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벚꽃동산를 보고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벚꽃동산'을 세 번 보았지만, 가장 완성도가 높은 연극이었다. 매우 꽉 찬 연극이었다. 배우의 연기며, 소품이며, 음향이며, 조명이. 실제적 묘사와 새로운 시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120% 과함이 있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극 마지막 장에 가족들이 떠나기 전 저택 창문에 나무를 덧대며 마감하는 사람들이 나와 시각적 환기와 긴장감을 조성해서 사람들이 계속 극에 몰입하도록 하는 새로운 덧댐은 좋았지만, 3막 파티장에서 극중 대사가 있는 인물 외에 몇 명이 추가로 나와 춤을 추거나 서로 좇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했다.

연극에서는 작은 동작에도 큰 의미가 부여되는데, 그들이 충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극이 흐려지고 조잡한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럴 경우엔 차라리 과감히 삭제하여 극의 몰입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작은 디테일을 위해 큰 호흡을 잃는 것은 큰 손해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배우와 연출의 완성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함께 이입되어 100%를 완성할 수 있어야 좋은 연극이다. 연극이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상호소통적 '사이'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미완성적 요소가 있지 않나 싶다. '안똔체홉학회'에서 만든 연극이라 너무 잘 알아서 그런지 욕심이 과해 아쉬운 케이스. 조금만 힘을 뺀다면 그 공간 사이에 관객들이 함께하며 숨을 쉬는 연극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때에 따라 절제할 수도 있는 완급 조절이 예술에서는 매우 중요하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도가 가장 높은 공연이다. 모든 인물들이 개연성을 가지고 캐릭터를 지니도록 치밀하게 희곡에 나와 있다. 그래서 모든 연기자의 연기력이 잘 드러날 수밖에 없다.

대체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났지만, 필자가 관람한 날에는 주인공 로빠힌 역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남는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대사만 읊는 느낌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로빠힌은 극의 힘을 끌어가지 못한다. 반면 하녀 '두냐샤' 역의 조수정은 마치 신의 손길로 안톤 체홉의 희곡 인물이 실제로 태어난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가장 완성도 높은 체홉의 희곡이기에, 그녀는 이 연극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역이었다. "나는 예민한 여자에요~" 라며 프랑스에 절은 젊은 하인 야샤에게 아양을 떨때, 살아 있는 인물을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마치 그 인물이 된 것처럼 감정 이입이 되어 몸을 베베 꼬게 되었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의 무대 인사를 보며 큰 스토리의 줄기를 넘어서서 젊고 사치스런 하녀의 순수한 사랑과 절망이 스쳐 지나간 것은, 희곡이란 연기를 통해 재탄생 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절감한, 그래서 배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소중한 연극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한 편의 연극을 위해 연출로서의 욕심과 능력을 가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문화뉴스 아띠에터 아빈 (김민경) artietor@mhns.co.kr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