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고나리 기자] 귀주대첩은 1019년 2월,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배압의 거란군을 크게 이긴 전투로, 한반도 역사상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전투는 거란의 제3차 침략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고려와 거란 간의 오랜 갈등과 전쟁이 빚어낸 결정적인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현종에게 친조(親朝)를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하면서 양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성종은 강동6주를 공격하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고려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고려군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큰 규모의 군사를 모아 거란군의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사진 = 두산백과 두피디아
사진 = 두산백과 두피디아

 

거란군은 1018년 말 고려로 진군했으며, 고려군은 여러 차례 거란군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계속해서 고려를 공격했고, 1019년 2월 귀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고,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략은 고려와 거란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갈등과 충돌의 연속 중 하나로, 1018년 거란이 소배압을 대장으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사건입니다.

고려 현종은 이에 대응하여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20만 대군을 모아 거란군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이 전쟁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투는 귀주대첩으로, 고려군은 강감찬의 지휘 아래 거란군을 대파했으며, 이로 인해 거란군은 10만 대군 중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남아 철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군의 대승으로 기록되며, 이 전투를 통해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이후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며 국교가 회복되었지만, 고려는 요의 주요 요구사항인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양국은 요가 멸망할 때까지 사행무역이나 밀무역 등을 통해 경제적 교류를 지속했으며, 이 시기에 거란으로부터 전해진 대장경은 고려의 불교 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략과 귀주대첩은 고려의 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고려가 외침에 맞서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려 했던 결단력과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됩니다.

이 전투는 고려군의 결정적 승리로, 고려군은 강민첨의 지휘 아래 거란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거란군은 큰 손실을 입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승리는 고려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기록되며, 고려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과 고려군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화뉴스 / 고나리 기자 press@mhns.co.kr

[사진 = 두산백과 두피디아 /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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