의인데, 특히 영화에서는 그것이 꼭 법의 테두리 안쪽에 있지는 않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범죄자 일부를 강력한 화기로 '증발'시켰음을 암시한다. '왓치맨'의 로어셰크와의 차이점을 굳이 들자면 그는 밥을 얻어먹을 처지는 아니며, 가면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반점이 없고, 위생에도 제법 신경을 쓴다는 정도이겠다.

   
 

마지막으로 인간이면서 배트맨과 정반대인 듯 보이는 렉스 루터는 대외적으로는 존경받는 기업가이면서 실상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극한에 다다른 천재이다. 오지만디아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 역시 슈퍼맨 제거에 목을 매고 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언젠가 슈퍼맨이 세계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다르다. 그는 신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한다. 그래서 우리가 신을 숭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그는 자신의 비서, 상원의원들, 반란군들, 도시 한두 개와 같이 작은 것들을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아주 파괴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평행세계: 감독이 바란 세계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왓치맨'의 속편은 '왓치맨'과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 주었다. 신은 인간을 구했다. 개심한 (닥터 맨해튼=슈퍼맨)은 (로어셰크-배트맨)을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을 죽이느니 자신이 그 발밑에 깔려 애원하는 꼴이 되기를 택했다. 또한 슈퍼맨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신을 고통스럽게 죽이려던 (렉스 루터=오지만디아스)를, 자신의 몸을 바쳐가며 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인류를 위해 죽었고, 부활했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감으로써 완벽한 인류의 구원자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배트맨 대 슈퍼맨: 돈 오브 저스티스'의 등장인물들은 '배트맨', '슈퍼맨', 또는 '저스티스 리그'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왓치맨'의 캐릭터들이 옷을 갈아입고, CG로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가장한 형태이다. 원작의 팬들 일부는 이러한 차이를 아예 눈치채지 못하고는 아직도 "슈퍼맨과 배트맨, 렉스 루터가 원작과 너무 다른데, 그 차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라며 불만을 제기한다. 무지한 팬들이여, 이제 납득해야만 한다. '왓치맨' 영화화 당시 그 원작 팬들의 몰이해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잭 스나이더의 관점 내지는 트라우마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왓치맨'의 속편이며, 모든 등장인물들은 '왓치맨'의 등장인물들이 변장한 것으로, 감독의 인본주의적 취향을 반영하여 감독이 바라던 이상향을 그려낸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로어셰크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배트맨을 살렸다. 그는 닥터 맨해튼과 같은 냉소적인 신보다는 인간에게 자기를 바치는 신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슈퍼맨을 하늘로 날려보냈다.

요컨대 모든 싸움에는 이유가 있지만, 그들의 싸움에는 이유가 없다. 그들은 감독에 의해 숙명적으로 인간 대 신으로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 놓였을 뿐이다.

   
 

마치며

글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고백한다. 앞의 이야기는 모두 가설일 뿐이므로, 믿지 말기를 바란다. '왓치맨'은 영화 자체로서도 적어도 수작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평이 중론이며, 따라서 잭 스나이더가 비평에 트라우마를 가졌을 리는 없다. 굳이 과거 작품을 들추어낸 뒤 해명하려고 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것도 남의 캐릭터를 가지고.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웅과 악인에 대한 그의 세계관은 지극히 유아기적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가 바라는 신의 모습이다. 다만 이상적인 신의 모습만 가지고는 그 어떠한 창작물도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다. 이번 영화와 같이 하려는 이야기는 많은데 구성이 산만하고, 원작을 전부 보지 않은 관객에게 불친절한데다 번역가마저 실력이 저급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전 세계 관객 중 아메리칸 코믹스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 '슈퍼맨의 죽음'(1992), '플래시포인트'(2011)과 같은 작품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감독과 각본가는 이들 작품을 오마쥬하고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오마쥬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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