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아들의 모티브, 이병철 회장
한국경제를 일으킨 삼성의 창립자
반도체 산업의 황제, 故이병철

故이병철 회장 / [ The CEO ]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故이병철 회장 / [ The CEO ]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화뉴스 신선 기자] 한국 경제를 일으켜세운 반도체 산업의 장본인, 삼성전자의 창립자 故 이병철 회장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기업은 사람이다.

이병철의 유년 시절

1910년, 8월 29일, 만섬 가량의 논밭을 거느린 의령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나름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양반가의 자식이었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서당에 다니며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인 1921년, 이병철은 진주에 있는 보통학교를 다니기 위해 둘째 누나 이분시의 집에서 살게 된다. 이분시는 이병철을 이발소로 데리고 가, 12년간 기른 머리를 자르게 했다. 훗날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날을 자신의 ‘개화의 날’이라고 회상한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중동학교를 입학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던 와중, 17살의 나이에 부모님이 정해준 여성 박두을과 결혼하게 된다. 중동학교를 졸업하기 전, 이병철은 일본에 유학을 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3년 뒤인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의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31년, 갑자기 각기병에 걸린 이병철은 당시 건강 상태로 공부를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판단해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병철의 암흑기

청소년 시절의 이병철 회장 (왼쪽)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재단)
청소년 시절의 이병철 회장 (왼쪽)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재단)

그렇게 그는 인생의 네 번째중퇴를 해, 졸업증서가 한 장도 없는 상태로 인생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그는 아내 박두을과 낳은 자식이 셋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골패’라는 도박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낸다. 하루종일 도박을 하고집에 들어온 어느날 자식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훗날 자서전에서 회고하길, 달빛에 비춘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날 밤,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병철의 첫 사업, 삼성상회

삼성상회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재단)
삼성상회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재단)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사업자금을 받아 1936년, 마산에 정미소를 차린다. 자동차회사도 함께 인수해 운수업도 시작한 그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토지까지 사들이며 연간 만석이 넘는 쌀을 수확하며 첫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1937년에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땅값이 폭락하고 은행은 대출을 중단해 이병철은 파산을 하고 만다.

아버지에게 다시 도움을 청한 이병철은 당시엔 엄청난 돈이었던 3만 원을 받아 대구에서 청과물과 건어물을 무역하는 ‘삼성상회’라는 가게를 차리게 된다. 포항과 대구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제분기와 제면기, 그리고 이후에 조선양조를 인수해 양조업도 함께 운영하며 이병철은 다시 한번 사업을 성공 시킨다.

삼성물산공사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물산)
삼성물산공사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물산)

국제무역으로 눈을 돌린 이병철은 친구에게 삼성상회를 맡기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 종로에 ’삼성물산공사’라는 회사를 차려 무역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가, 한국의 1등 무역회사로 자리매김한다.

위기를 기회로, 제일제당의 설립

제일제당의 국내 최초 설탕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CJ 뉴스룸)
제일제당의 국내 최초 설탕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CJ 뉴스룸)

삼성물산공사로 한창 성공을 거두던 와중,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병철은 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대구에서 이병철은 자신이 서울로 올라갔던 사이 조선양조가 낸 수익 3억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설탕과 비료를 취급하며 국제시장과 거래를 하며 수익을 내기 시작한 이병철은 1년 만에 약 6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둔다.

당시 국내에서 세계시장보다 3배 비싸게 팔리던 설탕을 눈여겨보던 이병철은 일본에서 제당기를 수입해 1953년에 제일제당, 지금의 CJ를 설립하게 된다.

수입산 설탕의 3분의 1 가격으로 판매를 시작한 이병철은 제일제당 설탕으로 수입품 대체라는 큰 업적을 이루게 된다.

서민들에게 국산 양복을, 제일모직

제일모직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 C&T)
제일모직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 C&T)

의식주 중에 제일제당으로 ‘식’을, 그리고 이번에는 ‘의’에 해당하는 사업을 구상하기로 결심한 이병철은 당시 대한민국의 열악한 섬유산업을 보고 서민들도 입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양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1954년,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구에 최대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지은 뒤, 장미라사라는 양복점을 개업하고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양복을 팔기 시작했다.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제일모직은 설립 이후 1년 동안 큰 적자를 봤으나, 이후 외국산 양복의 5분의 1 가격으로 고객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모직 산업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며 이병철이 국내 섬유 시장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일모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설립, 그리고 이병철의 후퇴

1963년 10월,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5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이병철에게 정부의 지원으로 비료 공장을 개설하라고 요청한다. 이듬해인 1964년에 이병철은 한국비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었던 일본의 연 18만 톤 비료 공장을 뛰어넘은 연 33만 톤의 비료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료 공장의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966년에 사건이 터지고 만다. 비료 공장의 공사를 위해 일본 이쓰이 물산에서 건설자재를 들여오면서 사카린 55톤과 함께 양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 밀수한 것. 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이 조명된 것이다.

당시 정부의 비자금 목적으로 삼성의 밀수를 눈감아주는 상황이었지만, 여론에 사건이 알려지자, 정부가 삼성의 뒤통수를 쳐 삼성에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결국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상무로 있었던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는 구속되고, 이병철은 한국비료의 지분 51%를 나라에 넘긴 뒤, 장남 이맹희를 최고경영자로 앉혀 자신은 경영일선에서 물러서겠다고 발표한다.

TBC와 중앙일보의 창립

중앙일보를 읽는 이병철 회장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자전)
중앙일보를 읽는 이병철 회장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호암자전)

사카린 밀수 사건을 통해 여론과 언론의 중요성을 느낀 이병철은 종합 매스컴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해 1965년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TBC를 창립한다.

하지만 12·12 사태가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TBC를 빼앗아 KBS에 흡수 이후 1980년에 사라지게 되었다. 훗날 종합편성 채널 사업 자유화로 개국 된 채널이 바로 TBC를 이은 JTBC이다.

삼성전자, 그 시작

흑백 이코노 TV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뉴스룸)
흑백 이코노 TV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뉴스룸)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병철은 삼성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려고 일본을 방문했다가 전자 산업에 눈을 뜨게 된다.

사업타당성조사 등 전자 사업에 관한 공부를 마친 이병철은 1969년, 드디어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경영일선에 복귀한다. 설립 초기에는 회사가 안정되지 못했던 탓에 불량 제품으로 인한 큰 적자를 보기도 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1973년에 삼성전자의 첫 자체 제작 제품인 흑백 TV 마하 500을 출시하면서 삼성전자의 이름을 천천히 알리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75년, 삼성전자는 흑백 이코노 TV를 출시하면서 초대박을 치게 된다. 기존의 TV들은 예열 때문에 전원을 켠 지 20초 뒤에 화면이 켜지는 방식이었지만, 삼성전자의 이코노 TV는 예열이 5초도 안 걸린 것. 연간 판매량 약 75만 대를 기록하며 단숨에 LG전자를 위협하는 라이벌로 부상한다. 그렇게 삼성은 꾸준히 전자제품을 개발하며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병철, 반도체에 눈을 뜨다

1982년, 이병철은 암 투병을 하다가 수술로 고비를 넘기는 와중에도 사업 확장을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 떠난다. 1974년에 이병철의 막내아들 이건희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았지만, 이병철은 훗날 반도체가 전자산업을 지배할 것이라고 보고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이병철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기술을 이전받기로 했었으나, 마이크론 측의 적대적인 태도에 자체적인 반도체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연구원들의 밤낮없는 반도체와의 사투 끝에, 약 1년 만인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했다. 

삼성의 기적, 64K D램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반도체뉴스룸)
삼성의 기적, 64K D램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삼성반도체뉴스룸)

전 세계 3번째로 대한민국의 기업 삼성이 반도체를 단기간에 개발해 낸 것. 이때 개발된 64K D램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기재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의 반도체 개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64K D램을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시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게 되면서 삼성은 20센트의 가격에 내놓게 된다.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된 것.

삼성 내부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이병철에게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고 말을 하며 반도체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를 향한 열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삼성전자는 기적적으로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2년 뒤인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10분의 1을 점유하면서 삼성전자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다.

반도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한 이병철 회장 /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한 이병철 회장 / [ The CEO ] 도박 중독에서 반도체의 황제로, 삼성전자 창립자 故이병철 회장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10년간 지속됐던 폐암과의 투병 끝에 이병철 회장은 11월 19일, 서울 이태원의 자택에서 77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이병철의 막내 아들 이건희가 삼성을 물려받아 이병철의 반도체 사업을 이어가 일본,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이병철 회장은 미래를 보기라도 하듯, 반도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세계 1등을 노렸다. 만약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를 저버렸다면 한국의 경제는 지금과 같았을까? 

문화뉴스 / 신선 기자 press@mnh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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