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인종과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공통된 감정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애통하고 허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불행히도 작년 4월, 대한민국은 전 국민이 비통한 슬픔에 갇혀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뒤, 서울문화재단은 세월호 1주기를 추모하고자 특별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Deluge : 물의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과 유사한 비극을 겪었던 호주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한국의 예술가들과 협업 과정을 거쳐 추모극을 만든 것이다. 이는 우리의 곁을 떠나 물의 품으로 돌아간 이들을 기억하고, 남은 사람들을 위로 해 주기 위함이었다.

<Deluge : 물의 기억>은 자연이라는 무한한 존재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이 느끼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 분노와 좌절의 감정을 고스란히 무대에 담아낸다. 주목할 점은 극적 사건과 대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기존의 서사 방식을 거부하고, 오직 배우의 움직임만으로 극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Deluge : 물의 기억>은 무언극의 형식을 취하며, 무용을 기반에 둔 신체 이미지, 소리, 조명 등의 다양한 시청각적 이미지를 주된 무대 언어로써 활용한다.

   
 


이러한 연출 기법이 사용된 연유로는 언어극이 가지는 감정의 강요를 막기 위한 연출의 전략적인 선택이라 추측된다. 무대 위 언어를 통해 뱉어내는 배우의 대사는 극적 환상을 빚어내고, 관객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학습한다. 즉, 관객은 배우가 제시하는 언어적 표현을 마치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인양 착각하고 무분별적으로 수용해, 본인만의 주체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혹은 진정한 내면의 감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출은 극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 보여주고, 관객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비언어적 신체극을 선택한 것이다. 작위적인 감정의 호소가 아닌 관객이 직접 느끼는 공감과 유대감을 이끌어 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Deluge : 물의 기억>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 사이, 홀로 남은 여인이 슬픔의 빠진 표정으로 무대를 거닌다. 물에 휩쓸려 생명을 잃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세워놓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후 잔잔했던 무대 위, 물을 형상화 하는 푸른색의 조명이 드리워지고 거센 파도의 기세를 담은 웅장한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우면서 사람들을 덮치는 물의 파괴력과 위압감이 드러나 관객들로 하여금 공포감과 두려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무언극은 서사가 부재한 채 다수의 개별적인 장면들로만 극을 이끌어가므로 관객의 의식 흐름을 놓쳐 자칫 지루해지거나 극적 긴장감을 깨트릴 수 있다.

<Deluge : 물의 기억> 역시 극 초반 이러한 한계를 보이는 듯했으나, 조명과 음향, 의상 등 다양한 언어 외적인 무대 요소를 통해 무언극이 가지는 아쉬운 점을 희석했다. 각 요소를 나누어 서술하면 우선 음향의 경우, 불안한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날이 선뜻한 소리, 정신없는 유속의 흐름을 나타내는 음악,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울부짖는 배우의 음성 등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서로 다른 질감의 음향 효과를 통해 극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극중 의상 역시, 물을 형상화 하는 푸른색과 사건의 참혹함을 표현하는 듯한 회색의 혼합으로 인물이 물에 떠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극에 생동감을 제공한다.

   
 

연출 미학적 관점에서 음향, 의상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효과는 조명과 어우러진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이다. 극 후반, 유속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그 진가를 보여준다. 수많은 녹색의 레이저를 활용해 깊이 차오르는 물의 실체를 드러내고, 배우들은 그 속으로 떠내려가는 인물들의 저항적인 몸짓과 이내 물속 잠겨버린 무기력한 신체를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유감없이 나타낸다.

죽음을 거부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과 결국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아무런 힘을 내지 못하고 먹혀버리는 인간의 작디 작은 존재를 오로지 몸짓만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는 언어가 전하지 못하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오히려 육체적 언어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Deluge : 물의 기억>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서사 위주의 연극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에게 무언극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신선한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만하다. 필자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몸을 통해 발현되는 감정의 분출을 통해 말로써 표현되지 않는 진한 감동을 전하며, 특히 호주 출신 배우의 몸짓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한국적 감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체의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감정의 공유를 이끌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만, 아직까지 실험극으로 분류될 만큼 충분히 시도되지 않은 무언극창작자의 부족한 경험과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문화적 수준이 빚어내는 극적 소통의 괴리감이 단지 감정의 공유만으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공연 정보
   - 제목 : Deluge : 물의 기억
   - 공연날짜 : 2015. 04. 16. ~ 04. 19. / 2015. 04. 22. ~ 04. 25.
   - 공연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 연출 : 제레미 나이덱
   - 출연 : 제레미 나이덱, 에이미 볼슈타인, 새미 윌리엄스, 엘렌 리스, 탁호영 등

문화뉴스 남지현 기자 pil@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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