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4.03
캐스팅: 차지연, 노윤, 최재웅, 유주혜 외
장소: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좌석: 4열 중앙

[리뷰] 뮤지컬 '파과', 검게 짓물러진 과일의 지독한 단내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빛 아래 상할대로 상해 썩어 문드러진 과일의 모습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손마디의 약한 힘만으로도 으스러질 것 같이 짓무른 과일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풍긴다. 저도 아직 쓸만한 과일이라는 듯 발악하며 내뿜는 들큰한 단내와 뭉그러진 살점의 썩은 내가 어우러져 마치 저 하수구 밑바닥에 코를 들이민 것 같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불쾌한 그 악취 주변에는 인생의 밑바닥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사정없이 모여들어 지옥 같은 풍경을 만든다. 죽음과 복수, 상실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들의 달콤한 누아르가 어둠이 짙게 깔린 무대 위에 펼쳐진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살인청부업자 조각. 온 몸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것을 체감하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이전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상처를 입은 자신을 도와준 한 사람을 보며 잊고 있던 감정과 기억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런 그녀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오래 전 그녀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지독한 복수를 꿈꾸던 소년, 투우였다. 오직 그녀의 목숨을 거두는 날만을 기다려 온 소년은 한껏 낡아버린 암살자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데... 서로에게 칼을 겨눈 조각과 투우의 만남은 어떤 끝을 맺게 될까.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파과', 검게 짓물러진 과일의 지독한 단내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파과', 검게 짓물러진 과일의 지독한 단내

 

뮤지컬 '파과'는 구병모 작가의 동명의 장편 소설, '파과'를 원작으로 제작된 창작 뮤지컬이다. 제작사 PAGE1에서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뮤지컬 무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소재와 파격적인 연출, 화려한 출연진 등으로 큰 기대를 모은 '파과'는 지난 3월 15일부터 무대에 올라 많은 관객들의 선택을 받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다. 웰메이드 소설로 손꼽히는 원작과 뛰어난 연출진의 만남이 뮤지컬 무대에서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지 매우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람 전에 가졌던 기대와 궁금증을 충분히 채워준 작품이었다.

삶의 끝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다른 살인청부업자가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선명히 기억하는 그녀 자신의 어린 시절은 아픔 속에도 행복이 있었던, 꽤나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 버림받았지만 새로이 마음을 맡길 곳을 찾았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그게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것일지언정 그녀에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다른 이의 목숨을 빌어 숨을 쉬는 자, 그것이 ‘조각’이었다.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그녀의 시간은 섬뜩하게 끈적이는 비극의 한 장면 같기도, 눈부시게 매혹적인 희극의 하이라이트 같기도 하다. 조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담히 바라본다. 지나온 삶을 훑는 눈빛에는 어떤 후회도,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흘러가 버린 인생에 한 줄의 부연 설명도 붙이지 않는다.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은 표적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보다도 냉철하고 날카롭다. 

아버지의 남은 삶을 으스러뜨리고 떠난 잔인한 살인자, 그녀의 뒷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 아이는 어느덧 자라 어른이 되었다. 한순간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년은 그것들이 떠난 빈자리에 단 한 가지를 꾹꾹 욱여넣는다. 복수, 그 한 가지만이 투우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삶이 끝난 것처럼 괴롭던 그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열정적으로 남은 삶을 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살린 그 사람을 찾으리라, 찾아서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리라. 차갑게 식어가는 몸뚱이 앞에서 어깨를 떨던 소년은 그렇게 다짐한다. 

투우의 뇌리에 남은 살인자의 뒷모습, 그 기억의 조각은 기묘하게도 매혹적이다. 그가 묘사하는 조각의 모습을 그려보노라면 오랜 증오인지, 아니면 오랜 그리움인지 모를 복잡한 형태의 무엇이 나타난다. 그가 평생을 두고 쫓던 이는 붉은 피를 뒤집어쓴 악마일까, 어린 소년의 열망을 땔감 삼아 붉게 타오르던 불길일까. 그토록 미친 듯이 달려 온 이유를 어쩌면 그 자신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투우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자신을 사로잡은 붉은색, 그뿐이었을 테니 말이다. 

뮤지컬 ‘파과’가 담고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는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뭉그러진 과일‘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의 이름은 그 강렬한 두 글자만으로 모든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어딘가 묘하게 비틀린 느낌을 주는 ‘파과’의 분위기는 인물들의 서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어느 한구석이 심하게 뭉그러진 인물들의 삶은 썩어 문드러진 과일과도 같아 보인다. 굴러떨어져도 뒹구르르 잘 굴러갈 신선한 과일과는 달리, 떨어지는 순간 무른 구석이 퍽하고 터지며 순식간에 명을 다할 과일을 보는 듯하다. 이런 불안감은 작품을 보는 내내 전신을 휘감는다.

‘파과’에는 기존 뮤지컬 무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던 격한 액션 장면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단순히 움직임의 합을 맞추는 수준을 넘어선, 복잡한 구조로 꼼꼼히 설계된 액션 장면들은 마치 눈앞에 영화 한 편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새로운 시도이자 혁신적인 연출이다. 어쩌면 ’창작뮤지컬‘이라는 명함에 가장 걸맞은 작품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관람 내내 과감하고 획기적인 ’파과‘의 무대가 완성되기까지의 연출진의 고심과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이 소중한 작품을 마침내 무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동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파과’를 시작으로 보다 다양하고 독창적인 색채를 지닌 작품들이 한국 뮤지컬계에 속속들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파과', 검게 짓물러진 과일의 지독한 단내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파과', 검게 짓물러진 과일의 지독한 단내

 

무엇보다 이 수많은 액션씬을 능숙하게 소화하고, 작품에 완전히 녹아드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대부분의 뮤지컬이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파과‘는 배우들의 감정적, 체력적 소모가 굉장히 클 것 같다는 느낌을 보는 내내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들이 매분 매초 폭발하는 실력으로 크나큰 감동을 주었고, 몇몇 장면은 정말 넋을 놓고 볼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는 작품의 서사 구조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서사를 관객이 스스로 상상하며 채워가는 것 또한 뮤지컬 관람의 묘미이기는 하지만, 워낙 독보적인 세계관을 지닌 작품인 만큼 이야기를 좀 더 치밀하게 전달한다면 모든 관객이 더욱 만족스러운 관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뮤지컬 ‘파과’는 독특한 소재와 파격적인 연출, 매력적인 캐릭터로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계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과 생생한 액션이 어우러진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진수를 경험하고 싶다면 오는 5월 26일까지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파과’의 남은 여정에 함께 해보기를 권한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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