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드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문화뉴스] 김.태.훈 이라는 무수한 동명이인이 우리의 현세(現世)에서 공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늘 문화뉴스가 소개하는 김태훈은 공인을 뛰어넘은, 장인(匠人) 배우이자 교수인 김태훈(49)이다. 러시아 연기 유학 1세대인 그는 현장에서 지금 가장 잘 나가는 중년 배우이면서도, '에쭈드'(Etude·즉흥 상황극)연기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교수이자, 연극계의 큰 선배다.

김태훈이 융합예술대학원장으로 있는 세종대학교에서, 사진 속 느낌 역시 남다른 교수실에서 진행된 이번 인터뷰 문체는 최대한 현장감을 살렸다. 그래야만 김태훈의 수려한 언변과 깊이가 서려 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자들에게 최대한 잘 전달될 것 같기 때문이다. 길어도 꼭 스크롤 완주를 바라보는 이유다. 

   
 

요즘 근황, 작품하고 계시죠?
ㄴ '고곤의 선물'이라는 작품. 피터 쉐퍼 마지막 작품인데요. 천재극작가 이야기. 지금 주인공 에드워드 담슨 역할을 맡아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고곤의 선물'은 9월 18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렸다.)

배역에 대해서 설명
ㄴ 천재 극작가죠. 광기가 있고, 어느 여인을 만나 자신의 평생 배필로 생각하고 자신의 예술 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같이 그리스 티라로 떠나는데, 결국 사랑이야기보다 신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글로 써내고자 하는 예술가적 생각과 그걸 조력하거나 조언하거나. 또는 그 반대에 있어서는 아내 헬렌과의 갈등.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세상은 정의는 바로 세워져야 하고 불의를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최근에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들. 영국을 배경으로 스코틀랜드가 결국 독립을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스코틀랜드·아일랜드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독립적 이야기, 그들이 영국 본토에 와서 테러를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거는 소재로 활용한 것이고, 불의를 가진 모든 것들은 벌을 받아야 된다.

아내를 용서해야 한다. 복수가 최선은 아니다가 부딪히는데, 결국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극작가가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리스 티라 에게 해 앞바다에 화강암 절벽에서 뛰어내리죠. 그러면서 자기 신념을 지켜내는. 이 시대의 신념과 용서와 복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 우리 사회가 보여주지 못하니까. 그걸 용서해서 포옹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입니다.

문화뉴스가 뽑은 100인에 선정되셨는데 어떤 기분이 드세요? '최고의 예술가'라는 호칭에 대해.
ㄴ 아직 멀었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해온 길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고 예술가라는 이름을 단다는 것도 과분하지 않나. 어렸을 땐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예술가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높은 데 있는 사람이고, 음악이 됐든 미술이 됐든 연극이 됐든. 예술사나 연극사 책을 보면 거기에 나와 있는 이름들이 예술가가 아닌가.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직업군으로서의 예술가인지, 미학적 가치로서의 예술가인지. 어느 순간 우리 사회가 예술가를 하나의 직업군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식을 하면 좋은데 아직은 그러질 못하죠.. 제가 생각하는 의미로서의 예술가로 가는 길은 미학적 가치겠죠. 아직 사실은 가는 중입니다.

단지 문화뉴스가 연극부문에서 저에게 그런 상을 준다는 데에 대해서 영광스럽고요. 사실 제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세계 현대 연기의 근간인 스타니슬랍스키. 그가 활동했던 극장에서 1년에 한 번씩 자신의 연기 메소드를 교육적으로 혹은 현장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주는 연기부문 공로상을 제가 올해 수상하게 됐어요.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죠. 외형적으로는 연기 부문 공로상이다는 의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쉽게 이야기해서 '스타니슬랍스키 제자'임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자신의 학계에서 제자임을 인정받고 제자들의 명단 리스트에 제가 올라간다는 거거든요. 앞으로 제가 활동하는 모든 것들을, 물론 제가 인터넷에 등록하겠지만 그들은 그거를 역사로 남겨서 계속 후대에 남기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죠. 문화뉴스가 저를 연기부문에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연기자로 절 선정한 데에 대해서 저보다 더 훌륭하시고 저보다 더 많은 예술활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하기도 하지만, 역사는 산자의 것이라고 제가 오늘 역사가 돼서 제가 정말 말 그대로 최고의 예술가가 됐을 때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것 같아서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학교와 현장을 분주하게 오고 가시죠. 연극계에서 올해 하반기에 작품이 3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ㄴ 우리 때 연극영화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강의노트를 보면 강의 책 뒤편에 '뉴욕 1972' 이런 게 쓰여 있어요. 이게 뭐냐면 당신 스스로 70년대 초반에 유학했을 때 강의노트로 강의한다는 거거든요. 물론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제가 연기교육을 담당하지만, 연기교육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팩트는 변하죠. 문명이 변하고 의식주의 스타일이 변하기 때문에. 연기적 메소드 표현 방법은 변하고 있죠. 특히 매체가 발전되면서 필름의 시대와 디지털의 시대와 거기에 따른 인간의 사람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 연기가 어떻게 10년 전하고 같겠어요. 우리가 당연히 현장이 급변하고 있는데 학교 교육은 10, 20년 전 것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게 말이 안 되죠. 아이들이 나가서 써먹질 못하죠. 강의실은 현장처럼, 현장은 강의실처럼. 이 말은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면, 작품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관계로 어느 날 매너리즘에 빠지죠. 나태해지기도 하고. 연기를 해도 돈 때문에 하고. 게런티 액수나 생각나고. 창조에 대한 걸 잊어버린 거죠. 초심을 잊지 말자. 강의실에서 처음 배웠던 설렘. 무대에 서기 위해 암전 때의 설렘을 잊지 말자. 현장은 강의실처럼 강의실은 현장처럼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학생들한테도 현장에서 활용되는 이야기를 메소드를 아이들이 습득했으면 좋겠고…

축구로 예로 들면 네이마르나 메시도 부상이나 어떤 것으로 경기를 며칠 못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에 투입이 안 되는 이유는 경기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고 컨디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듯이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가진 배우라 할지라도 무대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감각을 잊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떤 수준밖에 안 되는 거죠. 정보를 내뱉는 거 외에는. 또한, 무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노력을 하고. 그걸 아이들에게 전달해주려고 하고. 그것을 다 떠나서 본질적으로 제가 작품을 계속해나가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은 첫 번째로는 불러주니까, 두 번째는 재밌으니까. 무대에 서 있는 그 순간 그 외의 모든 잡념을 잊어버리고 순간순간 내 세포 하나하나가 1초 2초 나 살아있구나. 그게 없으면 연극은 힘들죠. 투자하는 시간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아날로그 방식이니까 이게 영화처럼 프린트해서 몇천 장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수공업이고 배우가 다 실제로 움직여 줘야 하고. 그렇게 투자한 만큼 얻어내는 것도 외적 가치로 따지면 별로 없지만. 그게 내 세포를 살아있게 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가장 그 누구도 상상도 못 할 거에요. 객석에 사람이 앉아있고 암전이 됐어. 나는 무대에 서 있고. 안 보이는 거죠. 조명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설렘. 나의 대사 한마디, 액팅 하나에 관객들이 따라오는 그 느낌. 카메라 따라오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 없으니까. 그 기쁨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작품을 해나가는 거겠죠.

배우 김태훈, 교수 김태훈은 말한다면?
ㄴ 교수로서…한 3년 전에 어느 모 기관에서 저를 스카웃 해가려고 거기 법인 기획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만났어요. 여러 군데서 저를 스카웃 하고싶다. 지금 받는 연봉에서 2배는 드리겠다. 단순히 어떤 연봉이나 이런 문제를 떠나서, 제가 너무 궁금하고 신기해서 "저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렇게 물어봤어요. 왜냐면 저를 만난 그분의 전공이 이쪽이 아니었고, 그랬더니 그분이 법인처니까 기획처니까 저에 대해 스크린을 하고 사람들과 인터넷을 통해서. 그런데 이쪽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공통 키워드가 나오더래요. 그래서 뭡니까. 치열.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저는 썩 나쁘지 않았어요. 교수로서의 저를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마찬가지지만. 치열. 열정을 가지고 아주 최선을 다해서라는 의미도 갖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그 치열은 결국 완성도 또는 만족도거든요. 제가 A형이에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학생들한테도 결국 그 1%가 주연을 구분하듯이 연기에 있어서 연극으로 따지면 무대 전체 마감이죠. 정리에 있어서의. 그 1% 때문에 관객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연기적인 측면에서의 혼을 불어넣으려고 항상 노력을 했던 것 같고 그것이 평탄한,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배우로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나갔을 때 우리의 사회가 평탄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보통 생각하는 어떤 결혼을 하고 이런 삶이 아니기 때문에 늘 사회와 자신의 환경과 버티고 도는 대립각을 세워야 하기도 하고 지켜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필요한 치열함에 대해서 항상 강조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작년엔가, 가을에 생일인데 제자 한 친구가 그랬데요. 저는 그때 '벚꽃 동산'이라는 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니까 밤 11시. 강남에 모 가게에다가 자리를 마련해놓고 밤 6, 7시에 문자를 돌린 거에요. 졸업생들 이렇게 해서. 김태훈 선생 때문에 자기가 먹고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 모여.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애들이 모이는데 한명 두명 나중에는 거의 100명 가까이 모였어요. 그 중에는 배우도 있고 선생도 있고 비즈니스 기획사를 하는 애도 있고. 몸은 피곤했지만 내가 선생님으로서 최선을 다했구나에 대해서는. 굳이 그 새벽에 나타난 것 보면.

물론 무섭죠. 애들은 제가 무섭대요. 그런데 저는 연기를 해내 가는 그 순간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캄캄한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저 희미한 등불 하나를 보고 자신의 자아가 거기를 나아가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어쩔 줄 모르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같이 걸어가는 그 순간에 아이들이 두려워할 수도 있고, 지금도 어저께도 군대 갔다 온 친구, 여자의 경우 휴학을 2년 동안 했다가 복학했다고 인사 온 친구, 딱 말해서 걔 이름 기억 안 나기도 해요. 그런데 딱 1학년 말에 에쭈드를 뭐했는지 딱 기억이 나요. 너 뭐했잖아. 즉흥 상황극이라고 하는. 그 여자 친구 어떻게 됐어하면, 애들이 기겁을 해요. 어떻게 기억을 다 하시냐고. 가장 창조의 순간.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네가 자아를 찾아가는 그 길을 같이했기 때문에 다 기억이 나는 거죠.

 

 

 

배우로서는 왜 정말 왜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부른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한민국 최고 잘나가는 중년 배우.
ㄴ 싸니까. 싸요. (웃음) 생각보다 싸고 티켓파워가 있어요. 그래서 깜짝깜짝 놀라는 거죠. 연기도 곧 잘하고 지명도도 있고 싸고 하니까 부르는 거죠.

관객들이 배우 김태훈한테 바라는건 뭘까요?
ㄴ 사실은 연기적으로 이야기하면 저는 아직 나를 실험하는 중이에요. 무슨 얘기 나면 저는 굉장히 감성이 중심이 된 배우와 이성이 중심이 된 배우가 있다면 저는 굉장히 감성적인 배우에요. 감성적인 배우가 가지고 있는 장점. 굉장히 이모션에서 그것이 에너지로 폭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중심이 된 배우. 여기서 이성이라는 건 대본을 텍스트로 분석하고 이것이 아니라 연기를 수행해나가는 창조의 순간을 말하는 거죠. 일정 정도의 훈련과 교육과 경험을 거쳤는데 텍스트 분석이 안 되는 배우가 어딨겠어요. 연기를 수행해가는 순간에 감성이 차고 오르는걸 이성으로 얼마나 누르느냐 아니면 감성이 너무 없어서 메마른 이성만 보이느냐의 차인데 그 두 가지 차이만 보면, 저는 감성적인 배우입니다. 장점으로 따지면 굉장히 에너지가 폭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단점으로 이야기하면 굉장히 텐션 됐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연기학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끊임없이 연기가 되어왔던 부분이고. 초기에 유학 갔다 와서 작품 하면서 기본의 기질, 아이덴티티로 그런 부분들의 역할을 많이 했고 에너지틱한 역할을 많이 했고, 그것으로 일정부분 인정받기도 했고 근데 이것이 갖는 한계를 제 스스로 느꼈어요. 나 스스로 좀. 제가 공백기를 2년 정도 작품을 안 하다가 작품을 다시 할 때는 정 반대로. 그때 했던 작품들은 오히려. 그때 같이했던 그때의 관객들은 저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굉장히 여리 여리 하고 굉장히 이성적이고 굉장히 릴렉스하고. 그래서 12월 달에 하는 작품도, '연극열전'이라고 기억을 하는데 '연극열전'에서는 오히려 김태훈이라는 배우에 대해서 그런 걸 더 알고 있는 거죠. 재밌었어요. 한때 나의 어떤 다른 면을 개발시켜서 소위 팔아먹을 수가 있구나. 그것에 또 많이 감동해주고. 그리고 그것이 주는 장점과 재미는 저의 본질은 변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제가 릴렉스. 굉장히 이성적으로 연기 패턴을 그렇게 해도 본질적인 이모션한 부분, 에너지틱한 부분은 요소요소에 튀어나온다는 거죠. 정반대에 부딪히는 사람이랑 다른 거죠. 그러니까 굉장히 릴렉스하고 굉장히 편한데 어떤 순간에 훅 나오는 게 강하게 느껴지니까 그게 또 어떤 매력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 많은 관객이 인정하게 되고 그래서 또 많이 다음 작품에 저를 불러주고 그랬는데 최근에 '에쿠우스'나 '고곤의 선물'은 다시 옛날 작품이 바라는 방향도 그러하고. 연출의 방향도 그러하고 굉장히 텐션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정갈하고 릴렉스 되어 있지 않은. 긴장감을 주는. 이런 연기패턴을 요구하고 있어서, 다시금 원래 했던 것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숨을 쉬어야 하니까. 제 개인적으로 실험을 하고 있어요. 양쪽을 이렇게 수용하고 표현하면 굉장히 좋은 배우가 되겠지만 아직은 그걸 다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이번에 '고곤의 선물'은 광기의 화신이란 말이요. 상대적으로 12월에 하는 작품은 완전히 릴렉스와 여림과 인생을 허망하게 살아가는 한 50대 남자의 허무함. 이런 거란 말이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소화해낼 것이냐. 제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해나가야 할 부분이고. 이 나름의 결론이 얻어지면 또 다른 모습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러시아 1세대라는 말씀을 들으시는데 유학 말씀을 해주세요. 언제 가셨죠? 러시아로 가게 된 계기. 그 안에서의 생활.
ㄴ 바야흐로 때는 1993년도. 1월 8일. 제가 다니던 대학교하고 88년 러시아하고 수교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인제 러시아가 아무래도 공연 예술 쪽이 세계적으로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수교 이후에 러시아하고 교류를 하자 그러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를 한 게 연극대학과 자매결연을 하는 거였어요. 러시아의 석사과정을 했던 쉐프킨이라는 대학하고 제가 다녔던 동국대하고 연극과가 자매결연을 한 거죠. 첫 번째 프로그램이 교환학생. 그 프로그램으로 개인적으로는 집안형편이나 유학을 생각할 시기는 못됐었는데 그때 당시 지도 교수님 추천에 의해서 하면 좋겠다. 제가 그때 고민이 연기가 뭐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이렇게 "공연 잘해야지" 내려와서 오늘 잘했어 오면 연출이나 선생님들이 "그렇게 하려면 때려치우라"고.

어느 날은 몸도 피곤하고 전날 술 먹어서 몸도 아프고 해서 "대충 공연하고 빨리 가서 쉬자" 이래서 집중하지 못하고 공연하고 내려오면 "너무 좋았다고". '

"어쩌라는거야 나보고 도대체". 창조적 영감. 창조적 인스프레이션이라는거. 배우의 의지로 스스로 컨트롤 되는게 아닌 것이냐. 이런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스타니슬랍스키라는 사람을 제3국을 통해서 일본을 통해서든, 미국을 통해서든 접하게 됐던 상황에서 그 사람에 대한 연기 메소드를 공부해보자.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됐죠. 그때 당시에 여러 친구가 갔어요.

정흥로 이항나 박신양 김윤석 염우영 선배님.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만 해도 4-5명이 같이 가게 됐는데 현실은 매우 괴로웠죠. 아시다시피 구소련 사회주의 시절의 시스템과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의 사회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사회적 시스템이 달라서 그것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고. 물론 공부하는 건 매우 좋았어요. 그런데 제반여건이 너무 힘들었던 상황을 어렵게. 회의도 많았어요. 오히려 사회적 시스템이 달라서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물건을 산다 그러면 내가 돈을 내고 사면되는데. 지금은 거기도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물건을 보고 가격을 알고 '까사'라 그러죠. 돈 내는 데에서 표를 내고. 다시. 이게 얼마나 번거로운. 그런 어떤 사회적 시스템, 또는 생필품이 부족한 것. 또는 그들이 처음 개방하고 나서 이후에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들은 자기네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경계심이 힘들었지만 공부 자체는 너무 좋았고, 또 그들이 문화를 대하는. 문맹이라는 게 그 나라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읽지 못하는 비율이 얼마냐 되느냐가 문맹인데, 사회주의적 정책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문맹이 제로에 가까운 거죠. 의무교육을 고등학교 때까지 했었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중학교까진 가가 의무교육이죠. 근데 그래서 그랬는지 문화적 수준이 높으니까 아파트 렌트를 하려고 가면 외국인이고 러시아말도 잘못하고 하니까 굉장히 할머니가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봐요. 어디서 왔니 왜 왔니 돈은 얼마를 낼 거니 방을 빌려 주려도 청소는 어떻게 할 거니. 중국 친구들이 와서 지저분하게 했던 선례들이 많다는 거에요. 방에 집에 들이지도 않아요. 현관에서 얘기를 해요.

그러다가

"너네 나라에서 왜 왔니"→"연극 공부를 하러 왔다"

"누굴 좋아하냐" → "나는 체홉을 좋아하고, 스타니슬랍스키를 존경한다"

그러면 그 할머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니가 체홉을 알아? 감히 니가 어떻게 알아?" 이럽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와서 방을 렌트하는데 예를 들어 '나도 이순신알아 세종대왕 알아' 하면 얼마나 기특하겠어요. 그 외국인이. 그 할머니가 현관에서 응접실로 대접하면서 그러는 거죠.

"우리가 체홉을 얘기하는데 이렇게 불경스럽게 현관해서 하면 안된다. 들어와라"

문화에 대한 인식이 다른 거죠. 그런 문화에 대한, 예술에 대한 경외심. 그런 것들이 너무 행복했고, 그게 학업으로 이어졌을 때는 더 행복했고.

이렇게 해서 실기 석사를 마쳤는데, 그런데 당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다 돌아갔어요. 저는 그때 당시에 '이제야 몸으로 조금 알긴 하겠는데…대체 연기라는 게 어떤 거고 어떻게 하는 거고 알긴 알겠는데…' 이걸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정리를 하자. 산발적으로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좀 정리를 해보자 싶어서 박사과정을 기시스라는 대학으로 들어가서 다시 2년 반 3년 동안 공부를 하게 돼서 학위까지 마치고 돌아오게 된 케이스죠.

지금 연기하시는 데에 있어서 그 때 당시에 유학 때 배웠었던 연기적 메소드가 어떤 영향을 줬는지 궁금하고요. 그게 실질적으로 무대에서 육화되고 체화돼서 표현이 된다면 어떤 면이 그럴까요?
ㄴ 가장 큰 건 제가 스타니슬랍스키를 얘기할 때 국내에서 전문가라고 평가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재작년인가 스타니슬랍스키 탄생 150주년인가 국내 세미나를 오는데 저를 온갖 학회에서 다 부르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스타니슬랍스키라는 사람의 메소드의 마지막 작품이 결국은 또 '메소드 오브 피지컬 액션'이라고. 신체적 행동법. 저는 행위법이라고 얘기하는데 광역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몸이 먼저 얘기한다는 거죠. 어떤 내면이 있든 간에. 신체 오가니즘이 분명히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의지를 먼저 자세 제스처 호흡 눈의 깜빡임까지 먼저 말을 하는. 그것의 신호가 본질적으로 그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고 그게 제 몸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작품에 있어서 몸이 먼저 반응을 하고, 반응을 한다는 게 텍스트를 접해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연상을 해서 그것을 내 몸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텍스트를 접하는 순간 내 몸이 그것에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하는 거죠. 그것은 상상력과도 관련이 있는 거고요. 상상력은 머릿속의 상상력이 몸으로 먼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몸의 상상력으로 먼저 표현되고, 거꾸로 내 머릿속에 '아 내 몸이 무엇을 그리고 있지?'라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제일 많이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이 들고요. 발성적으로 많은 사람이 제가 소리통이 좋고 타고난 게 좋다고 하지만 정말 오해이시고, 고등학교 때까지 어디 응원을 가면 30분을 소리를 못 질렀어요. 목이 쉬어가 지고. 원래가 감기가 제일 먼저 기관지에 오고. 근데 러시아에서 호흡 발성법을 3년간 훈련을 하고 그걸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웬만한 경우에 소리에 대해 걱정을 갖고 공연을 하진 않죠. 다만, 스스로 한계는 어디인가. 한번 입 열면 2page씩 대사를 해야 하는 공연을 하고 저녁에 술을 한참 먹고 다음날 공연이 가능한가를 시험해봄으로 인해서 가끔 목이 잠기기도 하고 그러는데, 호흡발성법에 대해서 내 몸으로 익혀냈다는 게 배우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죠.

 

 

 

이쯤 오면 '에쭈드'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사실 교수님의 키워드가 '에쭈드'가 있는 것 아시죠? '에쭈드'는 연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연기 훈련의 방법으로 전설처럼 남아있는.
ㄴ 먼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제가 15년 전에 국내 여러 연기관련 세미나나 이런 데서 '에쭈두' 이렇게 이게 뭐냐. 저를 외계인 취급을 했었어요. 근데 한 2, 3년 전에 교원 임용고시 연극영화. 교원임용고시에서 문제를 내는 건 아주 많은 사람이 검증을 받잖아요. 혹시 그 문제가 오답처리가 되었을 때 수능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에쭈드'라는 단어가 등장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 [단독] 명품배우 김태훈이 말하는, "이것이 에쭈드다"

지금 배우가 되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후학들을 가르치시고 현장에서 보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선배, 선생으로서, 배우로서.
ㄴ 인간은 누구에게나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 스스로 잘 선택해보면 잘하는 것을 선택하면 잘하니까 타인에게 인정도 받고 그것에 따른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겠죠. 좋아하는 걸 선택하면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서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죠. 단, 인생을 살면서 후회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잘하기도 하는데 좋아하기도 해. 좋아하기도 하는데 잘하기도 해. 금상첨화죠. 그럴 일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후회 없는 삶을 산다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고민했으면 좋겠고, 그 좋아하는 것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특히 이쪽 분야를. 선택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고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버티고 기다릴 줄 알면 좋겠다. 우리 학생들한테도 그런 얘길 합니다. 예를 들어 바나나우유를 하나 먹고 싶다. 그러면 집에서 그냥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나와서 슬리퍼 끌고 걸어서 3분, 5분이면 가는 슈퍼마켓 가서 아줌마한테 바나나 우유 하나 주세요 하면 바나나 우유 줍니다. 하지만, 조금은 귀찮지만 대형마트에 가보라고 해요. 물론 대형마트는 바로 집 앞에 있진 못하죠. 바로 집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 사람이 오는 데니까 진짜 세수도 안하고 머리 개판으로 가기가 그러니까 그래도 모자라도 쓰고 슬리퍼 깨끗이 신고. 거기에 가기 위한 수고를 하는 거죠. 노력을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 버스를 탈 수도 있겠고 지하철을 탈 수도 있겠죠. 그래서 대형마트에 가면 식품코너가 지하에 있잖아요. 정말 바나나우유 종류만 20가지가 있죠. 무과당. 설탕 몇%. 가격도 10,20,100원 차이. 그 20여 가지 바나나 우유 중에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컨디션에 맞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격 취향에 맞는.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 앞의 바나나우유를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투자하고 기다렸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눈곱도 떼고 머리도 감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 그러면 더 많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우물론이라고, 옛날에 마을에서 물이 먹고 싶으니까 땅을 파는 거죠. 한 2m파니까 샘물이 졸졸졸 흐르는 거에요. 그 물을 먹고 옆 사람 퍼주고 금방 마르는 거죠. 샘물이 보일 때 조금 더 참고 10m더 파 내려가면 그 다음에는 얼마든지 1년 365일 퍼마셔도 마르지 않을 수맥을 만나는데 사람이 그걸 못 참고 특히 우리의 길은 어떤 메소드. 어떤 역할 어떤 작품을 떠나서 배우로서의 삶을 생각한다면 기업도 마찬가지고 동네에서 자그맣게 치킨집을 하는 분도 마찬가지고 그것이 1년, 2년으로 보면 이번 달 매출 잘돼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을 백년대계로 보면. 내가 치킨집 5년 만하고 집어치고 다음 걸 하겠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치킨에 대한 장인정신이 없다는 거죠. 연기도 마찬가지로 1년, 2년 해서 내가 이거 해서 떠서 돈 벌어서 저 어디 대성리 어디에 순대국밥, 레스토랑 내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내가 장인정신을 갖고 연기를 평생 할 때 어떻게 늘 좋기만 하고 늘 잘되기만 하겠어요. 인기가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고 사이클을 그리는 거겠죠. 내가 평생 50, 30년 연기를 한다면 장인정신을 가지고 중요한 건 이제 그게 아닌 거죠. 그래서 저는 배우로서의 삶을 생각할 때 연세를 드시면서도 무대에 서시는 분들. 이순재 선생님이나 신구 선생님이나. 돈의 값어치로 따지면 연극 못할 거에요. 그러나 그 열정과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을 그려낼 수 있는 게 아름다운 거죠. 그래서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했으면 좋겠다. 무조건 버틴다고 때가 오는 게 아니고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런 얘길 하고 싶네요.

 

 

 

예술가로서 교수로서 주어진 자리에서 쭉 나아가실 텐데 앞으로의 목표, 인생관, 신조, 향후 계획?
ㄴ 없어요. 거창하게 꿈이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사실은 없어요. 사실은 옛날에는 어떤 작품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작품 다음에 무엇이 올 거냐를 더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에 당연히 그건 인정이죠. 그 인정이 경제적 가치나 나의 다음 작품에 큰 도움이 되길 바란 것 같아요. 결과에 대한 두려움, 걱정을 가졌단 얘긴데. 사실 지금은 어떤 작품을 누구랑 하느냐가 중요해요. 작품의 결과를 신경 안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거 때문에 뭔가가 바뀌지는 않아요. 특히 연극을 하기 때문에 더 그럴 것 같아요. 어차피 한 작품으로 천만을 하는 배우가 될 것도 아니고. 억 단위의 개런티를 받을 것도 아니고. 이 작품이 나에게 무엇으로 남을 것이냐. 같이 가는 동료, 어떤 메시지, 의미가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나씩 쌓아가다 보니까 그것이 이후 나의 배우로서의 예술가로서의 뭘 주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엄청나게 뭐. 옛날에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 연극사를 정리하면 김태훈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뭐. 예술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아이들에게 떳떳했으면 좋겠고 그 떳떳함이 아이들에게 전달돼서 그들이 또 관객들이나 본인들이 가르칠 후학들에게 떳떳했으면 좋겠고. 그런 것들이 가장 지금의 행복이고 기쁜 일이라 생각해요. 특별한 건 모르겠어요.

 

 

 

문화뉴스 독자들에게 덕담 부탁드립니다.
ㄴ 문화가 있는 삶. 대한민국 사회 여러 곳에서 각각의 의견과 신념들이 혼재하고 그것이 어찌 보면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고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는 각기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그것이 한 패러다임을 이루어서 다음 세대와 만나는 경계의 시점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이어주는 가장 큰 것은 문화입니다. 문화가 있을 때 각기 다른 의견과 색깔은 하나의 하모니를 이룰 것입니다. 문화의 중심에 문화뉴스가 있습니다. 이제 창간한 지 1년이, 1살돌 채 안됐지만, 아이들이 돌 때 돌잡이를 하죠. 많은 아이가 연필을 잡기도 하고 돈을 잡기도 하고 요새는 마이크를 잡기도 한답니다. 문화뉴스가 돌이 되는 시점에서 공연, 연극을 더 잡을 수 있는 그런 매체가 돼주시길 바라고 여러 독자분 또한 문화뉴스를 사랑하고 문화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함께 어우러지고 자신의 여유롭고 낭만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김윤지 기자 kyoonji@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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