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파일 기획 : 영화광 기자의 영화외전

   
 

[문화뉴스] "센스있는 '표지판'같은 영화 번역가가 되고자 한다. 화살표만 단순하게 그려있는 표지판이면 A에서 B로 간다는 뜻은 완벽하지만 보는 사람은 재미없다. 화살표 방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동시에 센스있는 표지판을 만들고 싶었다."

2015년 한국 영화 시장에서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52%였고, 외국 영화는 48%를 차지했습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쥬라기 월드'가 500만 명 이상의 관객들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자국 영화의 시장이 5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시장이지만, 그래도 '자막'을 필요로 하는 외국 영화 역시 많은 관객이 찾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하여, 노미네이트된 작품부터 수상한 작품까지 수많은 미국 영화들이 영화 시장에 나오고 있는데요. 관객들이 외국어 영화를 더욱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번역가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그중 요즘 대세 번역가라고 불리는 황석희 번역가를 만나보았습니다.

황석희 번역가는 영어 교육과를 졸업 후 누구나 들어봄 직한 미국 드라마 '오피스', 'NCIS', '뉴스룸', '왕좌의 게임' 등을 시작으로 영상 번역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그는 덕업일치라는 명목으로 '웜바디스', '월 플라워',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인사이드 르윈', '아메리칸 허슬', '노예 12년', '다이버전트', '프란시스하', '폭스캐쳐', '아메리칸셰프', '셀마', '나의 어머니',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에브리띵 윌비 파인', '리틀보이', '멕베스' 등의 영화 작업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캐롤', '사울의 아들', '갓 오브 이집트', '오 마이 그랜파', '스포트라이트', '데드풀', '트럼보', '런던 해즈 폴른' 등의 작품들과 자막 작업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황석희 번역가는 유학파가 아니고, 서신, 계약서라는 번역의 밑 작업부터 현재의 번역가까지 스스로 올라왔다는 점에서 인상 깊습니다. 또한, 자신이 작업한 작품을 보는 관객들과 영화라는 소재로 블로그와 트위터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대세번역가 황석희를 만나보겠습니다.

▶ [문화 生] "약빤 '데드풀' 번역가가 누구냐고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었는가?

ㄴ 영화를 좋아했는데, 씨네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영화 'E.T.'도 못 본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 슬쩍 숨기도 한다.

그래도 황석희의 인생 영화가 있는가?
ㄴ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제일 좋아한다. '그랑블루'는 내게 최고다. 집이 예전에 못살았었다. 꽃동네 살다시피 했다. 중학교쯤 되면서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서 오디오를 장만하셨다.

엘피판을 중학교 때 적은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처음 샀다. 그게 그랑블루 OST였다. 처음엔 볼륨조절도 힘들었다. 볼륨을 집 떠나가게 해놓고 들었는데, 아직도 기억난다. 자다가 천장 위로 물이 떨어지는 장면의 음악이 있다. 영화도 못 보고 마냥 파란 표지가 예뻐서 샀는데, 이후 영화를 비디오 테잎 늘어질 정도로 봤고, 재개봉해서도 지겹도록 봤다.
 

   
▲ 황석희 번역가가 이야기 한 '그랑블루'의 한 장면

영상번역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ㄴ 현재까지 10년 차 번역가다. 영어 교육과를 졸업했다. 영화를 번역하려고 하기보다는 영어책을 번역하고 싶었다. 사범대면 임용고시를 많이 준비한다. 대학 시절에는 공부를 빼고 다해서 임용고시 생각이 없었다. 교생실습을 나가서도 내게는 그리 맞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안 맞아서 그만둔 거고, 솔직하게 말하면 도망친 것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2시간 자면서 공부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번역일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초보한테는 아무도 일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보니 서신, 계약서, 매뉴얼부터 아르바이트처럼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생 때부터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마감도 촉박하고 푼돈이고 힘들고 그래서 그만두려다가 이력서를 사정없이 뿌릴 때였다. 그러다 보니 영상번역 일을 주는 회사가 있어서 더욱 알아보았다. TV에 나오는 자막을 만드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TV 자막을 누가 번역하고 직업이 있는지를 인식도 못 했다. 당연히 영화 역시도. 그러다 영화를 번역하는 사람도 있지 생각했다. 처음부터 영상 쪽 영화 쪽만 번역하려던 건 아니었다. 책을 하려다 우연히 영상 번역 기회가 와서 했었다. 서신계약서보다 훨씬 재밌었고, 업으로 굳게 됐다.

번역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본인 블로그 메인에도 철학이 멋있게 적혀있다.

ㄴ 블로그에 쓴 건 멋있게 쓴 것도 있다. (웃음) 내 번역 철학은 가장 크게 잡자면, 전달을 잘하자는 것이다. 다른 건 없다. 번역가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은 별로 안 좋아한다. 번역가의 자막을 통해 영화가 살아났다는 말은 좋긴 하는데, 중요한 건 전달이다. 번역가는 전달자라고 생각한다. A 문화를 B 문화로 전달하는 가교인데 충실하고 감각 있게 전달하는 게 문제다.

자주 쓰는 말인데, '표지판'같은 존재다. 화살표만 단순하게 그려있는 표지판이면 A에서 B로 간다는 뜻은 완벽하지만 보는 사람은 재미없다. 직역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관객들이 봤을 때 화살표 방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동시에 센스있는 표지판을 만들고 싶었다. 비상구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인 것부터 예술적인 것까지 다양한데, 센스있는 번역을 하고자 한다.

   
▲ 황석희 번역가가 최근에 작업한 영화 '사울의 아들'
최근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사울의 아들'을 번역했다. 헝가리 영화여서, 영어로 된 번역본을 다시 번역하는 사례다. 이런 부분은 1차 번역하는 것과는 애로사항이 있어 보인다. '폴리스 스토리 2013'도 이렇게 2차 번역을 한 거로 알고 있다.
ㄴ 애로사항이 매우 많다. '사울의 아들'을 번역할 때는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세 개를 했다. '나의 어머니'도 그때 했다. 그나마 불어는 어순도 비슷하고 괜찮다. 이탈리아어는 파스타밖에 모른다. 헝가리어는 더 심하다. 중역이 좋지는 않다. 중역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중에 일어는 일어번역가가 하는데, 중국어나 다른 언어는 영어작가에게 준다. 전문인력이 아직 발굴이 안 된 거 같다. 그분들이 하는 게 사실 맞다. 내가 아무리 한들 해당 언어를 일차적으로 번역하는 분들만큼 이해하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게 주변에 언어 천재가 한 분 있다. 언어를 그냥 십 몇 개를 하신다. 그 형한테 물어보면 다 안다. 사울의 아들 안에는 유대어도 많이 나온다. 그것조차 형님이 아신다. 인명도 정확히 못 읽는 경우도 있는데 주변 지인한테 문의를 많이 한다.

영어 외의 것들을 작업할 때는 지인들한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런던 해즈 폴른'에서 이탈리아어가 있는데, 영어자막이 없다. 이탈리아 전공 친구한테 이 부분만 잘라서 물어봤다. 그런 식으로 듣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역을 찬성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손해 본다.

외국 영화를 관객들이 봤을 때, 가져야 할 관람 태도가 있다면?

ㄴ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이해하는 건데 외국어 실력은 관객마다 편차가 있다. 번역작가가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완전 십구 금에 이런 영화는 중등 이상의 영어 실력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하는 때도 있다. 어떤 부분은 의역이 상당히 필요한 때도 있다.

얼토당토않으면 안 되겠지만, 완전 직역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과도한 의역은 번역작가가 욕심을 내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하면 멋있겠지? 웃기겠지? 욕심이 나서 잘못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구어를 의역으로 부드럽게 번역하려는 부분에서 관객들이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번역하기 힘든 단어나 표현이 있을 것이다. 우리말로 '한'을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것처럼.
ㄴ '한'은 'Korean Panic Attack'이라고 하는데, 어감이 다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You'가 대표적이다. 제일 짜증 난다. 나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안 쓴다. 호칭을 쓴다. 직장이라면 'You;가 나오면 과장님, 팀장님 혹은 자네 등을 하는데 여기선 누가 봐도 당신이 어색한데 당신 말고 없을 때 당신을 쓴다. 한글로 하기 힘든 언어는 엄청나게 많다.

'Hey'도 힘들다. 외국 애들은 만나면 헤이다. 굿나잇도 힘들다. 그대로 굿나잇으로 쓰시는 분도 있는데, 굿모닝을 써도 굿나잇을 쓸 일은 거의 없다. 퇴근하면서 굿나잇하는 경우가 있는데, 들어갑니다, 들어가세요, 쉬세요 등으로 바꿔쓰는데, 그런 간단한 것도 짜증 나는 것이 많다.

번역가가 보통 SNS로 소통하는 경우가 드물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까지 다양한 루트로 소통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SNS 소통을 하게 됐는가?

ㄴ 한국에서 영화 번역하시는 분 중에 제가 제일 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는 번역계의 루키다. 실력은 안 되니까 실력으로 따졌을 때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번역가라고 할 수 없지만, '관객과는 가장 가까운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다. 틀린 번역을 지적해주시면 저는 사과 또한 잘한다. "제가 틀렸네요." 할 수도 있고, 자막 A/S도 해주고, 영화 관련 이야기들도 관객들과 많이 하려 한다.

영화번역이라는 게 직업을 떠나서 삶이다. 직업을 떠나서도 삶 속 덕업일치 부분인데, 제 삶 속에서 나이 들어갔을 때 "캐롤이 어쩌네, 데드풀이 어쩌네" 서로 SNS로 장난하고 이야기하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겁은 난다.

사실 노출 받으면 상처 입기 쉽다. 다수를 상대하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데, 대범하게 그걸 대처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관객들의 피드백이 큰 영화를 한다면 지금과는 정말 다르게 들어올 것이다. 번역을 유난히 잘해서 좋아하시는 건 아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실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욕을 덜 하시는 이유는 작품이 적기 때문이다. 번역 작품이 늘어나면 그만큼 실수도 많이 쌓여갈 것이다.

그것에 대해 사람이다 보니 숨기고 싶은 것도 있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도 있을 것이다. "이거 틀렸는데요" 하면 "아니요"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절 싫어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아직 초반이라 활발하게 하는데,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 전까지 마음을 대범하게 먹을 필요도 있다.

   
 
어쨌든 실수는 쌓일 것이다.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줄이는 게 중요하지, 원천봉쇄는 불가능하다. 관객들과 사이가 돈독해서 실수가 있어도 "가서 따져야지"하는 정도면 좋겠다. 따지면 사과드리고 "다음 작품에선 주의하겠습니다"하고 싶다. 실수를 계속하면 나쁜 번역가겠지만, 주의하고 일 못 하게 될 때까지 영화 이야기를 펑펑하면서 잘 놀고 싶다. "번역이 되게 좋았다"라고 트위터에 쓱 댓글 달 때가 있다.

번역이 "개구려" 하면 "죄송합니다. 번역가예요"라고 나 역시 쓱 댓글 달기도 한다. 욕을 쓴 거에 다음엔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심하게 하신 분들도 죄송하다고 하신 분들도 있다. 다가서는 과정은 재밌는 것 같다.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영화로 소통하는 것이 재미나다.

번역가는 단순히 영어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국어도 잘해야 한다. 혹시 이런 언어 공부의 비법이 있다면?

ㄴ 그런 건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어디서 영어 잘한다는 말이 창피하고 그렇다. 나 역시 취업 못 해서 번역하고 있다. 번역을 잘하는 비법을 가르쳐드리기에는 제 실력이 보잘것없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있다. "읽고 쓰는 것이다." 그게 블로그 포스팅이 됐건, SNS가 됐건, 자신의 일기가 됐건 많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 많이 쓰고 많이 읽어야 한다. 좋은 책들도 많다.

좋아하는 책만 죽으라고 몇 번씩 보는 타입이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이 많은데 걸리버여행기만 10번씩 읽으니 개수는 늘지 않는다. 정말 많이 읽어야 한다. 기사, 책, 인터넷 글,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안 되는 것만 안되면 다 보시고 사람마다 쓰는 용어, 표현 자체가 다르니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용사를 쓸 수 있지 하는 것도 있는데 그런 걸 기록했으면 좋겠다. 최대한 텍스트를 많이 습득했으면 좋겠다. 그게 도움이 될 것 같다.
 
   
▲ 지난 2월 27일 번역가로는 이례적으로 황석희 번역가의 '데드풀' 관객과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 올댓시네마
본인 SNS 메시지로 한 중학생이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질문을 남겼다고 들었다. 이 중학생 혹은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ㄴ 난감하네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많은 분이 알아주는 번역가는 아닌데, 아직은 보잘것없어서 크게 드릴 말씀은 없다. 어제 트위터로 그런 디엠을 받았다. 이제 20살이 된 대학생이다. 돈도 없고, 학벌도 별로고 그렇지만, 영화번역가가 되고 싶다. 비슷한 질문을 많이 한다. 이 직업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직업이다. 한국에서 영화번역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 다섯 명이 안된다. 전국 오등. 굉장히 어렵고 운도 따라야 하고, 기회도 따라야 한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다. 딱히 무슨 큰 학벌이 없어도, 언어 천재가 아니라도, 유학경험이 없어도. 저는 유학경험이 없다. 학벌도 크게 내세울 수 있는 학벌이 아니다. 지방대를 나왔다. 인맥도 없다. 한국에 있는 영화번역가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했고, 십 년간 차근차근 올라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맨몸으로 내 손으로 올라왔다. 내 가장 큰 프라이드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오고 나면 인맥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 인맥이 영원하지 않다. 이런 걸 탓하지 말고, 인맥이나 학벌 때문에 못하는 직업이다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 반례다. 저는 공부를 못했다. 유학이나 영어를 배울 만큼 돈이 많지도 가난하지 않다. 나도 했으니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좋은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환경에 구애받지 마시고, 이런 것들은 충분히 만들어갈 수 있다. 나중에 좋은 번역가가 돼서 봤으면 좋겠다.
 

[글] 문화뉴스 김진영 기자 cindy@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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