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비소리' 포스터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정말 고맙다!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줘서……,"

나무 두 그루, 벤치 몇 개. 황량한 무대 위로 여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인 그녀는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다가 무대 모퉁이에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자 놀라며 그를 맞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노인에게 중년의 남자는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가, 친한 동네 진 영감이었다가, 남편이었다가 아들이 되기도 한다.

중년의 등을 보자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여노인. 고장 난 녹음기처럼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여노인의 모습에 질린 기색도 없이 차분히 몇 번이고 그 말을 들어주는 중년. 그리고 한숨. 관객은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이 모자母子의 일상을 지켜보게 된다. 치매에 걸린 여노인과 그녀의 늙은 아들. 그들의 하루하루는 즐겁고도 지난하다.

   
▲ 여노인과 여노인 아들.

숨비소리란 해녀가 물질할 때 잠수했다가 숨이 다해 물 위로 떠올라 내뱉는 커다란 숨소리다. 해녀가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숨이 다하는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다가 돌아오는 소리다. 언뜻 이 숨비소리가 해녀들의 소리이기 때문에 어머니인 여노인에게 숨비소리의 사연을 덧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극이 끝난 뒤 귀에 선명히 남은 것은 여노인 아들의 숨비소리였다.

"그만하자."

치매 걸린 노인을 수발하는 일은 설령 그가 자신의 소중한 가족이라 한들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그로 인해 자신의 삶마저 일그러져 가고 있다면. 여노인 아들은 저를 위해 일평생 바닷속에서 물질하다 그만 그 안으로 가라앉아버린 어머니를 건져내기 위해 잠수한다. 바닷속은 힘겹고 고단하다. 여노인의 치매 증상은 더 심해지고 그녀의 뒷바라지는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 그 안에서 여노인 아들의 숨은 점점 다해가고, 숨쉬기 위해, 그만 그 지긋지긋한 물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었다.

   

   
▲ 여노인과 여노인 아들이 실랑이를 하고 있다.

무책임한 선택일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어머니의 무릎에 누운 여노인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냥 홀가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얄궂게도 그는 죽지 못한다. 굴레 같은 의무에서 영원히 벗어나길 바랐지만 그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어머니 무릎 위에서 잠들며 느꼈던 잠시간의 해방감이 전부였다. 결국 죽음이라는 그의 선택은 숨비소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물 밖으로 온전히 떠오를 것을 기대했지만 찰나의 해방감을 들이마신 뒤 다시 잠수해야 했다.

여노인 아들은 또 다시 진 영감의 옷을 입고, 여노인의 반복되는 말들을 듣고, 여노인과 화투를 치며, 여노인의 주머니에 주소가 적힌 손수건을 넣어준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여노인 아들의 헛헛한 웃음소리는 관객의 가슴팍에 짠하고 무거운 무언가를 남기고 블랙아웃된다. 누구나 객석을 돌아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 여노인 아들이 여노인에게 다정히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다.

여노인과 대비되는 젊은 조깅녀의 모습, 여노인의 구슬픈 곡조와 조깅녀의 귀 따가운 음악의 대비는 젊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누구나 세월의 흐름은 피할 수 없다는 서늘한 사실을 자꾸만 상기시킨다. 또 자칫 무겁다 못해 육중해질 수 있는 극의 분위기는 여노인을 쫓아다니는 강아지의 깨알 개그로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 연극 정보
   - 제목 : 숨비소리
   - 공연날짜 : 2015. 02. 03. ~ 03. 01.
   - 공연장소 : 대학로 예술마당 1관
   - 작 : 고광시황 / 연출 : 임창빈
   - 출연 : 이재은, 김왕근, 안연주, 이일현

문화뉴스 유하영 기자 young@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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