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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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계란 한 판이 될 때까지 거의 한 지역에서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물 밖을 빠져나온 개구리처럼 그 지역을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극적으로 유수의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웬만하면 고향에 뿌리 내려 살려고 했지만 워낙 좋은 기회라 뿌리칠 수 없었다.

드디어 눈뜨고도 코를 베어간다는 그 무시무시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회사는 이태원에 위치. 기숙사는 김포공항 근처의 화곡동에 위치. 회사와 기숙사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출퇴근하기 힘들다. 그래도 기숙사까지 제공하고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자취방을 얻거나 하숙을 할 정도의 형편이 아니었다.

회사생활은 처음이긴 했지만 나름 잘 적응해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들에게 인사 잘 하고 심부름 시키면 빠릿빠릿 움직이고 회의한다고 하면 커피나 음료도 미리 준비했다. 지각하지 않고 퇴근도 눈치 없이 칼퇴근하지 않았다. 가끔씩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선배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회사의 일원이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두려움도 많았다. 똑똑하고 야무진 서울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잘 견딜 수 있을지, 광고에 대해 거의 전무한 실력으로 잘 버텨낼 수 있을지, 어리버리한 성격에,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이라고 무시당하는 건 않을지 온갖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었던 건 아무리 치열한 전쟁터 같은 서울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믿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 생활도, 지하철 타는 것도, 서울 음식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그런데 적응할 수 없는 단 하나가 있었다. 그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외로움이란 단어와는 무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이라는 별에 나만 혼자 뚝하니 떨어진 것이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고나니 여태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란 감정을 격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한 달 가량은 서울생활 적응하느라 참 바빴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 생활에 적응되기 시작하니 그동안 잠잠해 있던 외로움이란 놈이 스멀스멀 본색을 드러냈다.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의 저항은 점점 강력해졌다.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문득, 보고 싶은 얼굴들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불쑥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 보고 싶다.”

본격적으로 외로움 병이 시작되었다. 음악을 들어도 외롭고, 휴게실에서 TV를 봐도 외롭고, 오징어 다리를 뜯어 먹어도 외롭고, 샤워를 해도 외롭고, 계단을 오르내려도 외롭고, 매점에서 과자 한보따리를 사와 먹고 또 먹어도 외롭고, 소주를 마셔도 외롭고, 물을 마셔도 외롭고, 아침에 눈을 떠도 외로웠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란 시에서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한 번 찾아온 외로움은 참으로 견디는 게 쉽지 않다.

가을 어느 밤, 외로움의 감옥인 기숙사를 가지 않았다. 도저히 기숙사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정말이지 외로움의 칼날에 목이 베일 것만 같았다. 방황하며 여기저기를 서성거리고 있던 찰라, 서울에 사는 동아리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면 안 될까?”

“선배,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후배 집은 대학로에 근처의 10평도 되지 않는 작은 반지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연히 후배 혼자서 살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후배 역시 형편이 되지 않아 누나 집에서 얹혀사는 신세였다.

누님과 매형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퍽 다행스러운 건 누님과 매형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어, 어서 와요.”

그날 밤, 누님과 매형의 눈치를 살피며 비좁은 작은 방에서 쪼그린 채 잠을 잤다.

다음 날, 퇴근 시간 무렵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누님과 매형에게 오늘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

그렇게 해서 어제의 동지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1차는 소주, 2차는 맥주, 3차는 당연히 노래방.

어느덧 시간이 자정이 넘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나는 처량한 표정으로 누님과 매형을 쳐다봤다. 매형이 발그레한 얼굴에 미소를 더하며 말했다.

“늦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매형의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염치고 뭐고 상관없이 퇴근하면 후배네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후배가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에도 후배네 집에 갔다.

“매형, 저 왔어요.”

“어, 어서 와.”

좁쌀 막걸리를 한 잔씩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 나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특별한 약속이나 야근이 없는 날이면 내 집 들랑거리듯 후배네 집을 찾아갔다.

한 반년은 그 짓을 한 것 같다. 뻔히 기숙사를 놔두고 남의 집에서 왜 그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눈치 없는 일이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그때 누님과 매형은 거의 신혼에 가까웠고 집도 비좁고 그리고 후배도 얹혀사는 처지였는데 그곳에서 지내다니 참으로 낯짝도 두꺼웠다.

그런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외로움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외로움을 다스릴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한 계절을 후배네 집에서 보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외로움 병이 치유돼서 기숙사로 돌아온 게 아니라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 낯선 별에서 언제까지 이방인처럼, 방황하는 새처럼 떠돌아다닐 순 없지 않는가. 그래, 받아들이자. 그래, 외로움도 껴안으면 덜 외롭겠지. 그래, 적응하자.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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