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이후 형성된 해방촌
1960년대 전국 스웨터 유통물량의 30%를 차지했던 신흥시장
경성호국신사가 자리잡았던 터로 이전한 숭실학교
주말 데이트 장소로 가볼만한 곳

사진=용산해방촌 / 문화뉴스DB, ['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사진=용산해방촌 / 문화뉴스DB, ['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문화뉴스 안성재 기자] 해방촌은 1945년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와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용산구 일대에 거주하면서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용산구 일대는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지역이었고,  용산구에는 단지 일본인을 위한 중학교와 전쟁에 참여한 일본 군인을 기리는 호국 신사만이 존재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해방촌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해방촌이라는 동네가 형성됐고, 해방을 기점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해방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비록 해방촌은 정부의 허가 없이 지어진 판자촌이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종교시설과 복지시설, 교육시설을 세우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현재도 해방촌에는 과거의 모습이 담긴 곳을 곳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오늘 '핫플' Story는 해방촌과 관련된 이야기를 현재 해방촌을 담은 사진들을 통해 전달한다.

지역공동체 역할을 한 해방교회와 해방촌 성당

사진=해방교회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사진=해방교회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해방촌의 언덕에 자리한 해방교회는 1947년 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직접 세운 교회다. 해방교회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전쟁으로 부모나 남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모자원을 설립해 자립을 돕는 등 마을을 꾸려나갔다.

사진=해방촌 성당 /문화뉴스DB
사진=해방촌 성당 /문화뉴스DB

해방촌 내 천주교 신도가 증가하자 1955년에 해방촌 성당을 건립했다. 보성학교의 학생과 해방교회의 신도 중 약 70%는 월남해온 주민들이었다.

이들에게 해방교회와 해방촌 성당은 해방촌 내 월남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결속하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니트 산업의 중심지에서 예술촌으로 탈바꿈한 신흥시장

사진=신흥시장 입구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사진=신흥시장 입구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해방촌 내 스웨터 제작 사업이 가장 발달한 시기였다. 당시 해방촌 주민의 70%가 가내 수공업에 종사했고 해방촌에서 제작된 스웨터는 전국 스웨터 유통물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해방촌 니트 산업이 부응하면서 신흥시장도 융성했다. 신흥시장에서는 타지에서 온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며 서로 연대감을 쌓던 곳이었다.

사진=신흥시장 내 문 닫은 가게 / 문화뉴스DB
사진=신흥시장 내 문 닫은 가게 / 문화뉴스DB

대형 의류산업의 발달과 중국제품의 유입, 그리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신흥시장은 전통시장으로서의 자리를 잃었다.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해방촌을 떠나고 해방촌에는 고령층의 인구만 남았다.

사진=신흥시장 내부 거리 모습 / 문화뉴스DB
사진=신흥시장 내부 거리 모습 / 문화뉴스DB

서울시는 2016년 신흥시장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시행해서 휴식공간을 조성하고 잘 디자인된 간판과 조명을 설치함으로써 쾌적한 시장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하고 예술마을로 특성화했다.

해방촌 주민들도 '해방촌 도시재생 주민협의체'를 결성하고 신흥시장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비교적 임대로가 저렴한 해방촌에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옴에 따라 니트 산업과 예술공방을 결합한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긴 108계단

사진=해방촌108계단 / 문화뉴스DB
사진=해방촌108계단 / 문화뉴스DB

108계단은 경성호국신사의 진입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경성호국신사는 전쟁에서 숨진 일본 병사를 추모하기 위해 1943년에 지어진 신사다. 이 신사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인의 재산과 노동력이 강제적으로 투입됐다.

해방촌이 형성되고 주거시설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면서 경성호국신사는 해체됐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숭실학교 이전해 자리잡은 터

사진=숭실학교 출신 인물 / 문화뉴스DB
사진=숭실학교 출신 인물 / 문화뉴스DB

숭실학교는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돼 신당동과 덕산동을 거쳐 1954년 해방촌으로 이전했다. 숭실학교가 자리 잡았던 자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호국신사가 위치했던 곳이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아픔의 장소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가 터를 잡아 교육의 산실로 거듭난 것이다.

숭실학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운동가를 배출했고 황순원, 윤동주 등 문화예술가도 숭실학교를 거쳐갔다. 

사진=해방촌 간판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주말 데이트 장소로 가볼만한 곳으로 많이 방문늘어
사진=해방촌 간판 / 문화뉴스DB['핫플' Story] 해방 후 고향 떠나온 이들의 보금자리, 해방촌 걸어보기주말 데이트 장소로 가볼만한 곳으로 많이 방문늘어

해방촌은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를 안은 채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여 유행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중이다. 외국인의 유입으로 이색적인 분위기를 느끼지만 과거사를 알고 해방촌을 구경한다면 더욱 다양한 측면에서 해방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주말 데이트 장소로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되어 방문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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