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4.10
캐스팅: 이동하, 김바다, 송희정, 오대석, 김보나, 이원준, 이서현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좌석: 8열 중앙

거짓을 가리던 하얀 커튼이 걷히고, 적나라한 진실이 비치는 거울이 드러난다. 먼지 쌓인 거울 안에 희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아름다운 한 마리 나비, 마담 버터플라이. 나비가 동경한 낯선 땅에는 과연 그가 그토록 바라던 천국이 있었을까? 눈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한 채 왜곡된 거짓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나비의 길고 긴 여행이 시작된다.

외교관이 되어 중국 땅을 밟게 된 프랑스인, 르네 갈리마르. 우연히 보게 된 오페라 공연, ’마담 버터플라이‘에서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다 목숨을 끊는 중국 여성의 모습을 보고 그에 완전히 매료된다. 그 여성을 연기한 배우, 송 릴링은 자신을 향한 관심을 드러내는 그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송이 보여주는 매혹적인 환상에 완전히 빠진 르네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행복에 젖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곧 상상치도 못한 끔찍한 불행을 마주하게 되는데… 환상 속 나비를 연기한 건 둘 중 누구였을까?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프랑스 영사관 직원과 중국 경극 배우의 국가 기밀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혁명과 전쟁, 편견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작품인 만큼 인물들이 겪는 역사적 사건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동반된다면 극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폭 넓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관람 전에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라도 읽어보는 것을 권하나, 이를 모르더라도 작품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사견을 전한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격돌이 일어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중국 사회는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했다. 자유와 사랑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이 삭막한 사회에서, 특히 사회문화적으로 외부의 것에 대해 격한 거부반응을 드러내던 중국에서 르네는 송에게 겁도 없이 다가간다. 송과 있는 것이 발각되어 고초를 겪는 것보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더 괴로웠기 때문이리라. 

당시 동양은 서양에 비해 발전이 더딘 상태였다. 안정되지 못한 정치, 경제적 상황과 정비되지 않은 도시의 모습은 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동양을 열등한 지역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이는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해 가지는 편견, 오해, 동양보다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념 등을 통칭하는 용어로, 과거 서양에는 이러한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르네의 시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순종적이고 유약한 동양인 여성, 서양인 남성이라면 앞뒤 볼 것 없이 반기는 쉬운 여자. 그것이 그가 마음속 깊숙이 품고 있던 동양 여자에 대한, 어쩌면 송에 대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철학적 배경 안에서 르네는 저 나름의 진심을 다해 송과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위험을 무릅쓰고 매일같이 그녀의 문을 두드리고, 함께 춤을 추고 교감을 나누며 너무나도 평범한 연인의 일상을 보냈으니 말이다. 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그녀가 그가 꿈꾸던 ‘동양 여성’의 모습으로 존재했을 때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르네는 자신 앞에 조신히 꿇어앉은 정숙한 동양 여자와 있을 때 누구보다 우월한 수컷의 모습으로 군림한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엠. 버터플라이', 환상을 흠모한 나비의 처절한 날갯짓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엠. 버터플라이', 환상을 흠모한 나비의 처절한 날갯짓

 

그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송이 그가 정한 환상의 틀을 벗어나면서부터였다. 모종의 비밀이 밝혀지는 후반부, 르네는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며 오직 환상 속 나비의 뒷모습만을 쫓는다. 나풀나풀 여린 날개를 팔락이며 꽃밭 위를 날아다니던 고운 나비의 모습, 그것이 그에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애정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리라. 지독한 편견이 만들어 낸 환상의 그림자는 그를 파멸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암흑이었다.

꿈꾸던 환상의 소용돌이 앞에 선 르네의 모습은 자결을 목전에 둔 자의 비장함과 처음 회전목마를 마주한 아이의 설렘이 동시에 느껴지는 듯한 아이러니를 빚어낸다. 그 환상의 문에는 아마 이렇게 적혀있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마침내 행복한 지옥에 발을 디딘 이의 미소는 아름답다. 마치 그가 사랑했던 어느 동양인 여인의 몸짓처럼.

르네의 사랑은 그의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낯선 땅의 낯선 여인을 향한 막연한 동경이었을까. 둘 중 어느 것이었든 그가 맞이한 절망적인 결말은 씁쓸한 뒤끝을 남긴다. 송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 그의 인생은 사랑에 완전히 메여버렸다. 나비의 날개가 거미줄에 걸려버린 것처럼 그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에 묶여 자유도, 안락함도 내던져야 했지만, 그는 그 순간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가슴 쓰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그가 인생을 바쳐 지켜온 사랑이 결국 후, 하고 불면 사라질 솜사탕처럼 겉보기로만 아름다운 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룰 수 없는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 그것뿐이었을지 모른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엠. 버터플라이', 환상을 흠모한 나비의 처절한 날갯짓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엠. 버터플라이', 환상을 흠모한 나비의 처절한 날갯짓

 

르네 갈리마르 역의 이동하 배우는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남자의 환희를 완벽히 담아낸다. 섬세하면서도 원초적인 움직임으로 인물을 연기하며 ‘르네’라는 인물을 그만의 색채로 서서히 물들여가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송 릴링 역의 김바다 배우는 특유의 반항적인 분위기와 부드러운 이미지를 절묘하게 엮어 송이 가진 냉정한 민족주의자적 면모와 인간적인 면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두 배우의 연기는 관객들이 조금은 생소하게 느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특별한 인물들의 모습을 무대에 생생하게 재현한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행하는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나비의 사랑 이야기이다. 나비가 이끄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사랑이 얼마나 고독하고 또 황홀한 것인지, 사랑의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거대한 허무 속으로 빠져드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될 것이다. 놀라운 실화와 비현실적인 동화, 진실과 거짓, 실재와 허상을 바느질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5월 12일까지 공연된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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