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단거리패 오동식 인터뷰

   
지난 16일 게릴라극장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배우 오동식

[문화뉴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이 시대, 잔뜩 뭉친 어깨의 부자연스러움을 인지하게 해 준 배우를 만났다.

지난 해 연극 '백석우화 –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으로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과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연희단거리패의 배우 오동식이다. 지난 16일 게릴라극장에서 만나 못다 전한 수상소감을 물어보니, 그는 이윤택 연출가의 말을 빌려 "상을 받는 것은 세상이 나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이 생겼다는 뜻"이라며 "결코 내가 잘해서 받는 상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연극계 거장 이윤택의 제자이자, 연희단거리패의 중견 단원인 오동식은 배우이자 연출을 겸하고 있는 다재다능한 연극인이다. 세상을 연극처럼 살아가는 이 집단에 들어가서 배우로서 인정을 받기까지, 오동식의 삶과 연극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 오동식(왼쪽) ⓒ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지난 해 '백석' 역을 맡으며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전하지 못한 수상 소감이 있다면?
ㄴ 연희단거리패는 1년 동안의 스케줄이 빼곡히 짜여 있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려 연극을 잠시 쉬다가, 이윤택 선생님께서 지난 해 7월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 무대를 올리게 되셨을 때 조연출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백석 공연을 가볍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일정도 빡빡했고,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도 2회 정도만 백석이라는 사람과 그의 시를 낭송조로 무대를 꾸며보자고 했다.

그런데 백석 선생님의 삶의 스토리가 너무 기구하다 보니, 점점 작품의 규모가 커지게 됐다. 이후 정식 공연으로 제안받기도 했다. 대전 공연 후, 서울공연이 바로 추진됐고, 이후 앵콜 공연까지 진행하게 됐다. 연극은 백석의 시를 판소리, 시창, 가요 등 여러 방식으로 읽게 했다. 나는 숙련이 안 된 상태였다. 판소리 하는 장면이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몸도 안 좋아져서, 서울 공연 마지막 즈음에는 늑막염이 도져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 간신히 공연은 끝냈지만 공연 이후 조연출로 참여하기로 했던 손진책 선생님의 '춘향이 온다'도 포기하게 됐다.

공연이 잘 끝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늘 이윤택 선생님이 하시는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이었는데, 이번에 배우로서 연기상을 받으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김윤철 선생님은 내게 "연기는 아르바이트로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배우가 되셨네요"라는 말을 건네셨다. 채윤일, 손진책, 김윤철 선생님들은 그 동안 조연출로 일했던 모습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오동식이라는 사람이 연극을 하는 연출이나 조연출이지, 배우라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백석 공연을 보고 '배우구나' 하고 말씀해주셨다.

그동안은 연극을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정체성이 있어야겠구나 싶었다. 배우라는 직업은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느낀다. 이번 수상은,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이런 새로운 깨달음들을 얻어가라고 주시는 상 같다. 배우로 임하는 자세와 연출로서의 작업을 대하는 자세를 정리해야겠다. 상을 받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을 받음으로써 내가 연희단거리패 식구라는 마음이 더 굳어졌다. 그게 나한테 큰 의미다. 더불어 연희단거리패 레퍼토리로 백석우화가 된 것이 기쁘고, 이 공동체의 한 배우로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 기쁘다.

   
 

연극계를 2년 동안 떠났었다. 쉬는 동안 뭐하고 지냈는가?
ㄴ 아무 것도 안 했다. 이윤택 선생님께서 (연희단거리패를) 나가있는 동안 연극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했다. 회기동에 작은 원룸 얻어서 생활했다. 처음에는 오기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야지 했는데,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좀이 쑤실 줄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다. 방 안에서 꿈을 꾸고 공상이나 망상을 했다. 백석의 시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의 마음과 많이 일치했다.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 누가 내 모습을 몰래 보고 쓴 거 같은 그런 창피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감동보다는 쑥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시를 보면 원망하는 마음이 많다. 내 뜻대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힘들다는 시의 내용이 내게 무척이나 와 닿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쉬기만 하던 그 시절의 생각이 '백석우화'를 맡으면서 많이 도움 됐다.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었던 느낌, 그리고 그 시 자체를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

그럼 어떻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나?
ㄴ SNS도 전혀 안 하며 지내던 중이었다. 산책을 갔다가 잠시 TV를 켰는데 거짓말처럼 이윤택 선생님이 나왔다. 바로 끌려고 했는데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부패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뇌리에 박혔다. 인터뷰이기 때문에 선생님은 카메라를 보고 얘기하셨겠지만, TV를 보는 내게는 선생님이 나를 보고 계신 순간이 됐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빨리 오라 하셨고, 돌아오자 조연출로 참여하게 된 작품이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이다.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윤택 연출가


연희단거리패, 그리고 이윤택 연출가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ㄴ 2000년도 극단 산울림에서 조명 오퍼레이터를 맡고 있을 때 이윤택 선생님을 처음 뵀다. 극단생활하며 바라보던 임영웅 선생님은 작업할 때 항상 넥타이에 양복 입으셨다. 객석에 테이블 놓고 스탠드와 커피나 녹차를 두시곤 했다. 정갈하셨다. 반면, 이윤택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를 떠올리자면, 트렌치코트를 입고담배 연기 날리시며, 그 추운 겨울에 맨발로 객석 누비시며, 대배우들에게도 화끈하게 소리치시는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저 분과는 같이 작업하면 안 되겠다…'고 혼자 생각했다(웃음).

이후 시간이 지나 2008년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 학기가 남았을 때였다. 당시 조선일보에 기사가 크게 나왔다. '방통대출신 이윤택, 동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되다!'라고 말이다. 실기 제작실습 수업을 맡으셨다. 그래서 그 수업은 수강신청 하지 않고 빠져 나왔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 한 통이 왔다. 이윤택 선생님이었다. "자네 나 모르나?" "아닙니다. 2000년도에 산울림에서 조명 오퍼레이터 했습니다." "그런데데 왜 너는 내 수업을 안듣지? 잔말 말고 내가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학교와".

그때 실기 제작수업으로 '세 자매'를 했다. 이후 이 작품을 게릴라극장에서 하게 됐다. 선생님께서 여기서 계속 일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희단거리패에 들어오게 됐다. 아마 (이윤택 선생님을) 만나서 얘기 나누다 보면 그분 의견에 반박할 수 없게 된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벌써 8, 9년차가 되고 있다.

   
 


연희단거리패의 공동체 생활을 직접 경험해봤나?
ㄴ 물론이다. 윤정섭, 이채경 이 친구들이 내 동기다. 우리극연구소에도 기수가 있는데 우리는 15기다. 모든 규율이나 규칙이 기수별로 있기 때문에, 내가 비록 다른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많고 경험이나 경력이 있어도 스스로 15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적응하게 됐지만, 처음에는 다 같이 살고, 밥 먹는 생활이 낯설었다. 아침보다는 밤에 깨어있는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침에 나와 산책하거나 연습하는 게 일상이니 그런 것도 적응하기 꽤나 힘들었다. 특히 개인적 공간이 없다는 게 힘들었다. 지금은 후배 친구들이 많이 생겨, 나는 방을 따로 쓰고 있다.

애초에 연희단거리패 들어오면서부터, 배우 훈련보다는 연출 작업을 이윤택 선생님과 같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연출을 하더라도 다른 일을 다 해야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계셨다. 지금까지도 그 방침을 따라 하고 있는데, 이제 선생님께서도 나를 칭찬할 때는 '멀티플레이어'라고 칭찬하신다(웃음).

그런데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다 보니 '깊이'가 없었던 것 같다. 연출도, 배우도 조금씩 잘하고 있지만 배우로서 존재감을 가지지는 못했다. 오는 4월 22일 개막예정인 '벚꽃동산'에서 빼짜를 맡았다. 배우를 맡았으니 전체적인 것을 아우르자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 배역을 완성시켜야겠다. 내게 주어진 역할과 연기를 잘 해냄으로써 극 전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연극 '백석우화'에서 '백석' 역을 맡았다 ⓒ 연희단거리패


백석의 삶과 오동식의 삶은 얼마나 닮아 있었나?
ㄴ 백석 선생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시지만, 유연하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저항하는 방법을 찾으셨던 점은 나와 비슷하다. 강하게 부딪히기 보다는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부딪히는 태도 말이다. 또한 예술에 대한 태도도 정말 비슷하다. 백석 선생님이 전쟁 통에서도 번역에 몰두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을 지키려고 했다기보다는 번역을 하면 번민들이 싹 잊혀졌기 때문 아닐까?

내게 있어서도 연극이란, 현실을 잊으면서까지 몰두할 수 있는 예술이다. 어떻게 보면 불효자고, 모진 삼촌, 동생이다. 누나나 형, 매형들한테 참 인정머리 없는 동생이기도 하다. 내가 6남매 중 막내인데, 연희단거리패에 있으며 부모님과 거의 7년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집을 떠나 밖에 나왔으니 말이다.

한편, 백석 선생님처럼 원망도 많이 했다. 연극 '백석우화'에서 백석이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어디서건 살아나가야 하는 거요.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살아나가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소." 이 부분을 읽으며 많이 반성했다. 백석 선생님이 삼수갑산에서 평화를 얻은 것처럼, 나도 좀 지나면 깨닫게 되겠지 싶은 생각도 든다. 결국 예술에 몰두하며 현실을 잊는 것,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 가족에 관한 것 등이 내 삶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여자들에게 인기 많다는 사실은 나와 다르다(웃음).

오동식 배우가 꼽는 '백석우화' 명장면은? 

 
현재 게릴라극장 극장장을 맡고 있다. 이번에 게릴라극장이 공동운영자를 찾고 있는데, 물망에 오른 사람이나 단체는 있는가? 더불어 게릴라극장 운영에 있어서 힘든 점이 있다면?
ㄴ 2년 전만 해도 공간지원금으로 일 년에 팔천만 원정도 지원을 받았다. 당시는 눈여겨 본 젊은 극단들이 의미 있고 충실한 작업을 하면 이 극장으로 부르곤 했다. 대관료 없이 공연 수입을 일정 비율로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지원이 끊기고 나니 이런 운영방식은 현재 어려워진 상황이다.

사실 대관료란 게 극단 입장에서는 공연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늘 부담되는 금액이다. 한 연출가 작품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하면 다음 작품으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1,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이런 타격이 크게 느껴질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 최대한 그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방식을 고수해오던 것인데, 우리 시스템을 악용한 팀을 만난 적이 있기도 하다.

참 좋은 제도인데, 지원금 없이 2년을 꾸리다 보니 힘에 부쳤다. 다행이도 지난 공연 '백석우화'와 '사중주', 그리고 '백석우화' 앵콜 공연을 하면서 극장 유지가 다소 나아졌다. 처음으로 흑자를 본지 3개월 됐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늘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아니니 걱정이 된다.

앞으로도 게릴라극장은 대관료 없이 뜻있고 힘 있는, 그러나 물질적 여유가 없는 예술가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좋은 제도가 잘 사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박근형 선생님의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등과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여기서 첫 공연을 했다. 이런 자부심 가지며 운영한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다소 한계가 있다.

그래서 공동운영을 계획하게 됐다. '30스튜디오'는 연희단거리패의 레퍼토리 전용극장이 될 것이고, 게릴라는 외부 사람들과의 소통 공간이 될 것이다. 두고 봐야 한다. 뜻을 모으자는 것은 같이 힘을 합하자는 말이다. 경제적인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돈은 단지 책임의 의미고 같이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언급 대상은 없었다. 공동운영이 처음이니, 어떻게 해야 합리적으로 운영될 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여러 단체가 함께 만나서 의견 나누는 장을 만들어야 할 듯하다. 현재는 내부적, 외부적으로 조율 중인 상태다.

   
 


연극 '백석우화'를 통해 배우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졌을 것 같다. 앞으로 배우 오동식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을까?
ㄴ 아까도 언급했듯이 올해는 한 파트에 몰두할 예정이다. 상반기는 배우에, 하반기는 연출에 몰두하고자 한다. 올 하반기에 유진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하게 됐는데, 여기서는 연출로 올라간다. 12월에는 막내 기수 친구들을 데리고 안톤 체홉의 '세 자매'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페르난도 아라발의 '세발 자전거'도 준비하려고 한다. 상반기에는 보고타페스티벌(Ibero-American Teatre Festival of Bogota) 이중섭 100주기 공연으로 '길 떠나는 가족'에서 코러스로 참여하며, '벚꽃동산'에서 빼짜를 맡았다.

연출가 오동식의 모습이 궁금하다. '코뿔소'라는 작품은 어떻게 작업이 됐는가?
ㄴ 이윤택 선생님이 내 연출작 중 유일하게 칭찬해주신 작품이 '코뿔소' 딱 하나다. 매년 하라고 하실 정도로 좋아하신다. 이오네스코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소시민적 정신이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적 정신이나 모토와 맞닿아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부조리극을 좋아한다.

이오네스코가 히틀러에 반(反)해서 '코뿔소'를 썼는데, 지금 시대에도 작품이 아직까지 유효하다. 매우 힘든 작품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극장에 코뿔소를 등장시키고, 극장의 약 2000개의 벽돌로 쌓아 올린 벽을 만들었다가 다시 무너뜨려야 한다. 극장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공연하면 극장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코뿔소'는 연희단거리패보다는 우리극연구소의 레퍼토리로 갈 것 같다. 연희단거리패는 창작극과 전통극 중심이고, 우리극연구소는 해외극을 수용한다. '코뿔소'에서는 사람들이 벽을 뚫기도 하고 그런다. '돌담 쌓았어'라는 말이 있다. 연극에서는 소외된 인간들이 코뿔소를 만들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벽을 뚫는다. 실질적으로 힘든 작업이지만, 뭔가 부수기 시작한 원조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웃음). 참고로 이번에 이윤택 선생님이 연출하시는 연극 '벚꽃동산'도 극장이 다 뜯어진다.
 

   
연극 '백석우화' 마지막 장면 ⓒ 연희단거리패


오동식에게 연극이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연극인이 되고 싶은가?
ㄴ '백석우화'의 백석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아유, 이 전쟁 통에 번역을 계속하면 뭐 하냐. 밥은 뭐해먹고 사냐"라는 물음에 백석은 "이 원고지가 내 밥이다. 이게 날 배부르게 한다"고 답한다. 연극을 한다는 것은 사실 외로운 일이지만, 연희단거리패에 있으면 같은 곳을 보는 사람이 많으니 외롭지 않다. 지금 나한테는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이윤택 선생님이 계시고. 이승헌, 김미숙, 김소희 배우라는 선배 겸 동지들과 후배들이 있다. 그게 가장 큰 힘이다.

그게 바로 내 연극인 것 같다. 사람과 같이 섞여 있다는 것. 굳이 어떤 대단한 예술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옆에서 연극을 다 같이 할 수 있으며 고민도 같이 나눌 수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순간, 그게 연극이다. 그걸 위해 우리가 춤을 춰야한다면 그것도 연극이고, 옷 벗고 소리 질러야 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연극이다. 같이 모여 있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조심스레 이윤택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도 생각한다. 그때를 위해 우리가 뭘 해야 할까 생각한다. 내가 다른 그룹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윤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오태석 선생님께서 연극을 잠시 안하고 계셨을 때다. 이 선생님께서는 오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태석 선생님이라는 해가 지고 있고, 내가 만약 석양에 있다면, 나는 그 해가 아름답게 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다."

지금 하고픈 것은 연희단거리패에서 연극을 잘 만들며, 이곳이 연극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내가 내 연극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연희단거리패의 큰 식구가 되는 게 내가 하고픈 연극이다. 연희단거리패 속의 연극. 그러나 '오동식'이라는 배우, 그리고 그의 연극이 이곳 안에 작지만 개성 있게 존재했으면 좋겠다. '오동식표 연극'이 연희단거리패 안에도 하나 생기는 것이다. 너무 중앙은 싫다. 구석에 자리하고 싶다(웃음).
 

   
 


백석과 본인의 삶은 얼마나 닮아있냐는 질문에 정말 다르다고 말했던 그는 이야기 도중, 결국 많이 닮았음을 고백했다. 인터뷰 중에도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솔직하게 답하던 그를 보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형식적이고 딱딱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던 필자의 모습을 인지했다.

"(이윤택) 선생님이 장난으로 '백석우화'로 상 한 번 받으면 1년 일하고, 두 번 받으면 2년을 일하라고 하셨는데, (상을 두 번 받게 돼서) 정말 2년 동안 자동계약이 맺어졌다(웃음)"라고 말하는 그는 올해도 여전히 연희단거리패 일원으로서의 활발한 활동 소식을 전했다. 특히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는 그가 자신 있게 연출한 작품이다. 벽을 뚫고 극장을 허무는 역동적인 코뿔소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오는 9월 즈음 게릴라극장의 소식에 귀 기울여 보자.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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