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이순신

   
 

[문화뉴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락영화였다. 그런데 그 오락성과 주인공의 고뇌의 무게감이 공존했다. 오락영화일 수 없었다. 무언가 시원하지도 통쾌하지도 못했던 것은 주인공이 지닌 고뇌의 무게를 영화에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이순신의 고뇌를 선택한 김한민 감독

내가 기억하는 김한민 감독의 영화는 반전과 철학을 담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극락도 살인사건, 핸드폰, 최종병기 활까지 그랬다. 보고 나면 통쾌한 마음 약간, 찜찜한 마음 약간이었다. 어느 시대를 구사하건 어느 공간을 구사하건 그의 영화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등장 인물들의 행동의 기반이 되는 가치관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행동의 명분을 알기 쉽게 보여주었다.

김한민 감독이 만들어 온 영화들의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이순신 장군은 감독에게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자신의 이권을 놓고 다투는 권력자들 간의 갈등에 희생된 삶이었고, 내부(임금)와 외부(일본)의 적들 간의 갈등으로 풍랑을 겪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랑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고뇌하던 인물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가 김한민 감독이 구현하고자 하는 영화와 매우 일치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스크린에서 구현되기에는 특히 상업 영화에서 구현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고뇌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의 고뇌를 대중들에게 관객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감독은 많은 장치를 설치해 놓았지만, 사실 그러한 장치만으로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대중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난중일기를 읽어보고, 칼의 노래(김훈 저)를 읽어보아도 이순신의 고뇌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무겁다는 것만 느껴질 뿐 사실 이순신의 고뇌의 무게를 명확하게 알아내기가 어렵다.

▶ 이순신의 고뇌를 이해시키기 위한 장치들, 그리고 영화적 허구

영화에서는 아들 이회를 등장시켜 이순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아마도 이순신이 스스로에게 했던 의심과 질문들을 스크린에 구현해내기 위해서였으리라. 이순신이 혼자 마음속에서 했던 고민들을 대중들에게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이회가 필요했다. 이순신의 나래이션만으로 이순신의 고뇌들을 설명하기에는 지루했을 것이고, 다른 군사들은 이순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만한 위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인 이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찌 12척의 배로 전쟁을 하려고 하는지, 이미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진 두려움을 어찌할 것인지…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무수히 많은 밤을 잠 못 들며 했던 고민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아들 이회와의 대화로 풀어낸 것이다.

이순신의 고뇌를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은 약간의 역사왜곡도 했다.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달아난 것도 맞고, 이순신을 건방진 태도로 대한 것도 맞지만, 이순신이 명량에서 싸울 수 있었던 12척의 배는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달아나면서 보존한 배였다. 그리고 배설은 이순신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자신의 한 몸만 피신했던 것이었다. 안위 역시 이순신에게 전쟁이 불가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이 모든 영화 속 장면들은 이순신이 당시에 처한 상황과 이순신을 힘들게 했던 고뇌들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고뇌들을 너무나 뻔한 장면들로 보여주어서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명량해전을 얼마나 극적으로 묘사를 하려고 이순신의 고뇌들을 이렇게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 본격적인 명량해전, 긴장감은 한 계단 오르기

명량의 긴장감은 계단오르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초반 이순신의 고뇌를 그린 후 명량해전이 시작하자 긴장감 한 계단을 오른 후 그 한 계단이 계속 이어졌다. 한 계단 더 올라가지 않을까, 혹은 경사진 비탈길처럼 긴장감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며 기대했던 나에게 명량해전은 그저 조금은 왜곡된 모습이었다. 전우들의 죽음, 백성들의 필사적인 노젓기, 중군 대장들의 외면, 왜적들의 거대한 규모 등등이 명량해전을 극적으로 만들기는 했다.

이순신의 필사의 노력,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나대용에게 던지는 '된다고 말해주게.' 등의 대사, 중군 대장들의 외면을 인정하는 이순신의 마음 등이 명량해전을 감동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칼의 노래를 읽은 나에게 명량해전은 극적인 요소를 위해 왜곡시킨 역사와 같았다.

실제로 명량해전은 이순신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었다.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묘사를 했어도 명량해전은 충분히 극적인 해전이다. 12척의 배로 300척의 왜군을 물리쳤다. 제 목숨을 도모하려고 지레 겁먹은 안위와 김응함을 초로기로 불러 이순신이 내뱉었던 말, 왜적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백성들의 어선들만으로도 명량해전은 충분히 감동적인 전쟁이다. 안위와 김응함에게 내 칼에 죽는 것보다는 적들을 베고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며 기회를 주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어선에서 싸우는 백성들의 모습이 실제 명량해전의 모습이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며 명량해전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이런 모습들이 충분히 감동적이었으며, 이순신의 고뇌가 해전에서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은 칼의 노래와는 다른 명량해전을 그려냈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영화적 허구 장치를 차용했어야 했을 것이다.

▶ 차라리 명량이 오락영화였으면 어땠을까?

영화 속 명량해전의 모습은 진정 극적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고뇌의 무게가 너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필자는 명량해전의 모습을 통쾌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오락영화였다면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명량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순신의 고뇌가 끝나지 않은 채 승리로 끝나는 명량해전은 무엇인가 통쾌하지 못했다. 최종병기 활은 모든 인물들의 철학과 행동에 명확한 명분이 담겨있었고, 그러면서도 오락영화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락영화로서의 내용이 어떤 한 인물의 고뇌의 무게로 짓눌리지 않았다.

그러나 명량의 경우 이순신의 고뇌의 무게가 영화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순신의 고뇌의 무게를 조금 덜 그려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혹은 이순신의 고뇌를 초반에 제대로 그려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또한, 구루지마의 침략의 명분도 더 구체화되어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본 역사서도 한번 찾아 읽어봤다면 구루지마라는 인물도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순신과 구루지마 모두 명량해전의 명분이 더욱 명확해지면서 긴장감의 극대화는 물론 영화의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감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이순신

감독의 성향상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매력적인 인물이었겠지만, 감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칼의 노래를 먼저 접한 필자가 명량에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의 고뇌의 무게에 함께 눌려 한동안은 책을 펼치는 것조차 힘들었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고뇌의 무게는 필자의 현실까지도 짓눌렀었다. 그래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또 그것을 공감할 수는 있는 것인지, 나는 왜 그 고뇌에 함께 짓눌리고 있는 것인지 한동안 책을 읽으며 방황했었다. 그런 고뇌가 영화에 어떻게 표현될지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마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역사가 못마땅하고, 극적으로 다가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명량으로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명량으로 명량해전의 극적인 감동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가 가득한 그렇지만 담담하게 그 고뇌들을 써내려 간 난중일기를 권한다. 그리고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원한다면 김훈의 칼의 노래를 권한다. 이순신의 고뇌가 너무 무거워 힘들지도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고뇌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에 부치는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순신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한민 감독 ⓒ 퍼스트룩 제공

영화 명량은 이순신을 더 가볍게 다루거나 혹은 더 깊게 다루었어야 했다. 오락영화인데, 너무 무거운 인물을 선택했다. 그래서 명량은 이순신을 부각시키는 데에도 오락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휘어잡는 데에도 큰 성공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통쾌함 약간, 찜찜함 약간이라는 감독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명량 이후의 감독의 행보에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글] 아띠에떠 해랑 artietor@mhns.co.kr

팝 칼럼 팀블로그 [제로]의 필자. 서울대에서 소비자정보유통을 연구하고 현재 '운동을 좋아하는 연기자 지망생의 여의도 입성기'를 새로이 쓰고 있다. 언제 또 다른 종목으로 여의도에 입성하게 될는지. 여전히 나의 미래가 궁금한 인간. 나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여자, 말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여자'.
* 아띠에터는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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