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는 흔히 우스운 존재로 인식된다. 정작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혹은 살고 있는지 모르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천대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광대 본인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신분의 벽,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영화 '왕의 남자'에서의 장생과 공길, 항상 웃고 있는 미소 뒤에 슬픈 진실을 감춰두고 있는 피에로처럼.
광대에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 혹은 광대란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 등 상황에 따라 행복의 정의는 달라지는 것처럼 가지각색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금기를 깨트려야 행복해지는 광대들이 있다. 해피엔딩이지만 아무도 그를 몰라주는, 그래서 오히려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음악극 '클라운타운'에서다.
미미는 울타리 밖 세상을 항상 궁금해하며 울타리를 넘고자 하지만 파파는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며 미미를 나무란다. 나날이 둘 사이의 대립이 심해져 가던 중 마을의 수호신인 루나님의 생일 새벽. 언제나처럼 클라운들은 자신의 장기를 활용해 루나님께 보여드릴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공연 리허설을 하며 고조되던 분위기는 미미가 루나님을 향해 왜 울타리 안의 세상에서 당신만을 위한 공연을 준비해야 하냐며 소리치면서 단숨에 깨져버린다.
미미가 아무리 루나님을 향해 소리쳐도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반복되는 상황, 여전한 금기 속에 미미는 다른 클라운들과 파파의 경고도 무시하고 울타리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 말볼리오를 만나게 된다. 말볼리오와 함께 많은 사람 앞에서 공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클라운들은 금기를 깬 것이 세상을 향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의 성공만을 생각하는 말볼리오의 행동에 클라운들은 지쳐가기 시작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하긴 했지만, 행복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공연을 준비했던 옛날과는 달리 클라운들은 말볼리오의 명령에 따라 그저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광대로 전락한다.
금기에 도전했다가 좌절하고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는 것. 비단 음악극 '클라운타운'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성이다. 더구나 말볼리오가 클라운들에게 행했던 악행의 강도에 비하면 클라운들이 너무 쉽게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이야기의 극적 효과가 떨어진다. 클라운들의 행동에 당위성을 주기 위해 인간 세계의 혹독함을 좀 더 극적으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만, 여태까지의 구성이 다소 뻔하다고 생각했던 관객이라면 그 이후의 전개에 놀랄지도 모른다. 마을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여행이 마냥 환상적이거나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우리는 오늘날을 살아가기 위해 또 한 번 다른 이의 희생을 필요할 지 모른다. 단지 그 희생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 실패가 전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역할이다. 다른 클라운들의 희생으로 미미가 클라운타운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는 사람이 됐듯이, 그래서 이 극이 해피엔딩이라고 주장할 수 있듯이.
문화뉴스 전주연 기자 jy@mhn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