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박소연 기자] 문화뉴스가 어린이날 선물을 준비했다. 배우, 연출가, 작가, 화가 등을 꿈꾸는 예비 문화예술인들에게 궁금한 것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자 마련한 '어린이가 궁금한 문화예술인 Q&A' 릴레이 인터뷰다. 7번째 주인공은 음악감독이자 글쓰는 DJ '래피'다.

음악가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ㄴ 저는 고 2 때 교내 Rock 밴드를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들었다. Rock 밴드를 시작하고부터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몰입하는 저 자신을 보며 '아, 이 길이 내가 갈 길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하지만, Rock 뮤지션의 꿈을 꾸던 나를 막아선 건 아버지라는 큰 산이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고 2였던 1992년에 경남 진주에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시내에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다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런 시선들이 좋기만 했다. 하루는 아버지한테 찢어진 청바지를 들키고 말았다. 원래는 무릎 부위만 찢어져있던 청바지를 아예 다 찢어버리시더라. 따진다고, 반항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않나.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야겠다. 가출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모습으로 최대한 멀리 떠나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그때부터 저는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Rock 밴드 역시 연습할 곳이 없어 비닐하우스에서 연습하면서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진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

나는 수능 1세대입니다. 수능 1세대는 수능을 8월에 한 번, 11월에 한 번, 두 번을 봐서 둘 중에 잘 나온 점수와 내신성적을 합해 대학교를 가는 시스템이었다. 우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저는 방학 때마다 상경을 하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찾았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내내 그렇게 서울대 도서관에서 지냈다. 그렇게 미친 듯이 1년을 보내고 결국 저는 경희대 섬유공학과 94학번이 되었다. 원했던 학교나, 원했던 학과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진주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경희대 진학과 동시에 들뜬 마음으로 교내 Rock 동아리를 찾아가서 오디션을 봤지만 '사투리가 너무 심하다는' 충격적인 이유로 탈락하게 됐다. 그것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그 동아리에 있던 친구로부터 나중에 전해 들었다. 사투리 때문에 떨어진 거라고.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정말 충격이었다.  친구들과 술 먹고, 놀러 다니고, 노량진 '머키 레코드'에 가서 테이프 사 모으는 재미로 지냈다. 그땐 분노가 쌓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로 스래시 메탈이나 데스 메탈 쪽에 빠졌었다. 그렇게 94학번 새내기의 1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12월이 되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군대에 입대 신청을 했다.

그렇게 첫 겨울 방학을 맞은 제가 새롭게 도전한 일은 뜻밖에도 DJ였다. 진주에 있는 선배로부터 가게에 DJ가 없으니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소위 'Rock 부심'이 대단했던 시기라 음악적 편견이 매우 심했었기에 탐탁지 않았던 제의였지만 어차피 군대 가기 전까지는 용돈벌이도 해야 하니 내키지 않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매드 월드'라는 가게는 진주에서 큰 화제를 불러 모으며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는데, 진주 출신의 당시 세대들 중에는 '매드 월드' 모르면 간첩이다.

나는 그때를 주역에 나오는 괘 이름을 응용해서 '택화혁(澤火革)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짐승의 갓 벗겨낸 가죽을 피(皮)라 하고, 이를 털을 뽑아 쓸모 있게 만든 것을 혁(革)이라 한다. 피를 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짐승 가죽의 털과 기름을 발라내는 작업인 '무두질'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야 짐승의 날가죽은 비로소 새로운 쓸모와 면모를 갖춘 새 가죽이 된다. '택화혁'괘는 연못(또는 냄비나 그릇 ☱, 兌)이 위에 있고 불(☲, 離)이 아래에 놓여 연못 아래 불이 있는 상이다. 아래의 불이 위로 타올라 위의 냄비를 끓이면 냄비 속 물질은 성질이 변한다. 그것이 바로 혁(革)입니다. 제게는 매드 월드에서의 그 시간들이 가요부터 팝까지 그동안 편견을 갖고 잘 듣지 않던 음악들을 다양하게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Rap과의 만남이 바로 매드 월드에서 이루어졌기에 1994년 겨울이 제게는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랩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간직한 채, 95년 4월에 강원도 화천으로 입대를 하게 됐다. 6주 훈련을 다 받고 나니 40명이 전투경찰로 차출이 되고, (지금은 전투경찰 차출 제도는 없어지고, 의무경찰만 있음) 충주 경찰학교로 내려가 다시 4주간 시위 진압훈련을 받고 전투경찰로 복무했다. 그 후 97년 6월에 제대할 때까지 저는 힙합 음악에 무섭게 몰입했다. 제대와 동시에 이번에는 내 발로 다시 매드 월드를 찾아갔고 복학 전까지 DJ를 하며 본격적으로 외국 랩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Snow의 Informer 같은 곡은 아예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1998년에 다시 복학을 하고 나니까 저처럼 미친 사람이 공대 건물에 또 한 명 있더라. 그 친구 이름은 니노리바(ninoliba)인데, 소니뮤직을 거쳐 지금은 CJ 엠넷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I.O.I (아이오아이) 같은 팀들 A&R을 그 친구가 했다. 암튼 저는 섬유공학과, 그 친구는 기계공학과였다. 두 미친 사람이 98년에 그렇게 만나서 경희대 최초의 힙합 동아리 <래빈>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후 중앙동아리 승격 및 동아리 녹음실과 각종 장비 등을 구입하는 노력과 비용은 저와 니노리바 등이 홍대 클럽과 동대문, 시장바닥까지 닥치는 대로 공연을 다니며 모은 돈으로 해결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힙합 방송인 m.net <힙합 더 바이브>와도 인연을 맺게 되어 프리스타일 랩 배틀 코너도 진행하게 되고, K-Coast Story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맡아 활동하게 된 '셰익스피어'라는 팀으로 2001년에 데뷔를 하게 됩니다. 지금의 홍대여신 요조가 그땐 저희 팀에서 래퍼 겸 보컬이었다.

이쯤 되니 음악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더라. 졸업 때까지도 전공을 살려 회사원이 될지, 음악을 계속할지 고민을 계속했었지만, 결국 죽기 전에 후회할 거 같았다. 그래서 학업은 학업대로 마치고 최종적으로는 음악을 선택했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

ㄴ 단호하게 말하겠다. 세상은 결코 뜻대로 잘 되지 않을 거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디폴트 값이다. 나는 이 주제를 가지고 사색을 하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폴트 값을 잘못 설정해놓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될 것이다."라는 전제를 말한다. 세상이 왜 당신 뜻대로 되어야 하는가? 세상이 당신 뜻대로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내 자식도, 내 형제도, 내 부모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다. 공자와 맹자도 천하를 주유했으나 그들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는 왕은 없었다. 그들도 '거절당함'의 달인들이었다. 공자의 별명은 '상갓집 개'이기도 했으며, 문지기들 사이에서는 '안 될 줄 알면서도 계속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심지어 동물의 왕인 사자의 먹이 사냥 성공률도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실패 따위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일들로부터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실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 가게에 가서 욕을 들었다고 해서 할머니와 싸우지는 않는다. 왜? '저 할머니는 원래 욕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학자인 미셸 몽테뉴는 말했다.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한다." 몽테뉴의 말처럼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 대신 스스로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있다.

살다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고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한다. 맑은 날만 있을 수 있나? 비도 오고, 눈도 오는 게 자연의 이치다. 인간의 수명을 대략 70세로 잡으면 26250일인데 그중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이 세계는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우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일이든 사람이든 내 뜻대로 안 될 때, 누구를 탓하거나 절망하거나 그만둘 것이 아니라, "아 그렇구나"하고 실패를 인정한 후, 다시 도전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구나 구나 법칙'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두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면 된다. 하여 인생에는 ‘피벗(pivot)’이 꼭 필요하다.

사냥을 할 때에도 직선으로 나는 새를 죽이기는 쉽지만 방향을 바꾸는 새를 죽이기는 어렵다. ‘방향 전환’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피벗’이란 단어는 아이템이나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이나 진로를 바꾸는 것 등을 지칭하는 용어다. 메신저 ‘카카오톡’은 원래 정보 추천사이트였으며,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의 첫 시작은 위치 공유 서비스였고, 인터넷 라디오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나섰던 벤처기업은 ‘트위터’를 세상에 내놨다. 이들은 ‘피벗(pivot)’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 지금의 래피가 있기까지 제 뜻대로 풀렸던 사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진다는 즐거움이 있다.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도 있다. 양(⚊)만 계속되는 삶도 없고, 음(⚋)만 계속되는 삶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전공을 바꾸거나 이직을 하는 등 크고 작은 '인생 피벗'을 겪는다. 나도 1992년, 고 2 때 처음 음악에 뜻을 품은 이후로 지난 25년간 음악 내에서 이런저런 분야를 넘나들며 무려 열 차례 이상 진로를 '피버팅'한 케이스다. 남들이 보기엔 산만해 보이는 각각의 경력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제 모습의 뼈대가 되었다.

처음으로 공연했을때 기분은?

ㄴ 1992년이었다.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학교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대였다. 우황청심환을 먹고도 진정되지 않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으로 제 인생 최초의 무대를 경험했다. 그때의 그 떨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초심을 생각할 땐 항상 그때의 그 떨림을 떠올리곤 한다.

soyeon0213@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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