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진부할지라도, 돈 없는 청년들의 진심어린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 요즈음이다. 돈이 없으면 사랑도 우정도 모두 가짜인 것만 같다. 각기 다른 삶, 제각각의 인생이 존재할 진대, 모든 존재들의 이유와 최대 목적은 오로지 '돈'인 것만 같다. 마치 돈이 결여된 이야기는 진정성이 흐려지는 판타지처럼 들리기라도 하는 듯하다. 자본을 향한 무한한 경쟁이 극렬해짐에 안타까워 하는 가운데, 연극 '모범생들'을 만났다. 연극은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의 치열한 학벌 경쟁이, 어떻게 한국 사회 내의 고질적인 무한 경쟁 체제와 물질만능주의를 만들어가는 지를 시사한다.

   
 

연극은 대학로 인기 연극답게 쇼(show)적인 요소가 많았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바퀴달린 책걸상과 쭉 이어져있는 문이었다. 강렬한 비트와 조명에 따라 책걸상과 문들은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그에 따라 새로운 상황과 분위기가 각각 연출될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요소로 '교실'이라는 공간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책걸상과 즐비한 문들만으로, 삭막한 교실이 잘 표현됐다. 더불어 배우들이 배경음악에 맞춰 절도 있는 안무를 출 때에는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 강렬한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그러나 연극이 연극답지 않아서 아쉬웠다. 대중성을 포기하지 않은 연극이라 그랬을까. 쇼가 가미된 연극에는 연극 특유의 화려하지 않은 감성들이 다소 결여돼 있었다. 마치 넘버가 적은 뮤지컬을 보고 온 느낌이었다. 장면들을 꽤나 화려하고 강렬하게 다루면서, 배우들의 대사들이 가끔 들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연극 '모범생들'이 B급 연극이지 않은 이유는, 강렬하고 화려한 장면들이 하나하나 그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찌든 명준과 수환이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 가식으로 점철된 그들의 인성은 가식적인 손놀림 퍼포먼스에 의해 잘 표현되었고, 반장을 때리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바퀴달린 책걸상으로 위협하는 장면은 평범한 오브제를 퍼포먼스의 중요한 도구로 탈바꿈시키는 장면이 됨으로써 퍼포먼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연극에서는 '태생부터가 다른' 반장 민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늘 전교 1등만 하는 민영이는 명준에게 시기의 대상이자, 자신을 구제해 줄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평등'보다는 '질서'를 주장하는 민영에게, 명준의 구제가 성공적으로 성사될 리 만무하다. 제 꾀에 넘어가 곤경에 처한 명준은, 민영에게 버림받는다. 오히려 그의 구제의 주체는 오히려 자신이 무시하고 이용하기만 했던 종태가 되었다. 그러나 친구를 생각하는 종태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명준과 수환은 모든 악행의 원인을 종태에게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은 아주 가관이다. "선생님, 종태 한번만 봐주세요. 종태는 저희가 보장합니다. 저희 '모범생들'이잖아요."

   
 

명준은 극 내내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못 바꾸잖아요"라는 대사를 몇 번이고 외친다. 이 말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새삼 무서워지고 가증스러워진다. 더구나 알면서도,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너무 서러워지고 서글퍼진다. 나는 오늘 돈 없는 청년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믿는 그 마음 하나로, 이 각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겠다는 다짐에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들의 결심이 얼마나 어렵고 용기 있는 결정이었는지 절실히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판타지'로까지 느껴져서 더욱이 서글펐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몇이나 되며, 이 각박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 속에서 반칙 한번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명준이라는 캐릭터에게는 마냥 손가락질 할 수 없고, 종태라는 캐릭터에게는 마냥 칭찬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깨달았다. 명준이와 수환이는 모범생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현실을 가장 현실답게 살아가고 있는 '모범생들' 말이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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