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듯이 사랑하고 증오했던 시절, 과거가 되지 않는 기억들에 대하여
실패한 구원의 서사…"더할 나위 없이 나는 혼자였다"

박상영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싶어' 표지 [사진=문학동네]
박상영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싶어' 표지 [사진=문학동네]

마치 지난주에 본 사람처럼, 너는 내게 아직도 생생해. 영원히 과거가 되지 않은 채 현재로 남아 있어. 그러니까, 너에게도 나라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게 분명해. (10쪽)

[문화뉴스 안신희 기자] 소설의 도입부, 방송을 통해 갑작스런 유명세를 얻게 된 심리상담사 주인공 '나'에게, '1004'라는 아이디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수성못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한 겹씩 인생을 은폐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고 독백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통해 '그 시절 겪었던 일들이 언제나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설은 십오년 전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15년 전 '나'의 사춘기 시절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흔하고 무심한 말로 미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시절로 언급된다. 낭만적인 청춘서사를 만들기 위해 종종 축소되곤 하는 과거의 폭력성,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밀하고 '추잡한' 속마음들, 가정 내 갈등을 겪으며 '기필코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나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는 순간들, 또래집단 사이의 분명하고 잔인한 위계, 때로는 무심하게 또 때로는 죽일 듯이 서로를 증오하던 그때의 관계와 감정들에 이 소설은 집중한다. 특히 '중2병'이라는 일종의 멸칭으로 일축되는 사춘기의 감정선을 작가는 진지하고 인내심 있게 묘사한다.

십대의 '나'는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자각하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청소년기의 과잉된 자의식과 퀴어라는 특수성이 계속해서 상호작용하며 '나'라는 인물을 구성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는 것이 '일종의 금기'임을 일찍이 체득하고, 좋아하고 욕망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십대의 '본능이자 특권'을 절제하며 살아간다. '나'는 부모와 집, 성향과 취향, 비밀과 우울, 혼자임을 버티는 방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부끄러워하며 감추려 한다. 하지만 가끔 '학교나 학원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케이크를 나눠 먹고 얼굴에 생크림을 바르는 모습'을 보면 '내가 나 자신을 숨기느라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아득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껏 숨겨야 하는 격동적인 마음들을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 미니홈피에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윤도'는 그 노랫소리를 듣고 '나'를 알아본 사람이다. 2002년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피해 간 독서실에서 '나'와 윤도는 처음 만난다. 독서실에 둘 밖에 없었다는 걸 빼면 그리 특별한 만남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나'의 시점에서 윤도는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누군가 나를 구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거짓말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윤도는 '나'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축구를 할 때 홀로 벤치에 앉아 '해리 포터'를 읽던 '8반 반장'이며, '매일 밤 열한시 궁전 1동 위쪽 층의 노랫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까지 알아본다.

윤도는 나를 목마른 사람처럼 만든다. 자꾸만 기대를 하게 만든다. 보고 있어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윤도는 내게 좋은 사람일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게 마땅할까. 믿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 나는 자꾸만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번번이 실망하게 될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또 기대를 하고 마는 나를 더 미워하게 된다. (263쪽)

첫 만남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윤도와 함께 보내는 '사소한 시간이 못내 소중해 자꾸만 시간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고, 종잡을 수 없는 윤도라는 '도화지의 뒷면에 아무리 추악한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윤도와의 관계는 선명한 듯하면서도 혼란스럽다. 윤도와 '나'는 둘만 있는 곳, 가령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오직 둘만을 위한 공간'인 컨테이너 같은 공간에서는 자주 손을 잡고, 어느 날은 그보다도 가까운 스킨십을 하기도 한다. 윤도는 '나'의 생일에 'LOVE YOU N ME' 라고 새겨진 은반지를 선물하기도 하고, '해피 투게더'를 함께 보며 "그래서(진짜 사랑해서) 우리도 매일 싸우나"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고, 종종 '나'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표현처럼 '성별이라는 장벽이 없는' 흔한 이성 연애에서도 사람들은 연애가 시작하기 전부터 한창일 때, 심지어 가끔은 끝나고 나서조차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곱씹곤 한다. 퀴어인데다 사춘기인 '나'는 반복되는 의심 속에 혼란스러워 한다. 사춘기의 짝사랑이 으레 그렇듯, 대상인 윤도를 자주 생각하기 때문에 윤도의 마음에 대한 자문도 잦다. '나'는 윤도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싶어하고, 윤도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혐오를 느끼고,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는 윤도에게 화가 나고 서운하다가, 이내 더 바라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윤도의 앞에서 자신을 더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과 지나치게 드러내면 모두 끝나버릴거라는 두려움이 '나'를 괴롭힌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똑바로 숨기라고 했잖아. 아무도 네 치부를 눈치챌 수 없게 두꺼운 갑옷을 입으라고 했잖아. (...)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조각칼로 태리라는 존재를 파내버리고 싶었다. 멀어져야 한다고, 절대 엮여선 안 된다고, 누구에게도 태리와의 관계를 들켜선 안 된다고.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태리가 나의 엄청난 치부, 나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덫처럼 느껴졌다. (205-206쪽)

'태리'는 '나'의 두려움이 형상화된 인물이다. 약하고, 그런데도 자신의 특수성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어 공격을 받는 사람. '나'에게 태리는 신경이 쓰이지만 그보다는 답답해서 화가 나고, 무엇보다 혹시 엮여서 자신의 비밀까지 드러날까봐 부러 더 외면하게 되는 존재다. 태리를 보며 '나'는 자신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비밀을 들키면, 긴장을 풀고 방심하면 저렇게 '호모 새끼'로 불리며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태리에게 과할 정도로 방어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태리를 대하는 '나'의 모습과, '나'를 대하는 윤도의 모습은 소설 속에서 종종 겹쳐진다. 가령 태리가 준 생일 엽서를 갈기갈기 찢고 선물인 라이트 노벨을 쓰레기통에 처넣는 '나'의 태도와, '나'가 준 선물이 주변 아이들에게 밝혀지자 '강력한 적의를 품'고 '나'를 노려보는 윤도의 태도가 유사하다. '나'는 태리의 애정을 '밀쳐낸 것도 모자라 진심을 다해 원망하고 있'는 스스로를 '가당치 않'고 '혐오스럽'게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런 마음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태리라는 존재와, 또 태리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과 애정은 '나'가 가장 유기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었다. 십대 후반을 지나고 있는 그들에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우선인 일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남들도 자신 몫의 비밀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는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어렸고, 어리석었다.'

누군가는 그게 성장이라고, 아니면 자연스러운 이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이 혼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나는 혼자였다. (199쪽)

청소년기의 '나'는 자기 자신을 이루는 모든 정체성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고, 성인이 된 '나'는 그 때 그 시절 자체를 은폐하고자 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소설이 향하는 결말이다. 나 자신이나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하며, 어떤 기억들은 결코 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 수용은 아름답거나 담백하기보다는 치열하고 한편으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청소년기의 방황과 혼란, 어느 때보다 날것 그대로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격동적인 감정들이 '1차원이 되고 싶다'에는 진지하게 묘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필연적인 통과의례 같은 시기라고 한들 그 시기를 지나는 게 더 수월해지지는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 박상영 작가는 '사실 구원의 서사를 쓰고 싶었'던 것 같지만, 종국에는 이 소설이 '실패의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 실패는 허사가 아니며 '허우적대며 노력했던' 그 시간들이 결국 삶을 버티게 함을 믿는다고. 이 소설은 실패한 구원의 서사로서 유효하다. '나'도, 윤도도, 태리도,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소설의 중요한 등장인물인 '무늬'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는 별개로 서로에게 구원이 되지 못한 채 그 시절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소설 후반부, '나'는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 홀로 남게 된다. 그 시절의 '나'를 가까스로 버티게 해준 건, 윤도와 함께였던 그때 그 순간이 진짜였다는 무늬의 말이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상대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시절과 마음이 진짜였다는, 그 말을 '삼키고 되새'기며 '나'는 그 시절을 지나왔고, 시간이 걸렸지만 궁극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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