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성균관대 전국 대회 우승 이끈 주역, 현재는 고교 투수 코치로

▲ 현재 상원고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는 박강우 코치. 그는 2001년 당시 모교 성균관대의 춘계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사진ⓒ김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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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이제 갓 봄을 맞이한 동대문야구장의 열기는 그야말로 '잘 달궈진 아궁이'와 같았다. 한쪽에서는 연세대학교 응원단과 재학생, 그리고 졸업생까지 모여 그들의 고유 응원 구호인 '아카라카치 아카라카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고, 다른 한 편에서도 이에 질세라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을 향하여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킹고 킹고 에스카라 킹고! 훌라 훌라 SKK! 성대 성대 빅토리 야!'

한때 공중파 텔레비전으로도 중계방송된 바 있었던 연고/고연전으로 인하여 연세대 응원가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킹고'로 시작하는 이들의 응원가는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은행나무를 뜻하는 영어단어 Gingko에서 K와 G의 위치를 바꾸어 그들만의 응원 구호를 만든 학생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성균관대학교 응원단과 재학생들은 그렇게 17년 만에 다가온 전국 대학 야구 춘계리그전 우승을 바라고 있었다.

성균관의 에이스, 우승의 추억 그리고 코치 박강우

지금은 대학야구의 강자로 평가받지만, 2000년 까지만 해도 성균관대 야구부는 대학 야구계에서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학교 중 하나로 여겨졌다. 특히, 1992년에는 고려대 이상훈에게 14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의 희생양이 되면서 '야구명문'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던 성균관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이연수 현 감독이 취임하면서 부터였다. 광주일고-성균관대 졸업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기 전까지 이렇다 할 지도자 경험이 없었던 이연수 감독은 취임 이후 혹독한 훈련과 함께 선수들 마음속에서 '패배'라는 단어를 잊게 하는 데 집중했다. 2001년 춘계리그 결승 진출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만난 연세대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타선에서는 춘계리그전에서 불방망이 실력을 뽐낸 이현곤이 있었고, 마운드에서는 대학 최고의 투수, 조용준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균관대 총학생회가 아침부터 버스를 전세 내어 재학생들을 동원한 이유도 적어도 '응원'과 '기 싸움'에서는 상대에 밀리지 말자는 의지 때문이었다.

선수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재학생들의 응원에 하늘이 응답한 것이었을까? 성균관대는 객관적인 전력 열세라는 세간의 평가를 비웃듯, 연세대에 5-0 완봉승을 거두며 17년 만에 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연세대 에이스 조용준을 상대로 선제 2타점 결승 적시타를 기록한 4학년 현재윤은 MVP를 포함하여 수훈상, 최다타점상 등 3관왕에 오르며 자신의 가치를 한껏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 결승전의 '진정한 수훈선수'는 따로 있었다. 안방마님 현재윤이 공-수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이 대회의 가장 빛나는 스타로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승전 승리 투수로 기록된 2학년 영건의 활약 역시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한 이 겁 없는 신예는 강력한 연세대 타선에 단 5안타만 내어주는 역투를 선보이며, 자기 혼자 경기를 책임졌다. 9이닝 5피안타 무실점 완봉승. 아직 2학년이라는 점에서 앞날이 창창할 것 같았던 이 젊은 투수의 이름은 '박강우' 였다. 2001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최우수 투수상의 주인공, 박강우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정도만 되면, 프로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인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현재, 당시 성균관대 우승의 1등 공신이었던 그는 어디에 있을까? MVP를 받았던 98학번 현재윤은 은퇴 후 방송 해설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고, 99학번 정재훈(롯데)과 00학번 고동진(한화)은 아직 현역으로 활약 중이다. 그의 나이를 감안해 보았을 때 그도 현역으로 2군에서나마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었던 곳은 예상 외로 고교 야구부였다. 대구 상원고등학교에서 투수 코치로 재직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연고지와 거리가 먼 대구에서, 박 코치는 후학 양성에 힘을 쓰고 있었다.

광주상고 졸업 이후 성균관대에서 한 차례 꽃을 피웠던 박 코치는 졸업과 함께 연고팀인 KIA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지명 순번운 2차 6번, 전체 45번으로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대학 시절 활약에 비하면 매우 박한 평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KIA는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체격이 크지 않고 직구가 최고 130을 넘지 않는 등 구위 자체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못 되지만, 우타자를 상대로는 슬라이더, 좌타자에게는 싱커성 직구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다.'라는 의견을 낸 바 있다. 힘이 있는 이가 살아 남는 프로의 세계에서 박 코치는 그만큼 핸디캡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강우와 같은 유형의 투수가 성공할 경우, 대학 투수들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점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박 코치에 대한 프로의 평가는 상당히 정확했다. 데뷔 이후 1군 기록은 딱 한 경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KBO 기록실에 남긴 박 코치의 기록은 1경기 1이닝, 2피안타 2사사구(1자책), 평균자책점 9.00이 전부였다. 이후 KIA를 떠나 LG에 둥지를 텄지만, 이적 이후에도 등판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06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 모교 광주 동성고 인스트럭터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정식으로 투수 코치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김원중(롯데)의 성장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롯데로 적을 옮겨 스카우트 업무를 잠시 수행했다. 이후 다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던 도중, 성균관대 동문 대선배이기도 한 박영진 상원고 감독의 부름을 받고 현재 투수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부임과 함께 정용준(넥센), 전상현(KIA 입단 예정), 신준영(2학년) 등이 좋은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렇게 그는 14년 전 모교 우승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끔 그 때가 생각나기도 한다."라는 박 코치는 당시 한솥밥을 먹었던 정재훈, 고동진, 김태완 등의 활약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14년 전 모교 우승을 이끌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제2의 박강우'가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뒷 이야기) 2001년 4월 당시 필자는 성균관대 재학생으로 동대문 운동장에 있었다. 그리고 당시 00학번 동기였던 '투수 박강우'를 코치가 되어서 다시 만난 셈이다. 당시 짜릿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동기인 박 코치의 건승을 기원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문화뉴스 김현희 기자 eugenephil@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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