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단절되어버린 70년 전 우리 이웃들의 실존했던 최초의 기억을 찾아간다.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김영수 작, 윤광진 연출의 '혈맥'을 20일부터 5월 1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선보인다. 한국 근대 리얼리즘극의 백미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사실주의 희곡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김영수 작가의 대표작이다.

1947년 광복 직후 성북동 방공호 주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심각한 빈궁에 시달렸던 우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낸 이 작품은 가정의 달 5월, 우리가 잊었던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전한다. 방공호 구덩이를 집 삼아 살아가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자식이 영어를 익혀 미군 부대에 취직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일견 닮았다.
 

   
▲ ⓒ 국립극단

작품 발표 후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짙은 감동을 안겨줄 이번 무대는 '황금용', '리어왕' 등 원작에 관한 치열한 탐구와 군더더기 없이 텍스트에 충실한 연출로 주목받아온 윤광진 연출이 맡아 기대를 더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 끈질긴 삶의 의지를 담아낸 이번 '혈맥'을 통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윤광진 연출은 이번 작품 '혈맥'에 대해 "우리가 잊어버린, 사라진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작품"으로, "과거를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70여 년 전 이 땅 위에 분명 실존했으나 사라져버린 우리 가족과 이웃에 대한 기억을 담은 '혈맥'은 그 시대가 오늘날 무대 위에 등장한다는 자체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땜쟁이, 담배행상, 고등룸펜, 구루마꾼 등 다양한 직업군들은 작품 속에서 생동감 있게 무대화되고, 사실적인 소품은 작품을 보는 재미를 더한다. 한 시대의 종막과 새 시대의 도래가 한데 뒤엉켜 있던 과도기의 가난하고 부박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던 우리 이웃의 모습은 각박한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감동을 전한다.

한국 근현대극을 꽃피운 리얼리즘 희곡 중에서는 극의 서사와 등장인물의 성격화, 언어 선택 등의 측면에서 탄탄한 작품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김영수는 일본 유학 당시 러시아와 아일랜드 등 서구 연극의 영향을 받아, 시대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우리 근현대극에 한 획을 그었다. '혈맥' 역시 객관적인 관점에서 세 가족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관찰하여 기술한 형태로 진행된다.
 

   
▲ ⓒ 국립극단

김영수 특유의 관찰력이 엿보이는 이 작품은 당시 서울 변두리 서민층의 복합적인 심리와 일그러진 삶의 내면, 여러 가치관이 혼재한 과도기의 사회상을 보여줌으로써 민족의 좌절과 희망을 진솔하게 그려낸 사실주의극의 대표작이다.

김영수가 창단한 극단 신청년의 박진 연출에 의해 1948년 초연된 '혈맥'은 당시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작품상, 희곡상, 연출상 등 5관왕을 차지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 1963년에는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제 회 대종상과 제1회 청룡영화상을 휩쓸기도 했다. 동시대 서민층에 대한 집요한 응시로 현재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김영수의 '혈맥'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윤광진 연출은 이번 '혈맥'에 대해 "우리가 잊어버린, 사라진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작품"이라고 전했다. 원작 희곡 속 맛깔 나는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해 우리말의 정겨움을 살려낸 한편, 내레이터를 전면에 배치하여 동작을 지시하는 지문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사화했다. 특히 내레이터의 등장은 작품을 극중극 형태로 만들어 무대 위 1947년이라는 과거와 객석의 2016년 현재를 대면하도록 한 그만의 과감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 윤광진 '혈맥' 연출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번 무대엔 대한민국 연극계를 든든하게 받쳐 온 실력파 배우들이 함께한다. 지난해 '리어왕'에서 광기 어린 연기로 명동예술극장을 사로잡은 장두이가 무뚝뚝하면서도 속정 깊은 깡통 영감을 선보인다. 또한, 2015년 국립극단 최대 화제작이었던 '시련 The Crucible'에서 '댄포스' 부지사 역을 맡아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인 이호성이 '털보 영감' 역에 캐스팅되어, 척박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림자 아이', '세자매'에서 호연을 선보인 배우 황연희는 미스터리함을 가진 '청진계집'과 '내레이터' 역을 동시에 맡아 무대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힌다. 탄탄한 연기력의 원로배우들과 활력 넘치는 젊은 배우들이 만난 이번 무대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의 가족애를 잔잔한 감동과 함께 담아낸다.

이번 '혈맥'의 무대는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파격적인 무대 디자인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이태섭 무대디자이너가 맡아 최고 3.5m 높이의 경사로를 이용해 방공호를 표현주의적으로 그려낸다. '황금용'에서 윤광진 연출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음악디자인의 미스미 신이치는 배우 한 명 한 명과의 인터뷰를 거쳐 등장인물 각각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음악을 선사한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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