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질문의 답은 선택지 사이 어딘가에 있다.

성능 좋고 무거운 카메라보다

성능이 안 좋은 가벼운 카메라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과 만끽의 경계선에 서 있다. 여행 중에는 항상 고민한다. 2020년 2월. 이탈리아에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야 하는지, 내 손으로 들고 있는 기계에 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국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기록하는 순간에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고, 여행을 음미하는 와중에도 기록에 소홀한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괴테대학교 벼룩시장에서 무료로 구한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있었다.
괴테대학교 벼룩시장에서 무료로 구한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있었다.

고민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카메라가 무거운데, 아이폰 카메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폰 카메라 성능이 점점 좋아지고 내가 가진 카메라의 성능과 별 차이가 없게 되자 그런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이것 참. 카메라를 팔아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언제나 나의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한 번뿐인 이 순간을 대충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질이 더 나은 나의 DSLR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화질이 더 나은 나의 DSLR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벼룩시장에서 무료로 물건을 구했다. 보라색의 겨울에 입으면 좋을 두께를 가지고 있는 패딩, 검은 가죽 재킷, 성냥 몇 개, 양초 몇 개를 가져왔다. 특별한 절차는 필요 없다. 괴테 대학교 캠퍼스 안 한 건물에 들어가서 물건을 보고, 가지고 나오면 된다. 둘러보다가 카메라를 발견했다. 작동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고장 난 카메라인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왔다. 배터리를 충전했다. 전원을 켰다. 소리가 났다. 셔터를 눌렀다. 사진이 찍혔다. 놀라웠다. 앞으로 카메라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가볍고 부담이 없다. 화질이 적당히 안 좋다. 감성이 있다. 작은 화면으로 보이는 풍경이 색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성능 좋고 무거운 카메라보다도 성능이 안 좋은 가벼운 카메라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다름슈타트에서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다름슈타트에서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다름슈타트(Darmstadt) 여행을 갔다. 친구들과 함께였다. 역시나 카메라는 문제가 있었다. 배터리가 빠르게 닳는다는 것. 셔터를 몇 번 누르지 않았는데 픽- 하고 꺼져버렸다. 다시 배터리를 끼우고 전원을 켜면 몇 분간은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풍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있다. 소중한 사진만을 담으려 노력하게 된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된다. 11월 중순이면 곳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된다. 11월 중순이면 곳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발견할 수 있다.

질문에는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질문의 답은 선택지 사이 어딘가에 있다. 우연히 발견한 카메라는 나의 기존 DSLR보다 가벼웠다. 더 작았다. 부담이 없었다. 내 고민에 대한 해답은 기록과 만끽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현재에 집중하면서 부담 없는 기록을 하는 것.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기록을 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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