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람 감독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A Table for Two)’의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라이카시네마, 김보람 감독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A Table for Two)’의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영화는 섭식장애, 모녀관계, 한국의 사회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는 박채영 분의 섭식장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섭식장애 관련) 전문가도 만나고 열 다섯 분의 경험자를 만나 공부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거기에 모두 가족관계, 특히 모녀관계가 있었다.

의학적 분류로는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으로, 스스로 먹는 것을 거부하는 증상이다. 체중이 급격이 감소하고 심한 경우 건강에 심각한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 대인관계 장애,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아 지속적 관심이 치료에 중요하다. 스트레스, 가족 간 불화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입원치료, 개인 정신 치료, 가족 치료, 행동 치료 등의 복합적인 치료가 진행된다.

 

이 작품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날 GV에는 김보람 감독과 더불어 영화에 출연한 박상옥, 박채영, 정지혜 영화평론가가 참여했다. 다음은 상영 후 관객과의 일문일답.

 

29일 서울 서대문구 라이카시네마, 김보람 감독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A Table for Two)’의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라이카시네마, 김보람 감독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A Table for Two)’의 관객과의 대화(GV)가 열렸다.

 

Q.이 영화는 어찌보면 멜로드라마다. 이 멜로드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채영) “직접 대면해서는 보이지 않는 엄마의 눈빛이 화면을 통해 보여진 것 같다. 많은 딸들이 엄마의 눈빛을 통해 미안함, 죄책감, 부끄러움을 느끼고, ‘진짜 사랑하는구나’와 같은 애틋함은 잘 못 느끼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했으면 좋겠다.”

 

(박상옥)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고 들었던 생각이 ‘너무 일찍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닌가’였다. 너무 일찌감치 사회과학, 이데올로기로 부정하면서 해석할 수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곤욕을 치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다. 평생 한번 작은 교회에 새벽 기도를 갔다. 너무 시끄러워서 10분만에 나왔다. 웃긴 건 다음날에 소문이 퍼져서 박상옥 선생님이 교회에 와서 회개를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딸이) 제일 어려운 사랑의 대상이었고, 너무 혹독한 스승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것 같다.”

 

(김보람)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나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고, 어떻게 저렇게 사랑하는 법을 모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정우의 양이라는 노래의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보이겠어요’라는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Q.다큐멘터리 제작에서 어려운 것은 ‘대상 인물과 어느정도까지 거리로 관계를 가질 것인가’이다. 이 고민을 어떻게 했는지?

(김보람) “카메라의 거리감에 대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창피했다. 어디까지 가까이 다가가야할지 잘 모르고, 현장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되어있고, 이 사람들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고, 저절로 거리감을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중하는 만큼 거리를 지키되 다가가고 싶은 마음 그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있었던 것 같다. 겁을 먹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갔다가 불편해하거나 밀쳐내지거나 이럴까봐. 나중에 아이폰으로 찍은 그때쯤 가서는 내가 이번만큼은 ‘찍어도 될까요?’ 이걸 안 여쭤보고 카메라를 들어보겠다라는 그 지점까지 간 것. 그 전까지는 망설임, 두려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나는 그런 것들이 거리감을 만든 거지. 저희가 거리감을 계산해서 촬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박채영) “시간이 지날 수록 감독님과 친해졌다. 초반보다 나중으로 갈 수록 카메라가 불편해졌다. 카메라는 제 3의 눈 같은 느낌인데, 돈독한 시간에 카메라가 끼어드는게 섭섭해진 것. 감독님도 저랑 엄마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어려워한 만큼 저도 감독님이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냥 촬영오신 감독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이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하고 어떻게 풀어야하나 매순간 긴장되고, 어긋나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들. 촬영을 그만하고 싶다고 제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그 말을 하기까지. 그 이후에 저희가 만난 중요한 이슈가 사라진 것. 촬영은 끝났지만, 이 사람의 인맥의 일부가 계속 되고 싶다면, 이걸 어떻게 끌고 가야하지? 라는 고민들 계속하면서 지금까지 왔던 것 같다.”

 

Q.친구가 되고 싶으셨던 건가?

(박채영) ”그렇다. 많은 이야기도 털어놨고. 감독님이 저희 삶에 대해서 일부 책임감도 느끼시고, 어떻게하면 그 짐을 덜어줄 수 있을까. 내가 곁에 있는게 부담은 아닌가하는 고민이 있었다.”

 

(박상옥) “촬영 감독님과 감독님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주에 왔던 거구나 라는 것을 GV하면서 알게 됐다. 디테일한, 원대한 계획을 하고 오신 줄 알았다. 인터뷰를 허락한 이후 부담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감독님이 저에게 딱 한번 무언가를 시켰다. 저희 딸이 호주로 갔는데, 편지를 피아노 위에 놓고 갔는데 한달 후에 피아노를 위를 보다가 편지를 보게 됐다. 그거를 발견하는 장면을 찍자고 요구하셨다. 그 정도 그럴 수 있겠다. 굉장한 계획 속에서 저를 만난거라고 생각했고, 거리도 계산된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야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딸과 저의 거리는 다행히 15살 이후에 아이가 집을 나가주는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주를 자주 봤었는데, 딸이 안 아팠으면 엄마가 죽는 일이 생겼을거다 라는 사주가 나왔다. 물리적 거리가 중요하다. 학생들에게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부모의 품에서 나오라고 권유한다.”

 

Q. 영화에서 박채영 분의 사과에 대한 태도가 바뀐 계기에 대해 알고 싶다. 사랑하는 딸이 해외에 간다고 하면 싫었을 것 같은데 박상옥 분의 반응의 이유가 있는지?

 

(박채영)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저는 원하신다면 (부모에게) 사과를 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다 거쳐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사과도 받아보고, 사과를 받았을 때 위로받는 마음이 있고, 위로되지 않는 마음이 있다. 또 그 마음을 위로할 방법을 찾기도 했다. 예전에 상담 선생님이 중년에 상담 받으러 온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죽은 부모에 대한 분노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묘자리에 가서라도 화내고 오라고 한다고 했다. 사과 받는다고 변하는게 없다고 단념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크다. 사과 받아야한다. 나를 위해서. 어머니도 미안한 마음이 안에 있을 거고, 그 계기를 자식들이 만들어주는 것도 자식들의 큰 업보인 것 같다. 부모들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못한 말들을 꺼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랜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과정 중에 있다. 어제도 싸웠다. 아침에 왔다는 소리에 이미 기분이 가라앉아있었다. 밥을 먹으러 갔는데 첫술뜨고 울기 시작해서 출근한다고 나왔다. 출근했는데 너무 어지럽고 난리가 났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그러고도 새벽에 (엄마와) 부둥켜안고 잔다. 아침에는 밥먹으러가고. 그냥 그런 것 같다.”

 

(박상옥) “(딸이) 호주 간다고 했을 때 엄청 좋았다. 출처는 모르겠다. 자녀가 14살 때쯤 죽어주는 부모가 아이에게는 가장 좋은 부모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위험한 것에 대한 인지, 능력, 물리적 인지 능력 그런것들이 갖춰졌을 때, 순전히 자신의 판단과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본인에게 좋은 인생이다. 저는 뒤늦게 15살때까지 제가 돌보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고스란히 결과를 병으로 감당하게 되면서 아이에 대한 죄책감 이런 것들이 있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간 거기 때문에, 안전도,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딱하나 죽는 일만 안 일어나면 우리 딸이 나머지 인생에 대해서는 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Q.공동체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감정이 뒤섞인 생활을 하셨을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바라보고 이 시간이 어떻게 잘 지나갔는지?

 

(박상옥) “잘 못지나갔으니까 애가 좀 아프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기숙사였고, 저희 딸이 언니들 속에서 그렇게 산 건데. 저는 그냥 기숙사에 사는 아이들이 제 아이를 돌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딱 하나 고민했던 것, 학생이 저에게 ‘술, 담배, 섹스, 보다 더 재밌는게 있으면 나한테 내놔봐’라고 얘기할 정도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이 점에 대해 남들이 걱정했다. ‘애가 거기서 뭘 배우겠냐’ 이런 걱정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 없었다. 이 아이들이 제 아이를 돌볼 것이다. 나중에 보니까 아니었구나, 엄마로서의 돌봄이 필요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채영이가 아빠에게 양육비를 요구해야하나 마나’가 기숙사 전체회의에서 안건이었다. 그 중에서 부모가 이혼해서 양육비를 받는 아이들도, 안받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분개하면서 양육비를 요청해야한다라고 다수결로 결정하기도 했다. ‘동성애일 경우 같은 방 배정 해야하는가’라는 주제도 토론을 통해 배정해야한다고 결정하기도 했다. 아이가 이 분위기에서 자라는 것에 대한 걱정 없었음. 결론적으로 저의 무지였던 것 같다.”

 

(박채영)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기숙사에서 살았다. 갈 수록 나이 격차가 줄어든다. 조금씩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왜 채영이가 먼저 샤워실을 써야하나. 왜 배려해야하나. 차이가 많을 때는 무조건 이뻤다. 엄마는 몰래 술 마시러 나가고 엄마는 전화를 꺼놨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그 기숙사 회의때 놀랍게도 항상 저는 한 켠에 있었다. 구성원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심심하면 아무 언니 방에가서 전기포트에 라면 끓여먹고 그런걸 같이 했는데, 제가 섭섭했던 건 주중에는 모두의 사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독점하고 싶은 마음 내려놨던 것. 그런데 주말에는 우리가 드디어 집에 가는 날이었는데, 그럴때도 자주 엄마가 언니들을 불렀고, 그때가 섭섭했다. 충분히 엄마가 어떤 역할해야하는지 다 알지만, 그러나 일주일에 하루만이라고 온전한 내 엄마인 시간이 있다면, 그걸로 위로와 충족이 될텐데, 그 한번의 기회를 주지 않아 섭섭하고 화가 났던 것. 매일 엄청 집중하는 엄마가 필요한게 아니라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딸, 엄마라는게 느껴지는 시간 있으면 지금생각해보면 그게 섭섭했던 것. 그 공동체 안에 살면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Q. 촬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중단하게 된 계기는?
 
(김보람) “두 분을 찍게된 계기는 피의 연대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과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 섭식장애 진단율이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피의 연대기는 전문가, 역사, 대안 순서의 도식적 다큐멘터리였다. 이와 같은 도식적 다큐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섭식장애 관련) 전문가도 만나고 열 다섯 분의 경험자를 만나 공부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거기에 모두 가족관계, 특히 모녀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성형을 요구하는 엄마, 서울대 공대를 갔는데도 다이어트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아빠와 같은 가족관계, 이 중에 전문가 분들이 ‘섭식장애는 가족치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다이어트, 외모지상주의와 같은 단순한게 아니고 공부하면 할 수록 어려운 증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주 한 고등학교에서 피의 연대기 상영 요청으로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다. 섭식장애로 선생님(박상옥 분)이 따라오셔서 우리 딸이 10년 넘게 거식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부엌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다. 그때 장면을 찍고 나서 ‘이 두 사람 사이 되게 뭔가가 있구나, 되게 특이한 사람들, 멋있는 사람들, 내가 동경하던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끌렸고, 그래서 더 찍겠다고 했다. 어느순간 너무 어려웠다. 90분짜리로 솔팅아웃해서 만들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섭식장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모녀관계를 다루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고행길 시작됐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어져서 중단하게 된 것.”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식이장애 환자는 최대 60% 가량 증가했다. 2022년 기준 폭식증 환자는 2018년 대비 32.4% 증가했으며, 거식증 환자는 44.4%, 기타 식이장애 환자는 68.5% 증가했다. 전체 식이장애 환자 10명 중 8명은 여성이다.

 

(박채영) “코로나로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불안정을 겪었다. 카메라 촬영 요청 있을 수 있다는게 스트레스 요소, 자신이 없었다. 안좋은 모습만 보여줄 것 같고, 이 영화 별개 내 인생은 개 망했고, 좋은척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만해야겠다 이 생각으로 그만했다. 보람님 집 근처에 살아서 저, 엄마, 김보람 감독 셋이 우울, 불안, 스트레스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서로에게 거리감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Q.감독으로서 ‘이정도면 됐다’라는 촬영 중단 판단은 어떻게 내렸는지 궁금하다.

(김보람)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지리멸렬한 작업에 너무 지쳐있었다. 사실은 출구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마무리 추가 촬영 안 했다. 시기적으로는 그 전 그 직전 겨울, 몇 달 차이 안 났다. 두꺼운 이불 필요해서 촬영팀 없이 무주에 가서 하룻밤 놀고 오는 날이었다. 채영씨가 그때 힘들어했던 것 같고, 마지막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집에 오는게 마지막인가보다. 일기 없어요? 옛날거 없어요?’라고 말하고 옛날 물건을 다 꺼내서 같이 보면서 하루종일 놀았던 날이었다. 애기때 썼던 일기, 고스란히 남아있고, 너무 재밌었다. 떠들고 지쳐서 부엌 바닥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이야기 방향이 그쪽으로 갔다. 그 순간에 ‘이거 찍어야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진 것은 구형 아이폰밖에 없었고, 부엌은 너무 어두웠다. ‘누굴 찍어야하나’ 생각하던 와중에 대화에 심장이 너무 뛰고 결과적으로는 엉망이 됐다. 너무 흔들려서 못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봐도 이게 없으면 영화가 완성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분명히 관객분들에게 필요한 질문과 대답이 있는 것 같아서 그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

 

Q.모녀관계를 떠나 20대부터 가진 꿈을 비롯해 모든 것이 예측되지 않는 삶을 살아오셨다. 여성으로서의 삶, 박상옥으로서의 삶에 대해 궁금하고 말씀을 듣고 싶다.

(박상옥) “수준 높은 질문 감사하다. 처음 받아본 질문이다. 얼마전 관객과의 대화에서 ‘딸에게 무엇을 용서받고 싶은지’에 관한 아픈 질문을 받았다. 여성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분노하고 대항하는 여자로 내가 살지 않아서 오직 딸에게만 세상이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단도리하면서 아이를 키워서 우리딸이 이렇게 되지 않았나 자책했고, 용서받는다면 그걸 용서받고 싶다.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질문도 여성으로서 어쨌든 70년대까지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전형적인 새마을 어린이였고, 그 이후에도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여성이었고, 나는 억압적이고 통제적 사회 분위기가 한 여성 자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어떻게 억압하는지에 관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지금의 민주당 권인숙씨가 ‘군사주의가 여성성을 어떻게 말살하는가’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그 논문 주제에 가장 적합한 여성으로 나를 인터뷰했다. 그 정도로 이번 생애 여성으로서의 제 인생은 딸의 병까지 합해져서 완벽하게 망했다고 생각한다. 많이 실패했고, 여성으로서는 참 낭패스러운 삶이었다. 마지막으로 제 제자가 졸업유에 몇 년후에 문자를 보냈다. ‘여성으로서의 선생님에게 벌을 주고 싶다. 벌로 오래 살아라’ 이렇게 문자가 왔다. 제 딸 이상으로 독설이 많은 제자들이다.”

 

*권인숙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클라크대에서 ‘우리 삶 속의 군사주의:한국의 군사화된 여성의식과 문화’(Militarism in My Heart: Militarization of Women’s Consciousness and Culture in South Korea)라는 논문으로 2001년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뉴스 / 최경헌 기자 khchoi9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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