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작은 소극장 안, 단 한 명의 배우만이 가득한 삶의 고통을 치열하게 연기한다. 배우 윤석화는 연극 '먼 그대'에 출연하는 단 한 명의 배우이자, 연출가이다. 그녀는 서영은 작가의 단편소설 '먼 그대'를 연극화시켜 무대에 올려놓는다. 문학적 묘사를 대사로 고스란히 읊조리는 윤석화는, 왠지 모르게 낯설다. 모노드라마를 처음으로 눈앞에서 목격한 나는, 모노드라마의 치열함과 고독함을 마주한다. 연기 인생 40주년을 맞이한 배우 윤석화가 연출 인생 60주년을 맞이한 스승 임영웅을 위해 만든 헌정연극이 바로 '먼 그대'이다. 그녀의 연기 내공을 짐작하게 하는 40년의 세월과 모노드라마라는 고독한 사투는 어딘가 닮아 있다.

 

   
 

 

'먼 그대'는 노처녀 '문자'의 이야기이다. 시집도 안 가고 출판사 교열 업무만을 십 여 년 충직하게 해낸 그녀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별 볼일 없는 국회의원 비서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다. 아무 욕심도 없이, 십 년을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버텨온 세월, 그리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며 살아온 세월. 그녀는 열심히 일하고, 열렬히 사랑했지만 여전히 '빈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일하면 일할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곤핍해져갔고, 결국은 한 아이의 엄마, 그러나 남편은 없는 여자, 게다가 빚까지 생겨버린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문자가 무대 위에서 처절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고통이여, 나를 찔러라!", 세상을 향한 그녀의 발악이 얼마나 애절하던지. 그녀는 자신의 삶을 '빈손으로 살아온 삶'이라 묘사한다. 치솟는 월세에 안락한 보금자리까지 빼앗기고, 사랑하는 남자도 그녀를 버렸으며, 심지어는 이용하기까지 한다. 부모님은 일찍 여의고 친오빠 또한 타지로 떠난 지 오래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이까지 빼앗긴 그녀는 정말 '아무 것도'가진 것이 없었다. 거센 바람에도 담담하고 침착하던 그녀는 결국 세상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 칼날마저 지극히도 그녀답다. 세상이 주는 고통을 더욱 사랑함으로써 세상에게 복수할 거라고 외쳤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줄 거라고 발악했다.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연민의 시선마저 처절해진다. 

   
 

연출가 윤석화가 원작 '먼 그대'를 연극 무대에 올리면서 취한 형식, 모노드라마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무대는 은빛을 띠는 벽 두 개와 무대 중앙에 위치한 의자로만 꾸며졌다. 그러나 그녀의 대사와 표정에 따라 금빛, 은빛, 보랏빛, 푸른빛 등으로 변하는 벽의 빛깔은 그 어떤 사실적인 오브제보다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 배경음 없이 오로지 콘트라베이스의 선율 하나로 꾸며진 무대는, 고독한 '문자'와 치열한 '윤석화'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갈 길을 잃어버린 문자는 십자 모양을 나타내는 조명 하나로 표현이 됐다. 어딜 향하든 막혀버린 그 길, 어느 곳으로 가든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십자 길의 그림자는 문자의 삶 그 자체였다.

문자는 나무를 보며, 정확히는 그림자로 표현된 나무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고통의 연속을 겪으며, 이제는 고통을 사랑하리라 외쳤던 그녀에게, 고독함은 일상이었다. 고독한 나무 한 그루가 그녀에게 전하는 위로는 공감의 메시지였을까, 다독임의 메시지였을까. 참으로 '문자'스러운 연극이었다. 문자의 이야기가 아니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지루하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모든 연극적 요소들에 대한 이해가 어렴풋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문자'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또 다른 이면이었다. 그래서 문자의 삶을 향해 무작정 비난의 잣대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제 40년이 그러했듯이, 60년의 선생님께도 관객은 '먼 그대'였습니다. 가장 가깝고 싶지만 결코 가깝지만은 않았던 관객을 사랑하며 신음했던 60년의 시간이었겠지요."

배우이자, 연출가인 윤석화는 임영웅 연출가를 생각하며, 연극 '먼 그대'를 만들었노라고, 그들이 겪어 온 인생에서의 관객은 '먼 그대'였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연극 속 '문자'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한 층 더 고통스러워질 삶을 마주할 것이라 예측하며,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신의 등불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저마다의 존재들이 품고 있는 '먼 그대'가 있다. 가까워지고 싶어 '그대'라 부르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기에 '멀게' 느껴지는 존재이다. 연극 '먼 그대'는 연극인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먼 그대'에 대해 묘사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먼 그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 되기도 하였다. 모든 존재들에게 묻는다, 고통과 고독을 가져다주는 존재일지라도, 그대들이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먼 그대'란 무엇이냐고 말이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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