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에 '어깨와 모든 것'을 바친 남자, 감독으로 산다는 것은?

▲ 상원고 사령탑 시절의 박영진 감독. 2008년 감독 부임 이후 전국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지난해를 끝으로 모교를 떠났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내일의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야구돌(야구+아이돌)'들을 만날 때면, 늘 곁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는 자신 아들들의 영원한 후원자, 학부모님들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야구를 하는 것에 찬성을 했건, 반대를 했던 간에 일단 아들이 야구를 시작했으면 물심 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과 같이 있는 '절대시간'만 놓고 보면 부모님들보다 더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한 학교를 이끄는 사령탑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프로가 아닌 학생야구에서는 사령탑의 작전 하나에 따라 선취점과 승패가 가름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전을 정확히 시행하기 위해서 학생 선수들을 조련하는 것 또한 감독의 몫이다. 그래서 아마야구에 정통한 이들은 "고교야구에서는 감독의 순간 판단 능력 하나가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라며 감독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고교/대학야구 경기를 매일 관전하는 프로야구 스카우트 팀의 의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관계자들이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중, 고교 및 대학 야구 감독들의 임기를 최소 5년 이상 보장해 줘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왕이면 정규 교사들과 동일한 대우를 해 주고, 성적이 나지 않더라도 끝까지 선임한 감독을 믿어줘야 한다. 물론, 도덕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사령탑에 대해서는 '적법한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방법으로 정리에 들어가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야구부 감독들도 '교사'와 동일한 자격을 주어야 한다. 실제로 장충고 야구부는 전임 유영준 감독(현 NC 다이노스 스카우트 팀장) 재직 시절, 체육 교사직을 병행하도록 도왔으며, 경상중 차정환 감독 역시 모교 대구고 코치 시절에 체육 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모교에 모든 것을 바친 사나이,
선수 박영진의 '순수했던 현역 시절 이야기'

그런 점에 있어서 대구 상원고등학교 역시 이러한 원칙을 비교적 잘 지킨 학교에 속했다. 2~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사령탑을 역임한 사례도 있었지만, 이는 모교 감독직 수행 이후 프로의 부름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지난 12월을 끝으로 모교 사령탑에서 물러난 박영진 감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직서를 제출, 많은 이들이 적지 않이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 감독 부임 이후 몇 차례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전국체전과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대회에서 굵직한 성적을 내며 모교의 호성적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룡기 선수권 대회에서는 선수로서 1977년 대회 우승(우수투수상, 투수 3관왕) 이후 감독으로서도 2011년, 2015년에 우승을 차지하는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상원고는 전신인 대구상고 시절을 포함하여 청룡기에서 6번 우승했는데, 그 여섯 번의 우승 중 무려 세 번이나 박 감독이 기여했다. 이 또한 전국 무대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었다. 이러한 박 감독은 왜 스스로 모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어이구, 김 선생! 어서 오시게! 이제 뭐 다 끝난 일인데, 뭐 더 들을 게 있어 왔노!"

필자는 박 감독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이에 지난 12월, 대구를 찾아 야인으로 돌아 간 박 감독을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박 감독은 모교를 떠나 온 것에 대해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뒤에 어떠한 이야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되도록 '오프 더 레코드'로 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대신, 본 고에서는 모교 사령탑에 재직하면서 박 감독이 느꼈던 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말이야, 감독님이 학생 모르게 유급시킬 수 있었다고. 그래서 졸업장 받으러 학교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이상한 모습으로 쳐다 보시더라고. '너 왜 왔노?' 그러기에 '졸업장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임마, 니 유급했다 아이가!' 이리 말씀하시는게 아니겠나? 알고 보니까 우리 사부님(정동진 前 삼성/태평양 감독)이 나를 유급시키셨더라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야, 사부님의 결정도 이해가 되긴 해. 그만큼 모교에 투수가 없었거든."

정말 그러했다. 팀의 에이스인 박영진이 졸업하고 나면, 대구상고에 남게 될 투수로는 양일환(전 삼성 2군 코치)과 권기홍(현 경주고 야구부장) 뿐이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정동진 감독은 박영진의 유급을 선택했다. 박영진이 포수 이만수와 최적의 조합을 이룬다면, 전국 대회 우승도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박영진은 팀의 5번 타자를 맡을 만큼, 방망이 실력 역시 좋았다.

▲ IB 스포츠 김태우 캐스터와 인터뷰에 임하는 박영진 감독. 사진ⓒ김현희 기자

"그리고 청룡기를 맞았는데, 그때는 정말 내 팔 떨어지는 줄 모르고 던졌어. 매 경기 던졌지 뭐. 가장 적게 던진 이닝이 1/3이닝이었으니까. 그래서 코피를 정말 많이 흘렸지. 그래서 주심이 솜을 한 뭉치 준비해서 코에서 피가 범벅이 될 때 즈음에 솜을 갈아주기도 했다고(웃음). 오죽하면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KBS 유수호 아나운서께서 나에게 별명을 지어줬어. '와지마 고이치(일본 복싱 영웅)'라고. 당시 와지마 선수가 여러 차례 다운을 당해도 우뚝 일어서서 다시 경기하곤 했는데, 그 모습과 내가 많이 닮았다고 하시더라. 그때 투구수를 따로 체크하지는 않았지만, 한 천 오백개 정도는 던지지 않았을까?"

모교를 위해, 그리고 전국 대회 우승을 위해 '투수 박영진'은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 실력도 뽐냈다. 동대문상고(청원고 전신)와의 8강전에서 역전 3점 홈런과 쐐기 솔로포를 동시에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준결승전에서 동산고에 1-2로 패하면서 패자 부활전과 최종 결승전을 치르는 등 무려 일곱 경기나 치러야 했지만, 박영진의 호투는 상대 타선의 득점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 결승전에서 동산고를 다시 만난 대구상고는 대회 MVP에 오른 이만수와 에이스 박영진을 앞세워 7-2로 승리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최다승, 최다이닝, 우수투수상 등 대회 3관왕에 오른 박영진의 주가도 뛸 수밖에 없었다. 현역 시절, 박영진은 그렇게 모교에 '팔'을 바치면서 명예만을 남긴 채 대학에 진학했다.

비록 청룡기 대회에서의 혹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박영진의 호투는 대학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약체였던 성균관대 야구부가 고려대/연세대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두 야구부가 박영진이 던지는 날이면 '2루'를 밟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달됐다. 이에 잠시 성균관대 야구부를 맡았던 김동엽 감독도 유독 박영진을 아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실업팀에도 이어졌다. 특히, 농협에서는 사원이 아닌, '대리' 대우를 약속하며 그의 스카우트에 적극적이었다. 바로 그 무렵, 프로야구 창단 논의가 이루어졌다. 대구를 연고로 한 삼성에서 박영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민했지. 농협에서 월급 받으면서 실업 야구 하면 정년이 보장되어 있었으니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러한 도중에 삼성의 제의를 받았지. 계약금으로 1,200만 원을 제시하더군. 당시 천만 원이면 지금 일억 원 이상이라고. 아파트 한 채도 살 수 있었지. 프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 이왕이면 고향 가서 잘 해 보자 라는 생각으로 프로에 입단했지. 그러면서 서울에 있던 재산도 다 처분했어. 그래야 미련을 갖지 않을 것 같아서였지."

이번에도 박영진의 선택은 '의리'였다. 사실 농협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야구 은퇴 이후에도 일반 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박영진이 프로와 실업야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 온 박영진은 1982년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교/대학무대에서 좋지 않았던 어깨 상태가 문제였다. 1984년까지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박영진은 결국 퇴단 후 현역으로 군 복무에 임했고, 1987년부터 다시 삼성으로 복귀하여 프런트 일을 시작했다. 2군 주무(매니저)를 시작으로 1군에서도 김성근 당시 삼성 감독과 주무로 호흡을 맞췄고, 홍보팀 역할도 하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영어 학원 사업을 하면서 잠시 야구와 멀어졌지만, 2001년에 모교 코치로 부임하면서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길고 긴 모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다시 이어진 것이다.

길었던 모교에서의 추억,
그리고 지켜 주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

박 감독의 별명은 '투수 조련사'다. 그만큼 박영진 감독의 제자들 중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제자들이 많았고, 향후에도 '박영진 사단'에 속했던 투수들이 맹활약할 가능성이 크다. 안지만(전 삼성)이 그러했고, 박화랑(전 삼성), 조무근(kt), 김성민(SK), 정용준(넥센) 그리고 전상현(KIA)이 박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이들이다. 특별히 아끼면서도 참으로 아픈 손가락들이다.

"그 중에서 (안)지만이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야. 내야수였던 지만이한테 내가 가르쳐 준 것은 슬라이더였거든. 그게 또 투수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 것 같아서 기뻤지. 그런데… 지금은 눈에 가장 밟히지.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내가 좀 더 신경 써 주지 못하고, 관리를 못 해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고.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 향후 5년간 이끌어 날 선수였는데, 스승이자 아버지로서 끝까지 관심 못 가진 부분이 너무 미안해. 안타까워."

사실 졸업한 선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됐다. 이미 프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프로에 진출한 선수가 스승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이 옳다. 이것이야말로 그라운드 밖에서도 '프로답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 감독은 졸업생들을 위한 지원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프로 재입단을 노리는 옛 제자들에게 모교 한 곳을 내어주는 것은 물론, 필요시에는 용돈도 쥐어 주면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모교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일했던 박화랑 코치도 이러한 박 감독의 배려 속에서 후배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 또한, 김성민이 일본 유학 중이었을 때에도 남몰래 일본을 방문, 저녁을 사 주면서 용돈까지 쥐어 주는 자상함을 선보이기도 했다. 많은 부침을 뒤로 하고 김성민이 1라운드로 SK 지명을 받은 것은 이렇게 스승의 남 모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재학생에 대한 지원 역시 화끈했다. 특히, 중학 시절부터 자신이 눈여겨 본 인재가 있다면, "저 놈은 어떻게든 내가 책임 지고 선수로 만들어 보이겠다."라고 공언을 하고, 이를 절대 어기지 않았다. 재활이 필요하면, 자비를 들여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모 선수는 "너는 반드시 나중에 에이스가 될 놈이니까 다른 생각 말고 잘 먹고, 재활 잘 하면 된다."라며 재활 비용 전체를 박 감독이 부담했다는 뒷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만큼 박 감독은 모교에 살고, 모교에 죽고, 선수에 살고 죽는 순수한 이였다. 프로에 입단한 제자들에게도 수시로 전화하여 용기를 북돋워 주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 박 감독의 모습이었다.

▲ 제70회 청룡기 선수권 우승 직후 감독상을 받은 박영진 감독. 사진ⓒ김현희 기자

그랬던 박 감독도 사실 올해 전력까지 세워 놓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눈여겨 본 '중학 특급' 선수들도 있었다. 해당 학부모 역시 "박 감독님이라면, 안심하고 상원고에 보낼 수 있다."라는 대답을 해 온 터였다. 박 감독이 구상한 신입생 스카우트에 기존 2학년 선수들이 3학년으로 진학하면, 다시 한 번 더 대권에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시점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박 감독 스스로 사임을 표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에 대해 박 감독은 '오프 더 레코드'로만 남겨 두기를 당부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1월 초, 박 감독은 모교를 떠나 현재 새로운 준비에 들어섰다.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지만, 사실 아쉬운 것이 많은 박 감독이다.

"사실 모교 감독 하면서 '형님, 그렇게 하시면(제자들 도우는 데에만 신경 쓰시면), 노후 준비 제대로 못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그런데 어쩌겠노. 다 내 새끼들이잖아. 그런 것 생각도 못했지. 그런데 말야 김 선생, 내가 안타까운 건 '내가 감독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틈도 없이 그만두게 됐다는 거야. 뭐가 더 아쉽겠노. 그게 제일 아쉽제.

그리고 요즘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좀 생겼는데, 집에 있다 보니까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더라고. 그 흔한 부부 동반 여행 한 번 못하다가 최근에야 집사람 데리고 갔는데, 그 모습 보니까 '왜 집사람 혼자 여행하게 놔 뒀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미안했어. 내가 감독직에만 매진할 수 있게 도와 준 가정에 대한 고마움도 몰랐던거지. 남의 자식 키우느라 정작 내 자식은 뒤로 한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네."

가족 이야기에 잠시 눈물을 흘리던 박 감독이었지만, 대화 말미에 아마 야구, 특히 초등학교 야구부에 대한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당부했다.

"초등학교 감독, 정말 힘들거든. 그런 사람들을 도와줘야 해. 그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가 있는 거라고. 초등학교 감독들이 잘 키워야 중학교, 고등학교로 학생들 보내는 것이니까, 우리(고교/대학) 도울 돈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초등학교 감독들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건 내가 KBO 육성 위원 자격으로도 많이 어필했던 부분이야. 김 선생,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것만은 꼭 써 줘!"

그렇게 박 감독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끝까지 '자신'보다는 '후배, 제자, 그리고 다른 아마야구 지도자 후배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진정 '야구에만 미친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베테랑에 대해 학교측에서는 왜 성급하게 사직 절차를 밟아야 했는지 스스로 되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역 시절에는 모교를 위해 어깨를 바쳤고, 은퇴 이후에는 자기 자신보다 후배이자 제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 모습을 너무 쉽게 간과해 버린 것은 아닐지 물어보고 싶다.

야구 감독으로 산다는 것, 박영진 감독의 사례를 통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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