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필이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에서 '티무르'를 맡았다. ⓒ 최승필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잘하는 사람이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다. 무대를 갈망하고, 열망하고, 그 열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사람이 무대에 설 수 있고, 결국 승리자가 될 수 있다."

한국인 베이스 최초로 약 2천 년에 만들어진 무대에서 오페라를 공연한 최승필이 인터뷰 중 한 말이다. 그는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학사 졸업 후, 홀혈단신으로 독일 베를린 유학 시절을 보냈다. 유럽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오페라를 배우고 싶었고 그 결과는 각종 콩쿠르에서 보였다.

최승필은 쟌니폿지 국제콩쿠르 1등, 마리아 카날리아 국제콩쿠르 장학생 특별상, 부세토 베르디 국제콩쿠르 입상, 라 페니체 국제콩쿠르 1등상, 청중상, 베르디상, 최고베이스상, 피에로 카푸칠리 국제콩쿠르 3등상, 청중상, 루치아노 네로니 국제콩쿠르 1등상, 베르디 레퀴엠 특별상,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아이다' 주역 선발 국제콩쿠르 우승 등 다양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 시립음악원 예술가곡 연주자과정, 토리노 국립음악원 성악 석사졸업 등 착실한 커리어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유럽의 주요 국립극장과 왕립극장에서 다수 오페라에 출연했다. '투란도트'의 '티무르', '라보엠'의 콜리네, '아이다'의 '왕', '일 트로바토레'의 '페란도', '오텔로'의 '로도비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라이몬도'와 같은 오페라뿐 아니라, 베르디의 '레퀴엠' 성악 부분에도 출연해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공연을 펼쳤다.

한국에서 그가 알려진 건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100년이 넘는 역사의 세계 3대 오페라 페스티벌 중 하나인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세 편의 공연에 출연한 것이다. 이는 한국인 베이스 역사로는 최초의 일이다. 개막 공연 '가면무도회'를 비롯해, '카르멘'과 폐막작 '아이다'에서 이탈리아 현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냈다. 또한, '가면무도회'는 지난 9월에 복합 상영관인 메가박스를 통해 실황이 상영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바쁜 공연 일정을 뒤로하고, 잠시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성악을 하게 된 계기부터, 유럽 현지에서 받았던 텃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을 비롯한 인상 깊었던 공연, 앞으로의 공연 계획을 들어봤다. 끝으로 미래의 성악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영상 메시지도 함께 확인해보자.

   

성악을 하게 된 계기는?
ㄴ 합창반이 유명한 대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합창단을 했다. 평소엔 가요나 팝송, 재즈, 여기에 엘피판을 통해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매력을 느꼈다. 청소년 시절에 방황한 나에게 음악은 휴식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음악 시간에 실기시험을 했는데, 점수가 높게 나왔고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합창반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음악에 대한 사랑을 키우게 됐다.

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다.
ㄴ 다른 음대를 조금 다니다, 군대 다녀온 후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재학 중엔 큰 두각을 드러낸 학생은 아니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만큼 노래를 잘하고 가진 재능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콩쿠르 우승이나 대내외적으로 '최승필'이라는 사람이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항상 열정은 있었고, 유럽 무대에 나가 본토에서 벨칸토 발성(Bel Canto,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창법)을 배우고 싶은 꿈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열정이 유학 때 힘든 고비를 넘길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힘든 유학 생활 이후, 현지 여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편견의 벽도 있었을 것이다.
ㄴ 일을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있고, 어느 정도 인정한다. 자국민이 아니므로 그들이 보면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고, 내 나라에서만큼 내 권리를 주장하고 살 수 없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종주국이다. 그들의 자부심은 엄청나게 크다. 그런 부분의 텃세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똑같이 노래를 잘해선 무대에 설 수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처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하더라도 이탈리아 사람을 쓰게 되어 있다. 그래야 무대에서 그림도 잘 나온다. 일하면서 동양인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이왕이면 자국민을 쓰려고 하지만, 실력이 월등히 좋으면 그들이 인정하게 된다. 그 증거로 나는 무대에 섰다.

   
 

어떤 텃세를 인정하게 됐고, 그 텃세를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나?
ㄴ 많은 오페라의 배경이 그들의 고전, 역사,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동양인의 마스크로 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단순히 텃세만 있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다. 인정을 해야 하지만, 실력이 월등하면 분명히 기회가 있다. 실력은 단순히 노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루두루 노래는 기본이고, 언어적 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한다. 말이 통하고, 작품이 통하고, 교감을 하려면 언어가 우선이고 기본이다.

또 하나는 노래 외에 작품에 대한 해석을 위해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야기가 그래야 통한다. 작품을 하면서 어떤 내용이고 시대적 배경, 사회적 현상인지, 그들의 사상과 이데아를 알아야만 작품이 해석될 수 있다. 그런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갖춰져야지만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본다. 한 두 번은 무대에 서겠지만, 이것이 지속하지 않는다면 그들 문화에 융화될 수 없다. 요즘 한국에도 TV에 출연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그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한국말을 정말 잘 구사하는 것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동양인이 그 정도로 말을 하면 기용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강인한 인상을 줄 정도의 실력을 줘야 하는데, 그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노래는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노래가 말인데,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하고, 발음이 정확하게 잘 들려야 한다. 오페라엔 문학과 음악의 결정체다.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아리아(Aria)'로 구성되어 있는데, '레치타티보'는 연극처럼 말하며 전달 해야 하는 파트고, 아리아는 노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 전달력은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그 언어의 기본은 벨칸토 발성이다.


▲ 지난해 7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아이다' 공연이 열렸다. 최승필은 '왕'을 맡았다. ⓒ 유튜브 siepi2

지난해 7월, 한국 베이스로는 처음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ㄴ 소프라노 홍혜경 선생님이 몇 번 공연하셨고, 테너는 프란치스코 홍이 와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베이스로는 처음이었다. 지난 시즌 페스티벌에서 14번 공연을 했다. 지난달 메가박스를 통해 국내에도 공개된 '가면무도회'에서 '사무엘 백작'을, '아이다'에서 '이집트 왕'을, '카르멘'에선 '주니가 중위'를 맡았다. 또한, 플라시도 도밍고와 갈라콘서트와 다른 두 콘서트를 했다. 따지고 보면 시즌에 와서 한 시즌을 다 도는 경우는 아마 제가 처음인 것 같다. 또한, 다니엘 오랜 지휘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인데 한 무대에 선 것은 행운이었다.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 대해 소개해달라.
ㄴ 먼저 아레나 디 베로나는 로마 콜로세움과 같은 야외 원형 경기장으로 약 2000년 전에 세워진 곳이다. 이곳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페라를 올리고 있는데, 그 대표작으로 '아이다'가 있다. 이집트 배경인데 실제 코끼리도 등장할 때가 있었다. 말도 등장하는 등 스케일이 커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이 됐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철제로 된 좌석을 만들었다. 원래는 대리석 바닥에서 봤다.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지금은 하중을 염두에 둬서 1만 7천 명 이상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제가 한 것 중 '가면무도회', '카르멘',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공연이 만석이었다. 또한, 오케스트라 대원들, 백스테이지 합창단을 합치면 더 많은 숫자가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관객들이 티켓을 살 때 양초를 나눠준다. 무대에 들어가면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데, 모습이 환상적이다. 출연 통보를 받고 무대에 올라갈 생각에 많이 떨렸다. 무대에 사람이 압도당하게 되어있다. 실제로 압도당했지만, 금방 스스로 무대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즐기면서 했다. 성악가들에게 야외 오페라는 꿈의 무대다. 게다가 성악과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하는 무대다. 이것은 매우 큰 행운이고, 일생일대에 한 번 올 기회였다.

   
▲ ⓒ 최승필

지난해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은 '가면무도회'였다.
ㄴ 시즌 중간에 와서 한두 번 공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4번 공연 중 개막과 폐막 오페라를 했다. 한 극장 시즌에서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가 첫 번째 공연이다. 중요한 손님들이 초청되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캐스트도 중요한 사람이 오게 된다. 개막작이 '가면무도회'였는데, 이탈리아가 현재 경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만들어진 오페라를 다시 돌려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한 '가면무도회'는 새로 프로덕션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들였고, 세계적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가 화려한 캐스팅을 동원해 진행했다.

그래서 동양인 캐스팅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는 DVD 촬영 작품은 가장 첫 회 상연한 것을 제작하게 된다. 지난 9월, 한국에서 상영한 것과 다르게 유럽에선 생중계가 진행됐다. 또한, 가까운 일본에서도 녹화 방송이 됐고 그걸 일본 친구들이 연락해줘서 소식을 듣기도 했다.

공연 중 처음으로 말까지 탔다.
ㄴ 기수가 끌고 들어와 주는 것이어서 승마 연습은 따로 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할 정도로 하는 장면은 전문 기수가 했고, 말 타고 입장해서 한 바퀴 정도 도는 역할만 했다. 말 타는 데는 크게 무섭지 않았다. 그 말들은 아주 똑똑하다. 매해 공연하는 말이어서 그런지 이미 훈련이 잘되어있었다. 그 말들도 연기하는 말들인데, 인사를 했다. '아이다'를 보면 '개선행진곡'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왕'이 좌석에 앉아있고, '라다메스' 장군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기다리게 된다. 말들을 탄 기마병이 쭉 들어와 무대 앞에서 네다섯 마리의 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엄청나게 나온다.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갈라 콘서트를 했다.
ㄴ 쉽게 이야기하면 시골 할머니도 알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고, 인지도가 있는 분이다. 처음 볼 때 무슨 연예인을 보고 대통령을 보는듯했다. 마음이 떨렸다. 같이 노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유명하시지만, 겸손하다고 느꼈다. 우리가 스타 디바라고 하면 그들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 힘들어 보이겠지만, 플라시도 도밍고는 소탈하시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다 귀를 기울여 주시는 모습이 있었다. 너그러움이 가장 큰 첫인상이었다. 그런 인자함과 겸손함이 노래에 묻어나왔다. 나에게 좋은 빛깔을 가지고 있다며 좋은 평가를 해주셨지만, 세상엔 너무나 목소리가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의 자세, 태도, 성격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지난해 7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최승필이 플라시도 도밍고와 갈라 콘서트 협연을 펼쳤다. ⓒ 유튜브 siepi2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과 오찬을 했다. 어떤 이유였었나?

ㄴ 올해 열린 밀라노 엑스포와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정상회담 때문에 밀라노를 방문하셨다. 당시 나는 토리노 왕립 극장에서 오페라 '오텔로'를 공연하고 있었다. 토리노 왕립 극장은 푸치니 오페라의 초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한국 베이스가 뜻깊은 무대를 하니 구경하라고 공연 당시 대사님과 영사님을 초청했었다. 그래서 공연 후 이탈리아 지역 대표 한인 중 유명한 사람으로 저를 오찬 자리에 영사관 초청으로 불러주셨는데, 몇 번 고사했다. 그런 성공한 사람도 아니었고, 공연도 겹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와주셨으면 하는 마음과 한 나라의 대표자로 외국에 오셨을 때 환영도 해드리고 박수 쳐 드리고 어 가게 됐다. 오전에 토리노에서 차를 몰고 출발해 오찬 참석 후 바로 그날 공연을 위해 토리노로 이동했다. 토리노에서 밀라노까지 엄청나게 먼 거리는 아닌데, 공연하기 전에 보통 성악가들은 여행하지 않는다. 컨디션 조절 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좋은 자리에 가서 부족하지만 환영해 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공연도 무사히 잘 마무리했다.

그 외에 이탈리아 여러 유서 깊은 극장에서 공연했다. 기억나는 곳이 있다면?
ㄴ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이 있다. 나폴리는 예전에 왕국이었는데, 왕국이 있었을 때 유럽에서 흔히 알고 있는 오페라의 시초가 되는 극장이 이곳이다. 유럽에서 손꼽히는 극장 중 하나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도니체티, 벨리니 등 악보에서만 보는 작곡가들이 실제로 당시 젊은 나이에 일했던 곳이다.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뜻깊은 곳으로, 나폴리 악파(Scuola Napoletana)들이 활동했던 극장이었다. 지난해 초 여기서 오페라 '오텔로'를 했다.

또한, 푸치니 생가가 있는 토레 델 라고 푸치니에 있는 자코모 푸치니 대 야외극장이 있다. 푸치니의 생가가 있던 곳이어서 매회 여름에 자코포 푸치니 오페라 페스티벌을 하는데, 약 80년 역사의 전통이 있는 곳이다. 푸치니 생가를 박물관처럼 꾸며놨고, 호수 옆에 야외극장을 만들었다. 4,000석 규모로 푸치 오페라만을 한다. 나는 '라보엠'에서 젊은 철학가 '콜리네', 다니엘 오렌이 지휘한 '투란도트'의 '티무르', '쟈니 스키키', '마담 버터플라이', '토스카'의 '안젤로티'를 맡았다.

   
▲ ⓒ 최승필

유럽에선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국내 활동은 하지 않아 오페라 팬들의 인지도가 적은 상황이다.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ㄴ 유럽에서 활동하다 보니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여기에 국내 무대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외국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후진 양성도 하시고, 각계각층에서 일하시는 덕분에 우리나라 연주문화가 많이 발전됐다. 이런 역량 있는 분들과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현재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 쪽 활동 계획도 앞으로 갖고 있다.

유학하고자 하는 젊은 성악가 지망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콩쿠르는 우리나라에서 무언가 잘못 인식이 되어있는 것 같다. 콩쿠르는 무대를 직행하기 위한 등용문이 아니다. 제일 큰 '피크'를 찍었다고 하는데, 많은 유럽인의 인식은 콩쿠르는 젊은 영재 아티스트를 발굴해 일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다. 물론 콩쿠르 우승을 하는 것도 힘든 별 따기지만, 그게 모든 목표인 것처럼 보도가 된다.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그 친구들이 세계적인 극장에 서고 노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외국에서 활동하는 것은 노래만 잘하거나,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국 영화를 예를 들면,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는가? 오페라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배역과 오페라에 있는 역사적 상황, 문화 등 모든 것이 종합 예술적으로 드러난다. 연출가와 지휘자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유학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조언을 구하면 항상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본적으로 노래에 대한 공부는 해야 하지만, 언어와 문화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그걸 표현한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단순히 아리아, 노래 하나가 아니라 오페라 전체 스코어를 공부해야 한다. 또한, 현지인 친구들과 많이 사귀어야 한다. 외국에 유학 가서 왜 한국 사람들끼리 가서 만나는가? 현지인 친구와 생활하지 않으면 그것은 반쪽짜리 유학이다. 유학 생활 중 그런 모든 것들을 각오해야 한다. 

   
 

앞으로 후학 양성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ㄴ 무거운 음악을 매번 하면 데미지가 오게 된다. 그것을 잘 코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재능을 가진 학생들에게 앞으로 100년을 생각하게 해줘야 한다. 유럽 성악가가 장수하고 건강한 이유는 적정한 시기에 노래를 시작하고 잘 코치해주는 선생님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왕성한 활동을 시작할 나이다. 이제 겨우 베이스 파트는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다. 운이 좋아서 8년 정도 일을 했고, 2~3년 동안 집중적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요즘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과정을 겪어보고 활동한 사람이 어린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다. 그들이 조금 덜 고생할 수 있고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하므로, 누군가 코치해준다면 더 많은 학생이 반짝 한 번 하고 마는 길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할 수 있다. 워낙 유럽이 오페라의 본고장이고 진입 장벽이 높지만 나는 해냈다. 실력이 뛰어나다면 그걸 들어갈 문은 반드시 있다. 나 역시 연고도 없고, 이른바 '빽'도 없지만 오로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예전엔 후진 양성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이젠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을 보면 20년 동안의 내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들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고생을 하느냐고 느껴지는데, 이런 친구들을 보며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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