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종 칼럼]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이 한층 가열되는 가운데 미·중·일·유럽 등 주요국들이 자국의 전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산업보조금 지급을 비롯해 전방위 지원책을 쏟아붓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월 6일 ‘탄소중립산업법(NZIA │ Net-Zero Industry Act)’ 입법 최종 관문을 넘어 전기차 배터리, 원전, 태양광 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뿌릴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EU 상반기 순환의장국인 벨기에 정부는 이날 오후 소셜미디어 엑스(X │ 옛 트위터)를 통해 이사회, 유럽의회, 집행위원회 간 ‘NZIA’에 관한 3자 협상이 잠정 타결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남은 형식적 절차에 해당하는 유럽의회, 이사회의 승인 등을 받으면 관보 게재를 거쳐 이르면 올해 말께 발효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 Inflation Reduction Act)’과 중국의 공격적 투자에 대응하기 위해 EU가 마련한 ‘NZIA’는 친환경 산업 역량 확대를 위해 탄소 중립과 관련된 역내 산업 제조 역량을 2030년까지 40%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불어 ‘메이드 인 유럽’을 육성하겠다는 구상으로 유럽판 ‘IRA’로도 불리는 ‘NZIA’의 주요 골자는 2030년까지 920억 유로(약 132조 원)의 민관 투자가 필요한데 그중 17~20%는 공공 보조금 등의 방식으로 조성할 것으로 보인다. 사업 인허가에는 패스트트랙도 적용된다. 관련 산업에서 주도권을 다투는 한국 기업들의 어깨는 그만큼 더 무거워지게 됐다.

미국은 2022년 8월 16일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으로 제정된 ‘IRA’를 계기로 친환경 에너지, 헬스케어 등에 4,370억 달러(약 580조 원)를 풀기로 했다. 중국도 2015년 리커창 중국 총리가 제조업 활성화를 목표로 발표한 ‘중국 제조 2025 전략’을 세워 전기차·로봇 등 10대 분야에 대규모 재정·금융·세제 지원을 진행 중이다. 전기차 분야에 중국이 쏟은 보조금은 2009년부터 12년 동안 1,600억 위안(약 29조 원)에 달한다. 일본 정부는 미일 기업이 공동 운영하는 혼슈 공장 2곳의 반도체 양산 사업을 돕기 위해 2430억 엔(약 2조 2,000억 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첨단 공장 유치를 위해 50년 이상 묵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규제까지 풀고 나섰다. 대만은 ‘산업혁신 조례 수정안’을 통과시켜 연구개발(R & D) 투자비의 25%, 설비투자의 5%를 세액공제 해주는 등 전략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국은 글로벌 경쟁국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세계 전기차 시장 판매 순위가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2022년까지 선두를 지켜온 미국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가 주춤한 사이 중국 업체 BYD가 분기 판매 1위에 올라섰다. 테슬라는 독일 업체 폭스바겐에 독일 내 전기차 판매량 1위 자리까지 내줘 반등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자동차는 전기차에 사활을 거는데 한국은 2024년도 무공해차 보급 예산을 전년 대비 9.6% 줄였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예산에서는 핵심인 전력망 구축 예산도 빠졌다. 국내 투자의 발목을 잡는 입지·환경·고용 규제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는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의 장기적인 사법 리스크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중론이다. 이로 인해 삼성은 적기에 대규모 투자를 하지 못해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에 뒤처질 위기에 처한 바 있었다. 지난 2월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이 회장의 19개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결에 불복, 사실오인·법리 오해를 이유로 항소했다. 사법 정의 실현을 위한 검찰의 노력은 당연히 존중한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이 한층 가열되는 가운데 ‘반(反)기업 정서’에 기인한 사법 리스크가 자칫 경제부담으로 작용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한국은행이 지난 2월 7일 발표한 2023년 12월 국제수지 잠정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연간 경상수지 흑자는 354억 9,000만 달러로 당초 한국은행이 예측한 3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경상수지 흑자 폭이 예상치를 뛰어넘은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경기 회복 등에 힘입어 수출은 늘었는데 유가 하락으로 수입은 줄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해 상품수지 흑자 규모는 340억 9,000만 달러로 전년의 258억 3,000만 달러에 비해 32% 증가했다. 특히 작년 12월 반도체 수출은 111억 9,000만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9.1% 증가했다. 반도체 수출은 11월에도 10.8% 증가한 데 이어 2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직전까지 각 경쟁국의 강력한 지원 속에 글로벌 기술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반도체를 비롯한 우리 첨단산업의 수출시장 점유율이 급격히 악화일로(惡化一路)를 내달리고 있다가 모처럼 호기를 만난 셈이다.

반도체 수출과 일부 제조업만 ‘나 홀로’ 호조세를 보일 뿐 민간 소비와 건설투자 등이 부진하고 취업자 수 증가 폭도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무역 의존도가 75%나 되는 한국으로서는 수출 확대 없인 먹고살기 힘든 나라다. 첨단산업의 수출경쟁력 상실은 당연히 국가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급물살을 탄 인공지능(AI) 혁명과 이로써 촉발된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대대적인 지각변동은 한국 경제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대만의 TSMC와 미국의 엔비디아(NVDA)가 업계를 이끌어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라도 서둘러 인공지능(AI) 시대에 대한 통찰력과 시장 지배력 강화에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선제적·공격적 경영을 통해 우리 대표 기업들이 글로벌 수출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길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경제활력 촉진을 위해 수명을 다한 악성 규제들을 면밀한 재점검을 하고 과감한 수술에 나서야 한다. 경제 활력 촉진을 위해서라도 현실과 글로벌스탠더드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특히 규제로부터 자유롭고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지원으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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