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죽음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정유재란(노량해전)의 뒷 이야기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노량: 죽음의 바다] '알고 보면 다르다', 영화 속 역사적 배경과 뒷 이야기

[문화뉴스 김예품 기자]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는 2014년 '명량', 2022년 '한산:용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한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새해 연휴 기간 박스오피스 1위와 함께 흥행을 이어가며 90만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임진왜란 발발 후 7년, 조선에서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를 그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역사 학습 서비스 제공 누리집 '우리역사넷'에서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담는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의 죽음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선조 31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일본은 도요토미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조선의 일본군 군대의 철수를 명했다. 그 무렵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군대는 즉 수륙 4개 노선을 통해 울산, 사천, 순천 등에 웅거하던 일본군을 동시에 섬멸하려는 ‘4로병진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전라도 순천에 정유재란 직후 일본에 의해 축조되었던 왜교성에의 고시니 군대를 공격하는 조선, 명, 일본의 전투가 벌어졌다. 매우 큰 규모의 전투였음에도 명의 장수 유정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노량: 죽음의 바다] '알고 보면 다르다', 영화 속 역사적 배경과 뒷 이야기

2.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고니시는 왜교성 전투가 끝난 후 10월 무렵, 일본의 철군 명령을 알고 있었다. 이후 고니시 군대는 방법을 모색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선조 31년 11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명의 수군인 도독과 진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일본군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퇴로가 여의치 않았던 고니시는 시마즈 야스히로의 수군에 도움을 청했다.

11월 19일 새벽, 시마즈가 이끄는 500여 척 군대가 노량에 진입했을 때 이순신의 군대는 200여 척에 불과하였다. 약 4시간의 전투 끝에 일본은 전선 350여 척이 파손되며 패색이 짙어졌고, 결국 남은 전선들을 끌고 도주하였다. 그리고 퇴각하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이후 조선 군사들은 도망가는 전선 100여 척을 붙잡았다.

한편, 왜교성에 갇혔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퇴각하였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3. 인명 피해와 귀무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해마다 군사를 보내 그 나라(조선) 사람을 모두 죽여 빈 땅을 만든 후에 일본 사이도오 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귀는 두 개이니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조선에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등을 비롯한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 교토에는 귀무덤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들이 조선 백성의 귀와 코를 가지고 가면, 도요토미는 그들의 전쟁 공로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코와 귀를 귀무덤에 묻고 영혼에 대한 공양 의례를 올렸다고 한다.

문화뉴스 / 김예품 기자 press@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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