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6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문화뉴스 MHN 미디어센터에서 배우 전박찬을 만났다

[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연기하는 배우 전박찬을 만났다.

지난 달 16일 서울 마포구 문화뉴스 MHN 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묵직한 언어들로 '뫼르소'와 '전박찬'을 동시에 설명해갔다. 현재 그는 산울림극단의 3년만의 신작인 연극 '이방인'의 '뫼르소'로 출연 중이다. 연극은 알베르 까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는 유독 무대에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을 연기해 왔다. 연극 '에쿠우스'의 알런,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에 이어 '이방인'의 뫼르소까지. 전박찬은 관객들의 관념을 자극하는 인물을 부족함 없이 소화해내곤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포기하기 쉬운 '고민하는 일'을, 연극으로써 다시 떠올리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연극은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 여기는 사람이다. 인터뷰가 끝난 이후 "두서없이 얘기하고 수많은 우답을 쏟아내면서, 아직 이 작품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며 "이 고민들을 공연 끝까지 놓지 않아야 관객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다음 달 1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이방인'의 '뫼르소'가 되어가면서 그가 겪은 고뇌와 내적 갈등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관객들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 고민하는 지점들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배우 전박찬과의 일문일답이다.

 

 

연극 '이방인' 프로필 사진 ⓒ 극단 산울림, 보통현상

연극 '이방인'과 이번에 맡은 역할 '뫼르소' 소개 부탁한다

└ 많은 분들이 읽으셨을 작품. 혹 읽지 않았어도 제목은 많이들 아시는 작품이다. 나는 이번에 작품 들어가며 처음 읽었다. 덕분에 까뮈의 다른 작품들도 함께 읽었다. '뫼르소'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인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고 이 사건이 재판에 넘어간다. 

이 재판에서는 뫼르소가 총을 쏜 사실, 누군가를 살인한 사실보다 다른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모친이 돌아가셨는데도 슬퍼하는 행동 양식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쳐 사형이 선고된다. 뫼르소는 끝까지 항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왜?' 라는 질문을 가지고 계실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랬고, 지금도 '왜?' 라는 질문이 남아있다. 

나뿐 아니라 이 작품을 만난 관객들 또한 이번 연극을 통해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본인의 확신이나 신념에 기반을 둔 선택을 하는 사람 같다. 아직 모든 질문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원래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알고 있었나? 이번 공연은 원작과 구성이 얼마나 비슷할까?

└ 제안 받았을 때 당시 까뮈의 얼굴과 '이방인'이라는 제목만 알고 있었다. 제안 받은 후 책을 읽었는데 잘 모르겠더라. 까뮈의 언어는 시적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산문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임수현 연출님께서 굉장히 잘 각색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불문학자이셨던 연출님이 직접 각색에 참여하셨는데, 내게 출연 제안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인은 30년 동안 이 작품을 좋아했고, 연극으로 꼭 잘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덧붙여 '산울림'에서 오랜만에 하는 신작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연출님께서 각색 작업 초반에는 소설의 구조를 뒤집어볼까도 고민했다고 하시더라. 그러나 소설의 처음과 끝을 그대로 따라가게 됐다. 물론 소설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새로 추가되는 것도 있고, 어떤 부분은 생략되기도 할 거다. 기본적으로 까뮈의 구성을 따라가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대본은 절대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그 대본을 믿고 가고 있다.

 

 

2015년 연극 '맨 끝줄 소년' 리허설 사진 ⓒ 예술의전당

연극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 '에쿠우스'의 알런, '이방인'의 뫼르소까지. 매번 '생각하게 만드는' 캐릭터를 맡는 것 같다. 고정관념, 타성에 젖어버린 사유를 깨워준다. 전박찬과 이 캐릭터들은 어떤 점이 닮아 있나?

└ 사실 인간은 누구나 고민을 한다. 어떤 것이든 사유하기에 인간이다. 관객들이 어느 연극을 찾는 이유도 어떤 것을 고민하거나 질문 던지고 싶어서인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맡은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니 '이게 내 취향인가?' 싶다가 관객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제 생각을 딱히 특별하거나 심오하다 말할 수 없다. 

이 작품을 하면서 작은 깨달음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것이다. 뫼르소도 '나는 행복했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고독 깔려 있다. 

사실 가끔 관객들께 미안하다. 웃을 수 있는 연극, 재밌는 연극을 보고파 하는 분들 있을 텐데…. 관객들 중에는 다양한 이유로 삶에 지쳐있는 분들이 있다. 객석에 앉아서까지 고민한다는 것이 관객들에게는 피곤한 일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관객들과 고민을 같이 하면서 위로받는 순간들이 있다. 

어떻게 위로받는지?

└ 가끔 무대에서 느껴질 때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관객들이 유독 집중해 보는 부분이 있다. 나의 예상과 다른 부분에서 눈물들을 흘리시기도 한다. 

또한 공연 끝나고 직접적으로 말씀해주는 분들도 있다. 연극 '말들의 무덤'이라는 작품을 꽤 오래 했다. 한국전쟁 중 양민학살을 다루는 얘기이다. 삼연까지 올리다보니 '이 공연을 왜 다시 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더라. 근데 어느 날 고등학생 관객이 극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이렇게 얘기해주더라.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건 교과서에 나와 있지만, 양민이 학살됐다는 사실은 이 극장 와서 처음 알았다'라고. 그러면서 눈물짓더라. 

사실 모든 연극의 이야기들이 지금 피부와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얘기, 혹은 내 주변이 아닌 얘기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피로할 수 있지만, 어떤 관객들에게는 관극의 시간이 굉장히 가치가 있는 순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연극하는 것에 위로와 힘을 얻는다.

관객이 객석에서 눈물짓는 모습이 다 보이나?

└ (웃음) 관객들이 공연을 재미없게 보면 배우들도 다 안다. 왜 모르겠나. 연극은 과정이다. 결코 만드는 사람들끼리 완성하는 작업이 아니다. 관객과 만나고 나누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연극 '이방인' 공연 사진 ⓒ 극단 산울림

작품 출연 결정할 때 고민을 많이 하는 스타일 같다

└ 역할을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매 작품마다 고민은 있다. '이 작품에서 이 역할을 맡는 게 어떤 의미가 있지?', '이걸 왜 해야 하지?', '관객들과 뭘 나눠 가져야 하지?' 라는 고민들을 늘 한다. 

이번 공연은 원작이 가진 힘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 부담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민한다. 고민하지 않으면 자칫 실수할 수 있으니. 고민을 해도 실수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그럴 거다. '이 일을 하는 게 옳나?' 했다가 결국에는 '그게 옳지 않았다' 혹은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한다. 

배우라는 존재는 그런 면에서 실수가 개인적인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닐 뿐더러 수많은 관객을 만난다. 관객들의 시간은 소중한 것이다. 내가 공연에 들인 시간만큼, 관객들도 극장에 찾아오는 시간, 보는 시간, 생각하는 시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연습 초반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캐릭터 구축에 대해 '뫼르소의 인간적인 면과 저항에 포커스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뫼르소의 '인간적인 면'을 어떻게 구현하고자 하나?

└ 2, 3주 전의 대답이다. 지금도 유효한 고민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는 연습하면서 조금 달라졌다. 그때는 뫼르소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염두에 뒀다면, 지금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고독함과 외로움을 고민하게 됐다. 표면적 고민보다는 내면의 고민들을 생각한다. '나는 왜 살아가나', '사는 것은 왜 가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죽는 것은?' 등. 

인간 내면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고독, 외로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행복하다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 외롭고, 누구보다 낫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늘 주변에 친구나 애인, 가족이 있어도, 같이 있는 순간마저 외롭고 고독하다. 지금은 그런 부분을 '인간적인 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항적인 면'은 어떻게 구현하나?

└ 원작 읽으며 '왜 뫼르소는 항변이나 저항을 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이 먼저 들었다. 자기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이방인' 2부의 재판 장면은 뫼르소가 총을 쐈다는 행위, 아랍인을 쏴 죽인 것에 포커스 맞춰져 있지 않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무관심했던 자세, 그 다음날엔 애인을 만나서 해수욕하고 영화 보고, 이웃에 의해 어떤 사건에 연루돼 누군가를 쏴 죽인 것. 재판에서는 1부에 그려진 뫼르소에 대해 얘기한다. 결국 이 재판은 살인 사건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이 인간에 대한 심판이었다. 정말 마음 아프고 부조리한 일이다. 

그럼에도 뫼르소가 저항의 말을 하지 않는 것, 이 부분을 이해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뫼르소는 항변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하게 된 것이었다. 뫼르소는 '더 이상 비겁하지 않'게, '나는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행복한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사형 제도나 죽음에 대해서도 질문 던지게 만든다. 이뿐 아니라 아직도 질문을 많이 하는 상태다. 절대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끝까지 뫼르소를 다 알 수 없는 상태로 연기하게 될지 모르지만, 관객들은 뫼르소를 나보다 더 이해할 수 있고, 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나는 길만 제시해드릴 뿐이다.

[문화 人] "연극은 결국 마음을 나누는 일"…연극 '이방인' 전박찬 ② 로 이어집니다.

key000@mhns.co.kr 사진ⓒ문화뉴스 MHN 임우진 PD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