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준 연출 "김수로 프로젝트 콜라보, 뉴욕 新연극 한류의 신호탄"

   
 
[문화뉴스] "우리는 서부영화처럼 외길에서 총을 쏴야 한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너무 우리 자신을 제도화하는 게 아닐까? 너무 자신을 제한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 눈치 안 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5살 김현준 연출은 뉴욕시립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에 도전장을 냈다. 그는 우리만의 뮤지컬을 세계에 내보이고자 가장 아픈 부위이자 치료가 필요한 뜨거운 감자,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공연을 올렸다. 뮤지컬 '컴포트 우먼'은 18회 공연 동안 '모든 자리 매진'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냈고, 그는 한국 뮤지컬 기획사로부터도 수차례 러브콜을 받았다.

 

지난 연말, 김현준 연출이 한국에 돌아와 3주간 머물렀다. 여러 뮤지컬 기획사 미팅 및 약 17곳의 매체 인터뷰 등을 진행하며 그는 피로성 급성 장염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김 연출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색깔론을 제하고 할머니들의 진심을 예술로서 승화시키고자 했다. 앞선 인터뷰에서 작품 '컴포트 우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면, 이번에는 김현준 연출 자체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김현준 연출은 5월 대학 졸업에 이어 오는 8월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김수로 프로젝트'와 손을 잡고 뮤지컬 '그린카드'를 선보인다. 미국 영주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그린카드'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비자 기한이 만료된 이후 미국인과 위장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다. 국내에서 프로듀서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 김수로가 참여해, '김수로 뉴욕 프로젝트 1탄'으로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의 극장 중 하나인 세인트 클레멘츠에서 오는 8월 12일부터 28일까지 총 26회 공연된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겨나게 된다. 그가 한국이 아닌 연출 공부를 위해 미국 뉴욕을 간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뉴욕은 '아메리칸 드림'의 땅이었을까? 한국 뮤지컬들을 보고 자란 그가 현재의 한국 뮤지컬계에 던지는 말은 무엇일까? 이 모두를 들어본다.

   
ⓒ 김현준 연출
뮤지컬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인데, 미국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ㄴ '캣츠' 설도윤 프로듀서께서 아이 때부터 저를 좋아해서, 표를 많이 주셨다. 뮤지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또한, 중학교, 고등학교를 자라면서 청소년 할인제도를 받아서 공연을 싸게 볼 수 있었다. 라이센스 뮤지컬을 보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뭔가 이 공연이 부족하다였다. 창작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왜 우리 이야기는 없을까?' 사춘기 때 이 부분에 빠졌다. '여기서 공부하면 라이센스 분들한테 묻힐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속된말로 나는 '깝치는 성격'이어서, 여기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박지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적인 라인 문화로 따지면, 엘리트 라인은 아닌데 영웅 대접을 받는다.' 주 무대에서 뭔가를 하니까 '버프'를 받는 것이다. 집안에 연극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극계 '머글'이다. (웃음) 이러한 점을 넘어서려면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유학을 생각했다. 무조건 뉴욕이었다.

뉴욕으로 연극 공부를 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했나?

ㄴ SAT랑 오디션이다. 연기가 아니라 연출이라서 애매했다. 사실 연출은 대학원 과정부터였다. 나는 연기 진짜 못한다. 독백하라니까 내 이야기를 연기하듯 말했다. 연출이 나밖에 없어서 뽑혔다. 고등학교부터 연출을 꿈꾸면 미국에 와서 틈새시장이라 더 좋을 수 있다. (웃음)

   
 
대학교 때 에피소드를 들려달라.

ㄴ 미국인들 사이에 안 끼워주니까 혼자 멀뚱멀뚱하게 있었다. 근데 미국인들이 하는 이야기 듣고 있는데 틀린 것들도 들렸다. 나를 무시했다. 여기서 어떤 '버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수님을 계속 찾아갔다. 혼자 뮤지컬에 대한 책을 썼다. 라이선스 뮤지컬들을 모아서 소개 글을 써봤다. 그때 당시 한국에 온 뮤지컬을 다 봤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 정도 좋은 포트폴리오가 됐다.

첫 작품이 '프로메나드'였는데, 이상한 아방가르드 작품을 조연출 했다. 한국인의 특징인 빠른 손과 발놀림을 이용했다. 무대감독보다 더 빨리 뛰고 그랬다. (웃음) 게다가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해서 절대음감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좋게 보셨다. 학교에 계신 아홉 교수님의 조연출을 맡게 됐다. 2년간 9작품의 조연출하면서 애들이 나를 조교인 줄 알고, 저번과 다르게 봤다. 그래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연출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다 교집합이 생기니까, 학교 연극부회장도 됐다. 이러한 인력을 총동원해서 '컴포트 우먼'을 만들었다. 운이 좋았다.

촉이 좋은 것 같다.

ㄴ 영악하다는 소리 많이 듣는다. (웃음) 나쁘지 않다고 본다. 내가 남한테 피해 안주는 악이면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연출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 많은가?

ㄴ 다들 대본만 쓴다. 미국 애들도 대본만 써서 끝난다. 그런데 나는 '오프 브로드웨이'부터 하니까, 학교에서 많은 부분 인정을 해주었다. 학교에서는 사회 진출 전만 알려줬는데, 나는 혼자 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부분을 지원해주셨다.

 

   
 

처음엔 작품 준비하면서 리허설 공간 등을 받는 것이 사실 힘들었다. 지도교수도 없었고, 나 혼자 학생이었다. 배우는 학생도 아니었다. 그래서 총장과 학장을 직접 만나서, 난리를 쳐서 얻어냈다. "유학생들은 일반학생보다 2~3배 더 많은 학비를 내는데 같은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세금환급부터 시작해서 내 돈 다 어디에 쓰는가? 왜 교수는 공간을 쓰고 학생은 못 쓰는가?"라고 해서 얻어냈다.

항상 앞에서 내가 절실함을 표현해야 얻어낼 수 있었다. 생존이었다. 생존하듯이 작업에 참여했다. 리허설 공간이 뉴욕에서 사실 가장 비쌌다. 중극장 크기에 140여 명의 스태프가 참여하는데, 그 정도면 3평에 1시간당 24달러다. 큰 곳은 사실 빌리기도 어렵다. 있어도 한 달에 약 천만원은 족히 든다. 그래서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연습해야 하니, 학교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학교 역사에 길이 기억에 남을 학생이 될 것 같다.

ㄴ 싫어하는 교수님도 있지만, 좋아하는 분도 있다. (웃음) 속이 좁으신 분은 나를 미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다. 대학원 가고 싶어서, 두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이번 성과가 대학원 진학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ㄴ 이 작품을 통해서 연출 노조에 가입되니, 학교 측면에서 좋게 본다.(편집자 주 : 지난해 11월, 그는 한국인 최초로 '디모킴 뮤지컬 공장' 대표 자격으로 미국 연출가 및 안무가협회에서 가입허가를 받았다.) 데뷔한 사람만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은 다 노조가 있다. 노조 출신 배우와 비노조 배우들이 조금 나뉜다. 경력이 많은 배우는 무조건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파업 문화가 있는데, 미국이 이러한 문화를 만드는 데 100년이 걸렸다.

그런데 실력이 없는 배우들은 이 소식을 좋아하면 안 된다. 배우들의 능력이 우수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물갈이가 심하다. 즉, 배우들의 진입 장벽이 높지만, 자연스러운 시스템이 노조다. 미국은 실력만 있으면 뭔가를 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라인'을 탈 필요가 없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제시할 수 있다. 연출이 대본을 들고 다니는 시스템이 있다. 프로듀서가 연출 고용하는 건 거의 없다.

 

   
▲ 지난해 12월, 뮤지컬 '그린카드'의 시사회 후 김현준 연출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현준 연출

약 1년 전과 지금, 부모님의 평가가 다를 것 같다.

ㄴ 부모님이 동네 모임엔 잘 안 가셨다. 주변 동네친구 중 다 잘 나가는 애들이 많았다. 치맛바람이 많은 지역인데, 나는 예술을 해서 애매했다. 뉴욕에 가서 뭐하는 것도 없이 아르바이트하고 있으니 부모님께서는 속이 타셨을 것이다. 이제는 인정해주시는 것 같다. 오히려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웃음) 이제는 부모님도 나가서 이야기하시는 거 좋아하신다.

혹시 동생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는가?

ㄴ 동생이 있는데 4살 어리다. 동생도 콘텐츠 학과에 가서 지금 연극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출 쪽으로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동생은 디지털 콘텐츠에 있는 편이 낫겠다. (웃음)

힘들 때, 무슨 노래를 들었나?

ㄴ 공연할 때 MP3를 들은 적이 없다. 지금 깨달았다. 음악을 안 듣고 살았다. (왜 그랬나?) 모르겠다. 지긋지긋했을까? 어느 순간 뮤지컬이 업이 되면서, 이제 중고등학교처럼 인물에 빠져서 뮤지컬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예전 같은 관객이 안 된 것 같다. 아쉽다. 사실 재즈 음악을 좋아한다. 길 에반스와 같은 모던재즈를 좋아한다.

이번 '그린카드' 뮤지컬은 '김수로 프로젝트'와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ㄴ '김수로 프로젝트'가 내 콘텐츠들에 관심을 보이면서 지속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지속될 것 같다. 앞으로 차기작들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협업할 계획이다. 나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김수로 프로젝트'는 프로덕션을 올리는 이런식의 좋은 '신 연극 한류'가 뉴욕에 전파될 것 같다.

   
▲ 오는 8월 정식으로 공연하는 뮤지컬 '그린카드'의 포스터. ⓒ 김현준 연출
보통 우리가 뉴욕을 동경한다. 하지만 김현준 연출에겐 생존의 도시였을 것 같다.

ㄴ 뉴욕은 정말 정글이다. 각자 분야에 맞는 정글이다. 경쟁도시다. 그 분야에 발을 들이는 순간, 유학생으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미국이 다국적이지만 백인의 나라라는 점이다. 백인의 하이클래스가 있다. 그 밑에서 백인 눈에 보이고 끌어주면, 조금 잘해질 순 있다. 주류는 백인, 유대인, 게이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으므로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노력해야 한다. 올라가는 과정이 힘들다. 어떻게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 때문에, 안주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

생존법칙을 알려준 조력자가 있나?

ㄴ 공동프로듀서를 한 미국인 친구 '매튜'가 많은 도움을 줬다. 8살 연상인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8년 동안 파병도 간 예술을 하는 베테랑이다. 매튜가 그러한 행사에 초대를 받으면, 나를 많이 초대해준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바에서 술 마시는 파티 등에 가면 한 다리 건너 연극인들을 알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기 쉬운 문화 때문에, 네트워킹이 쉽게 늘어났다. 네트워킹 파티에서 나올 수 있는 '노다지'가 많았다. 심지어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카일로 렌'을 연기한 아담 드라이버가 미군 출신이라 그 파티에 자주 온다. 참고로 '매튜'의 친형이 이태원에서 바를 하고 있다.

앞으로 꿈을 이뤄야 하는데, 아직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ㄴ 대학원에 갔다가, 군대에 갈 것 같다. 시민권도 고려해본 적도 있는데, 지금 언론에서 계속 보도가 되면서 '열혈 청년'의 이미지가 됐다. 그래서 군대에 가고, 정도를 걷기로 했다.

   
 
성격이 활발하고 부딪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성장 과정의 영향인 건가? 미국에서 느낀 것인가?

ㄴ 유학생들이 느끼는 시한부가 크다. 4년 기간 비자가 끝나면 미국에 있을 수가 없다. 나도 미국에서 한인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보통의 유학생 시절을 보냈다. 꿈을 찾으러 와서 이렇게 유학생활을 끝내는 사람도 있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뮤지컬 연출을 직접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 싫었다. 유학까지 왔는데 중도 포기하기는 싫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기는 싫었다. 거절하면 왜 거절하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자존심도 구기고 계속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한국 뮤지컬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ㄴ 먼저 한국의 지나친 공연 서비스 문화에 거부감이 든다. 어셔(좌석안내원)들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대단한 서비스'가 별로다. 연극, 뮤지컬 등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귀족인 것처럼 대우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예술을 '귀족 상업화'해서 티켓을 파는 마케팅이 존재한다. 나중에 내 공연이 한국에서 올라가면 어셔들 주머니에 손 넣고 일할 수 있도록 편한 극장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다.

또한, 한국은 뮤지컬이 콘서트화 됐다. 관객들 탓일까? 프로듀서들이 잘 이끌어야 한다. 한국에서 공연하면 스타 배우로 작품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콘텐츠가 나서야 한다. 그러나 내가 한국 프로듀서와 방향이 달라서 한국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걱정도 한다. 근시안적으로는 이러한 시스템이 적자가 날 수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득이 될 수 있다. 콘텐츠가 중심이 되는 움직임은 계속돼야 한다.

뮤지컬이 너무 상업화가 되어 있어서 상업예술을 위한 콘텐츠만 나오는 것이 안타깝다. 상업만을 위한 상업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우리 소재를 중심으로 창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많은 다양한 라인업들이 주류 라인업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이센스인 듯한 고퀄리티 창작 등을 많이 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 것 중에 매력적인 소재가 참 많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형기획사를 중심으로 나와서 전체 뮤지컬 시장이 우리 소재를 더욱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마음을 움직이는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것 같다. 후배들이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다면?

ㄴ 우선 완벽한 영어는 필요하지 않다. 겁먹지 말고, 문법 틀리는 거 고민하지 말고, 의미를 중심으로 전달하면 기초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문법에 지나치게 치중하면 소통이 어려울 수 있다. 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잘 모르니까 나의 배경을 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어떠하며, 내가 미국에 온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다. 지금은 유학생 신분이지만 그 한정된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 한다. 현지 뮤지컬 분야에서 알아주는 백인, 유대인, 동성애자도 아닌 이방인인데, 제한된 시간 동안 뭔가를 해보고 싶다.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해도 소개해주고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은 해주셨던 것 같다. 진심만 통하면 해줬다. 로펌에 돈이 부족하다고 요청했는데,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셨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나도 한국 교육과정에서 컸다. 그저 선배들이 따라간 길만 따라가면 성공하는 줄 알았다. 막상 외국에서 시야를 넓히니 더욱 극심한 정글이었다. 오히려 서부영화처럼 외길에서 총을 쏴야 했다.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너무 우리 자신을 제도화하는 게 아닐까? 너무 자신을 제한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눈치도 안 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레드오션인 우리나라에서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하고 싶은 메시지나 이야기를 연출로 나타낼 수 있는 거 좋은 환경이 나오도록 노력하겠다.

[글] 문화뉴스 이우람·김진영 기자 pd@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영상]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