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가업을 잇는 한려수도의 제사장, 그의 삶과 예술을 듣다

[문화뉴스 고나리]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의 인간문화재 기획시리즈 공연 더스토리(The story)가 오는 23일 저녁 730분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의 주인공은 국가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의 인간문화재 정영만 선생이다.

기획시리즈 더스토리(The story) 공연은 인간문화재를 대상으로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 그의 예술을 보고 듣는 공연이다. 정영만 선생과 대담을 나눌 전문가는 남해안별신굿으로 박사가 된 김형근 전북대 교수이다.

거제 일운면 양화마을의 별신굿 (2022)
거제 일운면 양화마을의 별신굿 (2022)

정영만 선생의 집안은 거제와 통영에서 대대로 무업에 종사했던, 세습무 집안이다. 현재 11대의 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를 이어오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굿과 무당은 미신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그 또한 새끼무당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굿판을 떠나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세월이 좋아져서 굿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무당이 인간문화재가 되는 시절이 되었다. 남해안별신굿은 1987년 지정을 받게 되는데, 이때 초대 인간문화재는 정영만 선생의 고모할머니인 정모연 선생이었다. 그러나 정모연 선생은 1989년 타계한다. 그러면서 유언처럼 남해안굿판을 지키라는 부탁을 정영만 선생에게 한다. 정모연과 굿을 하던 무녀와 악사들도 그 즈음 하나 둘 떠나면서 정영만 선생은 홀로 남게 된다.

남해안별신굿 초대 인간문화재 정모연 선생과 정영만 선생이 같이 했던 마지막 별신굿 (1989년)
남해안별신굿 초대 인간문화재 정모연 선생과 정영만 선생이 같이 했던 마지막 별신굿 (1989년)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대학가에서는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나며 탈춤과 농악, 굿이 매우 인기있는 동아리 활동이었다. 남해안별신굿도 다행히 지역의 대학생들이 관심을 보여 정영만은 이들을 데리고 그 전통을 잇는 노력을 한다. 그러면서 그의 3남매를 설득하여 피리, 대금, 해금 등 국악을 전공하게 하였고, 곧 이들도 이제 함께 굿을 하며 세습무의 대를 잇고 있다.

현재 거제와 통영의 바닷가마을에서 굿을 하는 마을은 몇 개 남지 않았다. 인구소멸로 마을이 없어지고 있다. 점차 인구는 노령화되고, 생업도 시들해지면 굿을 할만한 재원도 없어졌다. 그래서 지자체의 후원을 받는 3-4개 마을 외에는 이제 그 많던 마을굿(별신굿)이 단절되었다. 그래서 정영만 선생을 비롯한 남해안별신굿보존회 회원들은 무대 공연을 더 많이 한다. “현실은 피할 수 없습니다만, 이 예술은 굿판에서 실제 믿음으로 행해졌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보기 좋고 듣기 좋게 하기 보다,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잘 되라고 빌어주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정영만 선생은 말한다.

두 아들과 함께 굿판에서 무악을 연주하고 있는 인간문화재 정영만
두 아들과 함께 굿판에서 무악을 연주하고 있는 인간문화재 정영만

한편 거제와 통영의 굿은 통제영의 영향을 통해 수준 높은 삼현육각을 연주한다. 음악적으로 전라도와도 가깝기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예술적 특징을 고루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공연의 사회와 대담자로 나선 김형근 교수는 “세습무들은 접신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입장에서 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이들은 신들이 좋아할만한 장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예술적 역량이죠. 춤, 음악, 노래. 그래서 이들은 ‘예술무당(아트샤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미신’이라는 시선을 거두고 예술적 측면에서, 또 한 개인의 파노라와같은 삶의 이야기를 들어봐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회자 김형근 교수(좌)와 인간문화재 정영만(우)
사회자 김형근 교수(좌)와 인간문화재 정영만(우)

문화뉴스 / 고나리 기자 press@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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