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만이 줄 수 있는 ‘작은 아씨들’의 새로움
소정화, 신의정, 최유하, 홍지희, 정우연, 박란주 등 출연
10월 31일까지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

[문화뉴스 문수인 기자] 150년을 지낸 고전 ‘작은 아씨들’이 오늘까지도 연극·뮤지컬·영화·드라마 등으로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사람들은 ‘작은 아씨들’을 왜 계속해서 보는 건지 궁금했다. 10월 초 개막해 31일까지 한 달도 채 다하지 않는 연극 ‘작은 아씨들’이 그 답을 줄 수 있을까?

 

사진=위클래식 제공
사진=위클래식 제공

그 질문의 시작은 ‘새로운 무언가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작은 아씨들’이라는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오만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연극을 보며 ‘작은 아씨들’이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시대에 비혼을 선언하고 여성 작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몰두하는 ‘조’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자신의 꿈을 끈질기게 좇는다.

‘조’가 ‘작은 아씨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에서 비중이 클 수 있던 건 본연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 펜을 놓지 않는, 목표를 놓지 않고 뻗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상적인 기승전결을 가진 인물이지만 연극에서 ‘조’는 외로움에 자주 안겨있는 것 같았다.

 

사진=위클래식 제공
사진=위클래식 제공

‘조’를 보면, 현재 내가 지닌 것 이전의 순수했던 꿈을 생각하게 된다. 가장 열정적일 때 잡았던 무언가를 말이다. 아예 방향을 틀고 다른 것을 잡았는지, 내 손에서 변색되어갔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조의 펜처럼 순수하게 내 마음을 다 실현해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네 자매의 상징적인 장소에는 촛불이 놓여있다. ‘조’가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에이미의 화방에, 베스의 피아노 등의 초가 불을 밝히고 있지만, 하나둘 독립을 하고 밖을 나설 때마다 꺼졌다.

그 촛불이 꺼진 것이 집 밖을 나서 완전한 독립의 의미도 있겠지만 온전히 자신의 ‘집’을 찾아 불을 옮긴 걸지도 모른다. 불이 꺼졌다고 해석하기보다 새로운 곳을 밝히기 위해 불을 옮긴 거로 생각하고 싶었다. 몸이 약해 집을 나서 떠나지 못한 ‘베스’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며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과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위클래식 제공
사진=위클래식 제공

극 속에서는 각 인물의 서사를 전달하는 데에 방백을 사용했다. 작은 방울이 울리면 핀 조명이 한 인물 인물을 비추고 속 얘기를 터놓게 한다. 간격을 얼마 두지 않고 계속해서 방백을 선보이는데 극의 흐름과 잘 녹아들어 진중한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재치 있는 말과 행동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인물들의 감정 기복이 매끄럽게 이어져 갈등과 고난의 상황이 잘 설득되었던 것 같다.

연극만이 줄 수 있는 새로움을 통해 ‘작은 아씨들’의 인물이 무대에서는 또 다르게 비추어져 흥미로웠다. 뮤지컬 ‘작은 아씨들’이라면 배우들의 세밀한 표정을 관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대학로 극장 특성상 인물과 가까이에서 그들의 소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연극이라는 장르의 매력과 함께 ‘작은 아씨들’의 서사를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위클래식 제공

하지만 그만큼 가까이서 들여다보기에 의상과 소품은 너무나 중요했다. 연극 ‘작은 아씨들’의 의상은 아쉬움이 많았다. 작은 대학로 극장에서 공연하기 때문에 자본이 부족했나 싶을 정도로 시각적인 즐거움이 단조로웠다.

독립하기 전 집 안에서의 네 자매의 의상은 결혼식 같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변화를 주지 않았다. 어쩌면 가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네 자매를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인상적이기도 했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