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무렵의 김명순.

[문화뉴스] 오늘은 5개 국어를 구사하면서 조선에 에드거 앨런 포, 보들레르를 소개한 근대 최초 여성 작가 김명순을 소개합니다.

 
김명순은 1896년 평양 지주의 첩 딸로 태어났습니다.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조롱을 받아야 했는데요. 똑똑하면 자신의 편견이 사라질까 봐 김명순은 1913년 일본 유학을 어렵게 떠납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학교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현대 용어로 '데이트 강간' 때문이었죠. 그러나 당시 언론은 김명순이 청년과 짝사랑하다 실연한 것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김명순은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편견을 지우러 간 유학 때문에, 자유분방하게 논 여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었죠. 그러나 김명순은 글쓰기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1917년 잡지 '청춘'에 이름을 올리며 여성 최초로 문단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후에도 김명순의 작품보단 사생활에 집착했습니다.
 
남성 문인들은 김명순을 탕녀로 낙인 찍었습니다. 1921년 잡지 '개벽'에선 김명순을 "피임법을 알려는 독신주의자,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이라는 비하를 했습니다. 조건과 재력 등의 제한이 없는 자유 연애를 역설한 김명순은 자유 연애를 통해야 여성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적 영역에서의 성의 해방과 여성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명순은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을 치다, 끝내 1951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망 30주기인 1981년에 이르러서야 시 60편, 소설 14편, 수필과 평론 7편이 김상배에 의해 정리됐고, 1990년 후반부터 김명순을 평가하고 조명하는 분위기가 등장했습니다.
 
김명순이 1924년 발표한 시인 '유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제 (중략),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망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내용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느낄 수 있는 시인데요. 남녀가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김명순.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지 않을까요?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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