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시대의 재현과 의미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오르되브르는 정식 식사에 앞서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입니다. '영읽남의 오르되브르'는 관람 전, 미리 영화에 대해 읽어보는 코너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고종황제(백윤식)의 늦둥이로 태어난 덕혜옹주(손예진). 변절한 친일파에게 대한제국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덕혜옹주는 골칫거리다. 민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 아래, 덕혜옹주는 강제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된다.
 
타국 땅에서 국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시들어가던 덕혜옹주. 그런 그녀 앞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장한(박해일)이 일본 장교가 되어 나타난다. 장한은 덕혜옹주에게 일본을 탈출할 계획인 영친왕 망명 작전에 대해 털어놓고, 덕혜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한 험난한 여정에 오른다. 역사가 잊은 덕혜옹주. 그녀의 귀환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멜로 우등생들의 만남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으로 90년대 후반 멜로 영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허진호 감독. 그 당시 그의 멜로 영화는 억지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차분하게 감정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감정은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심은하와 이영애는 그 시절 멜로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손예진 역시 멜로 영화로 이미지를 쌓았다. 그녀에겐 '연애소설'이 있었고, (여전히) 그녀의 대표작인 '내 머릿속의 지우개'로 사랑을 받았다. 멜로의 장인과 멜로 영화에서 가장 빛났던 두 사람이 만나는 건 필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과 손예진이 함께했던 작품은 '외출'이었고, 이 영화는 잊히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멜로 영화가 전성기였을 때, 손예진이 등장했다면, 꽤 근사한 정통 멜로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라면 먹고 갈래요'에 버금가는 대사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로 만난 허진호와 손예진이 보여줄 영화도 멜로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아픈 역사에 감정을 묻혀 아련하게 소환·재현했다. '덕혜옹주'가 국가로부터 이별하고, 그(국가)에게 돌아가는 처절한 과정과 재회의 순간은 허진호 감독의 멜로에서 보던 감정선을 연상케 한다. '덕혜옹주'를 통해 강요하지 않고, 절제된 감정이 공명하는 순간을 객석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덕혜옹주의 고향을 향한 순애보', 그리고 '그를 기억하고 되찾기 위한 한 남자의 순애보'는 이 영화에 멜로적 감성을 입힌다. 이 중심에 있는 장한(박해일)이 가상의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가 등진 덕혜옹주를 찾고자 한 원작 작가, 영화의 감독,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이들의 염원이 표출된 인물로 보인다.
 
   
 
손예진 최고의 한 해
'해적'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 전에도 다수의 상을 받았지만, 관객이자 손예진의 팬에겐 늘 개운치 못한 게 있었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여전히 그녀의 최고작이라는 것. 이는 그녀의 작품 선택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작년에 개봉한 '나쁜 놈은 죽는다'는 재능 기부를 넘어, 재능의 낭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연기력 논란이 좀처럼 없는 그녀는 그 연기력을 표현할 도화지를 잘 못 선택했던 것 같다. 물론, 이는 한국 영화 산업에서 여성 캐릭터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지난 10년간 급속하게 비대해졌지만, 속이 빈 영화계를 대변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녀가 올해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에서 보여준 연기는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장르가 얼마나 넓은지 알게 한다. '비밀은 없다'에서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복잡한 심리를 다층적으로 보여준 손예진의 연기는 날이 서 있으면서도,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불안함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독특한 분위기의 영화가 탄생했다.
 
이번 영화에서 손예진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 어머니를 향한 애정, 그리고 왕가의 혈통으로서 가지는 책임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다. 역사를 압축한 만큼 감정적 변화가 컸던 어려운 역할. 그녀는 역시나 잘 소화해냈다. 잊힌 '덕혜옹주'를 기억하고자 하는 영화에서 마지막 황녀의 얼굴을 손예진이 맡았다는 점이 정말 다행이다. 손예진에게 올해는 배우로서 변화의 꽃을 활짝 피울 시간이지 않을까.
 
   
 
잊힌 역사에 관하여
일제라는 시대를 중심에 두고 '암살'이 큰 흥행을 거뒀고, '아가씨'도 올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밀정', '군함도' 등이 이 시대를 계속 소환 예정이다. 이 시대물이 계속 소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한국 영화계가 시대극을 재현할 자본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내면엔 감독과 작가들이 그 시대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아픈 시대였지만 변화의 시대가 뿜어내는 독특한 양식은 '아가씨'의 독특한 저택처럼 프레임에 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만하다.
 
그리고 감독가 작가들이 그 시대 속 개인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 시대에서 지금의 모습을 봤거나, 어떤 관계성을 찾은 것일까. '덕혜옹주'는 개인의 비극을 역사적 비극으로 확장하고, 역사가 잊은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잊고 있던 시대의 아픔을 보여준다.
 
국가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을까. 정치, 사회, 역사를 관통하는 '덕혜옹주'에서 관객은 무엇을 볼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이 역사 속에 잠든 덕혜옹주의 자취를 뒤쫓을 때, '덕혜옹주'는 새롭게 상영될 것이다.
 

▲ 손예진 영화 '덕혜옹주' 언론 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시네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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