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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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다. 분명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딱 꼬집어 말하기가 힘들다.

   
 

분명 인생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두 발을 제대로 땅에 뻗대고 서있기가 힘들어 간신히 비틀거리며 서 있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무언가로 정의하기가 힘들어서 '모른다'고 대충 둘러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었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그저 힘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히키코모리'란 단어만큼 사람을 무력한 존재로 지칭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낙오자' 혹은, '정신이상자'들로 치환되어 불리던 단어, '히키코모리'에 대한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집에 들어가, 정확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가족들과의 소통마저 끊어버린, 일본의 사회적 표현에 의하면 "타인과의 교류와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히키코모리이다. 주인공 모리타는 10년 '짜리'였고, 타로는 8년 '짜리', 카즈오는 20년 '짜리'이다. 극에서 타로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히키코모리인 것을 숨기고 살아왔노라고 고백한다. 히키코모리는, 'ひきこもる(히키코모루; 틀어박히다)'라는 자동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명사이다. 그 뜻과 정체성만큼이나, 히키코모리라는 존재 자체도 숨겨지기에 급급하며 소외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연극의 드라마터그 이홍이의 글이 자꾸만 맴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유난히 팔 힘이 약하거나 이름 외우기에 약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약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 ‘결함’으로 인해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상처를 받고, 무너지고, 견딜 수 없어하고, 그래서 급기야 화를 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드라마터그 이홍이는 히키코모리를 단지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20년 '짜리' 히키코모리 카즈오가 쓰레기 더미에서 첫 등장을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히키코모리 출장 상담원인 쿠로키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얼굴만 배꼼 내민 그의 모습을 회상한다.

   
 

쿠로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카즈오 : "어우러지는 연습 중이에요."
쿠로키 : "뭐랑요? 쓰레기랑?"
카즈오 : "세상이요. 세상이랑 어우러지는 중이에요."

쓰레기에 뒤덮여 있던 카즈오는, 세상과 어우러지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곧, 카즈오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같이 어우러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담아내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카즈오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게 방 안에서 쓰레기 악취와 동고동락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아픈 그들은 스스로를 집안 방구석으로 몰아넣었고, 모든 관계를 단절해버린다. 어떤 경위로 인해 그들이 마음을 다쳤는지는 모른다. 저마다 사정으로 인해 각기 다른 상처를 마음에 품은 그들이, 제각각이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아닐는지.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이 연극이 미세한 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던 인간의 정체성이란, 인간은 개별적이고 연속적이고 지극히도 예외적이란 것이다.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봤다면, 히키코모리를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병적 존재로 치부하는 일이 가능할까? 인간을 연속적인 존재로 여겼다면, 히키코모리를 출장 상담소에 의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절망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을까? 히키코모리를 향한 인식은, 우리가 '인간'을 구조적으로, 혹은 단절된 존재로 여겨오지 않았나 하고 곱씹으며 반추하게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청년 세대를 일컫는 단어가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포세대', '칠포세대'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며 우리 청년들이 스스로 '포기'해가고 있는 것들이 점차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지를 표현해주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게다가 취업과 희망까지. 더 이상 이들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우리 옆 나라 일본도 청년세대를 일컫는 신조어가 등장한지 꽤 오래다. 파트타임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타(free+arbeiter)', 자발적 백수족 '니트', 그리고 '히키코모리'까지. 일본의 청년 세대도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이라 불리며, 환멸과 좌절 사이에서 스스로를 '포기 세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실업사회를 혐오하여, 파리에 건너가서 쾌락적이고 허무적인 생활을 했던 미국의 청년 지식인들을 일컫는 세대가 이른바,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원조이다. 20세기 인류 사상 최악의 전쟁을 겪어낸 미국의 젊은이들과 평탄해보이지만 속으로 곪아가고 있는 21세기의 일본과 대한민국의 젊은이들, 희망을 포기해버린 세대들에게 연극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그 누구보다 히키코모리 기숙사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이던 카즈오는 결국 자살한다. 파트타임에 고용되었다며, 멀지 않은 미래를 향해 소박한 꿈을 수줍게 얘기하던, 카즈오는 결국 첫 출근 날 스스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한다. 카즈오의 장례식장에서 자책하며 안타까워하던 모리타를 향해, 쿠로키는 이렇게 얘기한다. "(카즈오가 자살하리라는 것을) 알면, 알았으면 막을 수 있었겠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우리는 단지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만 도와주는 거야."라고 말이다. 따뜻하고 믿음직해보이던 쿠로키가 그 누구보다 매정하고 무책임해보이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그러나 이내, 그것이 '히키코모리 출장 상담원'의 정체성을 담은, 우리 사회구조의 원리를 여실히도 담고 있는 대사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예외 없이, 집 밖에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원리. 이것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아주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인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히키코모리 출장 상담원'이라는 직업을 허락하고, 심지어 그들의 치료 활동을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따라서 단 한 가지의 원리에 기초한 상담사들의 역할은, 히키코모리를 '세상 밖으로' 구원해내기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 히키코모리를 '절망적인 세상에서' 구원해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를 무작정 밖으로 이끌어내기에 앞서, 우리가 과연 그들에게 스스로 딛고 일어설 충분한 기회나 시간을 주었는가, 묻고 싶다. 자연에는 '자정능력'이란 것이 존재한다. 자연에서의 환경오염 물질을, 자연 스스로가 정화하는 작용을 말한다. 어쩌면 인간에게도 이런 능력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히키코모리라는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 우리는 그런 능력이 전제된 존재로 여긴 적이 있기나 하느냐, 묻고 싶다. 한 히키코모리는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가 '정신 차려', '열심히 해야지'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 조금 건강해지고, 난 조금씩 밖에 나가게 되었다."

   
 

히키코모리는 우리 청년 세대, 더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히키코모리를 향한 질타, 비난의 시선이, 곧 무기력한 현대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사회의 아니꼬운 시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을 향한 그런 예외 없는, 절대적이고도, 단절되며, 구조적인 시선들이 바로 인간의 개별성을 처참히 밟고 있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고찰로까지 이어진다. 많은 것을 포기한 세대, 아니,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히키코모리'는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밖으로 나오길 강요받는 히키코모리, 어쩔 수 없이 나와 결국은 삶을 포기하고 마는 카즈오. 이것이 우리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향한 시선이 아닐 수 있다고,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미래가 아닐 수 있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히키코모리가 밖으로 나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히키코모리 스스로 밖으로 나오고 싶은 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장기영 artietor@mhns.co.kr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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