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허물>을 보고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되뇌어본 적 있는가.

한 아버지가 자꾸만 허물을 벗어젖힌다. 지겹지도 않은지 무려 여섯 번이나 허물을 벗어 던지며, 아버지는 점점 젊어진다. 치매를 앓고 있는 80대의 노쇠한 아버지에서, 다정한 60대 아버지로, 그리고 고집이 센 50대 아버지, 얄미운 40대 아버지, 천방지축 30대 아버지, 조국에 충성을 다하는 건실한 청년 20대 아버지까지. 주인공 다쿠야는 허물을 벗으며 젊어지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기막힌 발상이다. 허물을 벗는 사람이라니. 허물이란, 파충류나 곤충 따위가 자라면서 벗는 껍질을 가리킨다. 곤충이 '허물을 벗는다'는 말은 유충이 성충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을 벗는다'는 말은 자신을 옭아매던 누명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허물은, 한 존재의 성숙한 발전을 일컬음과 동시에, 자신의 본질을 가리고 있던 무언가에서 벗어남을 동시에 뜻하고 있는 단어다. 그렇게 아버지는 허물을 벗어갔고,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고 있던 '누명'들을 벗어나 갔다.

   
 

여러분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묻는다. 그대들은,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되뇌어본 적이 있는가. 서류에 쓰는 '부모님 성함' 란을 제외하고, 그대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본 적이 있는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생소하다. 아버지의 이름이 생소하다. 종이에 쓰인 아버지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 귀에 박히는 아버지의 이름은 낯설기 그지없다. 시인 김춘수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이다. 호명(呼名)의 순간이 어색한 그 이름. 그랬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주체로 호명되기가 어색한 존재였다.

   
 

41세의 다쿠야는 일생일대 최악의 시절을 겪어내는 중이다. 대학 동창과의 불륜으로 인해 가정은 파탄이 나고, 교통사고를 내게 되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며,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게다가 치매 걸린 80대 아버지 병수발까지. 그야말로 다쿠야는 절망적인 순간을 살아내는 중이다. 그와 중에 마주한 아버지의 허물 사건은, 다쿠야를 점차 변화시킨다. 그저 내 인생의 한 배경이었던 아버지란 존재가, 생명력 넘치는 역동적인 존재로 다가오면서, 그는 천천히 아버지라는 한 자율적인 존재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의 모습은 세대에 따라 변한다. 80대의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셔서 아들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60대의 아버지는 아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다독거려주는 사람이다. 50대의 아버지는, 무쇠 고집에 고지식하기 그지없다. 40대의 아버지는 답이 없다. 자신의 동창 친구와 아내에게까지 들이대고, 겉멋과 허황된 꿈만 쫓는 한심한 모습이다. 30대의 아버지는 혈기왕성하며, 20대의 아버지는 순수하다. 그는 6명의 아버지를 조우하게 되면서, 아버지도 자신의 삶의 주체적인 주인공이었음을 어슴푸레 깨달아간다. 그 역동적인 존재들을 겪으면서, 다쿠야는 그들을 일관된 태도로만 대하지는 않는다. 60대 아버지에게는 힘들었던 삶을 털어놓으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40대 아버지와는 격렬하게 싸운다. 30대 아버지는 철없는 동생처럼, 20대의 아버지는 귀여운 청년으로 대한다.

연극 <허물>은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율성을 되새겨보는 사유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더불어 일관적이지 않은 한 인간의 일생을 들춰보며, 인간이 얼마나 불연속적인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해준다. 80대, 60대, 50대, 40대, 30대, 20대의 아버지들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식성은 물론, 성격, 모습, 꿈, 가치관까지 모두 다르다. 이 사람들이 과연 '한 사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이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6명의 배우들이 모여 한 사람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지극히도 사실적이다. 인간은 '일련'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논리와 순차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이자, 우연적이며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한 사람의 성격 안에도 이항대립적인 요소의 공존이 가능할 것일진대, 어떻게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한결 같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아버지는 허물을 벗어갔다. 그리고 이내 20대의 아버지가 되자, 20대의 어머니 게이코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과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끝내고 나서 보니까, 그걸로 충분히 재밌었어!"라고 외친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우리들의 시절 또한 지나가고 말 것이다. 치열했던 순간이 지나고 보면 유쾌할 수 있듯이, 지나간 세월은 모든 무게를 가벼이 만든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는 아들에게, 허물을 벗는 아버지들은 각 시절들에 충실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츠쿠다 노리히코가 이 부조리극을 어째서 '희극적'으로 만들었는지 알 것도 같다. 인생은 비극적 요소가 가득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극이라는 것. 다쿠야의 인생은 바닥으로 볼품없이 '추락'하는 종이비행기의 모습이 아니라, 다소 불안정하지만 다시 이륙할 가능성을 머금은 '착륙'이었던 것이었다.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장기영 kalce7@mhns.co.kr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