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libi series 3 : Love’展 포스터/갤러리 도스 제공
사진=‘Alibi series 3 : Love’展 포스터/갤러리 도스 제공

시간과 사유의 흔적, 김민영 / 갤러리 도스 큐레이터

연인과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가족과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친구와의 이해타산적이지 않은 맑고 순수한 사랑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개인의 삶에 짙은 흔적을 남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배워온 사랑은 너무나 소중하고 고귀한 운명과 같은 감정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지만 오래도록 그 사랑을 간직하기엔 삶은 유한하며 단일한 하나의 감정으로만 충족되지 않기에 때로 감정을 혼란스럽게 하고 복잡한 심리 상태로 이끌기도 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끝을 맞이한 사랑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도 결국 망각과 그 사이 살아가며 채워나가는 것들로 인해 무심해진다. 이때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겨난다. 이에 고승연 작가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고찰하며 지난 사랑의 순간을 간직하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흔적으로 현재를 기록하여 무언가를 다시 사랑하고 있을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작품은 도자기로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인 요소들을 극대화함으로써 공예적인 특징과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오묘하게 결합된다. 점토를 자궁의 형태를 닮은 병과 즉흥조각으로 구상하여 표면에 손자국과 안료가 칠해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 자유로운 행위의 흔적을 가득 남김으로써 흔적과 행위를 강조한다. 흔적은 현존의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오히려 사라지게 하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를 더욱 드러낸다. 여기서 생겨난 흔적들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흔적이 남겨진 순간부터 고유한 시간을 쌓아가며 역사성을 만들어 간다. 따라서 도자기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작업은 그리움을 극복하고 사랑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해 사랑한 시간과 사유의 흔적으로 채집된 대상들이 끊임없는 변주를 일으키며 서로 어우러진다. 도자기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영원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해당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의 작업은 사랑이 종료되었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사랑한 시간은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야만 변형되는 도자기의 특성이 마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오랫동안 간직해줄 것만 같다. 이에 따라 작품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시간을 초월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 한편 작가는 작품에 구체적인 사랑의 이름을 부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유력한 지표를 만든다. 이는 예술작품 이해가 어렵고 난해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줌과 동시에 작품을 다양한 감각으로 꼼꼼하게 감상하고 자신과 연관성을 찾게 되는 교류와 소통을 이끌어 낸다. 

이번 전시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 속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소개되고 회자됨으로써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멸은 시간의 의미성을 부여받고 새로움을 낳게 하는 동기가 되듯이 사랑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을 생성하는 동력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사랑은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준다. 작품과 마주함으로써 사랑의 끝자락에서 먹먹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기억될 사랑의 시간에 이별의 아픔만 자신만의 속도로 틈틈이 덜어내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의 순간을 기다리고 기대해본다.

Alibi series 3 : love 병, 19x4x24(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19x4x24(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6x7x26(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6x7x26(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6x7x26(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6x7x26(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8x5x31(h)cm, stoneware, glaze, 2023
Alibi series 3 : love 병, 28x5x31(h)cm, stoneware, glaze, 2023
소원, 25x10x25(h)cm, stoneware, glaze, 2022
소원, 25x10x25(h)cm, stoneware, glaze, 2022
즉흥조각 16x8, 18x27cm, stoneware, glaze, 2022
즉흥조각 16x8, 18x27cm, stoneware, glaze, 2022

작가노트

알리바이는 행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Alibi series는 일상의 동일성 속에 묻혀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스치는 행위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현재의 희생을 묵인하는 태도, 자신의 과오를 포함한 행적을 외면하는 태도를 거부함으로써 말랑했던 흙에 남은 자국이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나게 하며 주어진 모든 현재의 시간을 공평하게 의식하고 존중한다. Alibi series는 첫 번째 유년시절, 두 번째 집의 해체 이어 세 번째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Alibi series 3

멈출 수 없는 사랑“병”이 진열장에 놓여 있다. 삶에서 우리는 오로지 지금을 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가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절망하게 한 과거의 사랑은 정말 사라졌을까. 모든 행위는 순간과 함께 증발하지만 흙 위를 걸으면 발자국이 남듯이 사랑의 행위도 우리의 현재를 이루며 남아있다. 의심없던 유년시절의 사랑, 따끔하게 배운 뜨거웠던 사랑의 존재를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로 환원하여 다시 한 번 마침표를 찍는다. 돌아갈 수 없어도 지난 사랑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고, 인정하기 어려워도 기한이 있는 사랑의 종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자궁( womb)의 형태를 닮은 “병”과 “즉흥조각”의 표면의 자국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킨 당시의 모든 행위를 가르키고 있다. 표면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존재의 확인과 동시에 지나감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수련과 비슷하다. 병과 조각은 점토가 굳어진 처음의 시간을 기억하듯 그 사랑의 순간을 기리고 있고 나는 감상하고 지나갈 준비를 오랜 시간 하고 있다.

구체적인 이름:

사랑하는 마음. 의심없는 사랑. 강렬한 사랑. 가난도 두렵지 않은 사랑. 폭설이 내린 밤 다섯식구가 걸었던 동대문 뒷골목. 미안하단 말 대신 드라이기를 들고 들어온 작은오빠. 커다란 간장통을 들고 영화관 앞에서 포스터를 바라보고 서있었다던 어린 시절의 아빠. 참되고 빼어난. 학창시절 소유욕과 헷갈린 우정. 부르지 못하는 이름. 낯설지 않았던 첫만남. 여름방학에 큰오빠랑 거실에서 아침마다 본 만화 엔젤릭레이어. 구운 가래떡을 안방으로 가져다 주는 엄마. 큰오빠 작은오빠 나 깜미 한침대에 구겨져서 자는 낮잠. 수능을 망치고 온 날 졸면서 놓치지 않고 손을 잡아주던 큰오빠 손. 같이 별똥별을 본 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 운이 좋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말 없이 울어주던 눈. 계단이 있는 집에서 너무 아프게 맞은 매는 제외하고 보낸 시간 전부. 깜미가 있던 모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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