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로했던 만큼 그곳에서는 위로받기를 바라며…

[문화뉴스] 필자가 배우를 꿈꾸며(?) 연기공부를 할 때 연기 선생님들에게 늘 들었던 지적이 있다.

"너는 연기를 자꾸 머리로만 해, 똑똑해서 좋은데…그래서 잘 고쳐지는데…마음이 안 느껴져…"

"연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감정을 움직여봐, 네 안에 감정이 머리랑 같이 움직일 때 진짜가 나온다."

연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고쳐갈 때 선생님들은 늘 나에게 같은 지적을 했었다. 선생님들이 지적하는 부분들은 나 자신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지적을 받고 보니,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활동하는 몇몇 배우들이 예쁜 얼굴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못 한다고 지적을 받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배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양한 감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싶었고, 그 간접적 경험을 하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느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진실하게 감정을 연기하게 되면 그러한 연기가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지난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배우 로빈 윌리암스의 사망 소식이었다. 사실 누군가의 죽음은 모두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로빈의 죽음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로빈의 영화를 모두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 속의 로빈 윌리암스의 모습은 늘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치유를 안겨주는 따듯한 모습이었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 'Carpe Diem'과 'Oh~ Captain! My Captain!'. 키팅 선생님의 교육 방식으로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열정과 꿈을 찾게 된 학생들이 학교의 권위와 억압에 도전하게 되자, 그로 인해 생긴 트러블의 책임을 지고 키팅이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 순간 학생들이 억압의 상징인 책상을 밟고 올라가서 'Oh~ Captain! My Captain!'하면서 키팅을 부르는 장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 굿 윌 헌팅의 맥과이어 선생님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존경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선생님의 꿈을 앗아갔다. 선생님이라는 역할은 하나의 인격체 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로빈으로부터 깨달았고, 그래서 감히 나는 선생님을 꿈꿀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역할 외에도 로빈은 역할마다 그 따뜻함을 잘 표현하였었다.

   
 

미세스 다웃 파이어, 패치 아담스 등등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의 로빈은 늘 포근한 사람이었다. 실제 로빈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배우로서 로빈은 내가 배우를 꿈꾸며 이루고 싶었던 이상에 가까운 배우였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로빈은 굉장히 따뜻한 연기자였다.

사실 배우에게 들어오는 역할은 그 배우의 이미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또 그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가는 배우의 연기력에 달려있지만, 그 연기에는 결국에 배우의 가치관이 담기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그 배우가 지니고 있는 기질이 배역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해왔던 많은 따뜻한 역할은 실제 로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아주 멀지만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따뜻한 하나의 품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의 일부가 사라져버렸다는 느낌'을 가지고 왔다.

'아주 아주 좋은 사람이 떠나갔다는 느낌'을 가지고 왔다. 우울증이 원인인 자살이라는 소식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 로빈은 자신의 연기를 통해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배우는 배우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우 강인한 정신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만큼 여린 감정이 있기도 하다. 로빈은 스크린이나 카메라가 아닌 현실에서 다친 감정들을 연약해진 감정들을 더욱 다스리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스크린이나 카메라 속에서는 감정들이 다쳐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영화의 결말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치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친 감정이 진짜 현실이기 때문에 감독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치유해야 하고, 또 치유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아마도 로빈은 그 과정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그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로빈이 깊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도 몰랐고, 알았다고 한들 내가 그의 우울증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우리를 위로해주던 그가 결국 다친 감정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고, 미안하다. 사실 많이 미안하다.

이제 로빈은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그의 따뜻함과 위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제 우리가 로빈을 위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만, 새로운 세계에서 로빈이 마음도 몸도 아프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로빈, 고맙고 미안해요. 그곳에서는 편안하게 누군가에게 위로도 전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위로도 받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따스함이 많이 그리울 겁니다.

 

[글] 아띠에떠 해랑 artietor@mhns.co.kr

팝 칼럼 팀블로그 [제로]의 필자. 서울대에서 소비자정보유통을 연구하고 현재 '운동을 좋아하는 연기자 지망생의 여의도 입성기'를 새로이 쓰고 있다. 언제 또 다른 종목으로 여의도에 입성하게 될는지. 여전히 나의 미래가 궁금한 인간. 나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여자, 말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여자'.
* 아띠에터는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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