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승일을 기억하고 부패정치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날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시실

[문화뉴스 MHN 이솔 기자] 동학, 우리나라의 근대 시절의 하나의 종교이다. 한국사 등의 역사 과목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이 '동학'은 과연 무엇이고, 대한민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서양의 문물인 '서학'에 대비한 이름인 '동학'은 이황과 이이 등 잘 알려진 '이기론'과 관련된 기일원론과 후천개벽 사상, 인내천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최제우라는 사람은 몰락 양반의 집안으로, 13세에 혼인하고 5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하나의 가정을 꾸리던 최제우는 이 시기 국내 정세가 혼란한 원인을 찾기 위해 이름을 '제우'로 개명한 뒤 여러 수련을 거쳤다.

그러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는데, 하느님(천주)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일제와 청의 내정간섭과 더블어 내부적으로는 여러 탐관오리 등에 시달린 1800년대 후반의 조선은 더욱더 농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였다. 따라서 수도권과 먼 지방에서 많은 반발들을 낳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세와 맞서 싸움과 동시에 농민의 권리를 주장한 최제우의 도교는 금세 많은 이들을 포교하기 시작한다.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정부에서 해당 종교를 불법으로 간주했으며 11월 20일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창시 후 4년 뒤인 1884년 최제우는 순교하고, 정부의 탄압에도 그의 2대 제자인 '최시형'이 동학을 계속 포교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동학을 정식 종교로 인정해달라는 '교조신원운동' 또한 일어나기도 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백과

이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 및 폭정 등이 원인이 되어 '동학 농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걷어오라고 요구했는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그동안 쌓인 불만과 이번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운동)가 일어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봉준은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조선의 내, 외부적으로 모두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도교에 흡수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고자 농민 봉기(운동)를 결심하게 된다. 

농민운동은 고부 민란 이후 1894년 3월 하순 처음 진행되었으며 이후 청나라와 왜군이 개입할 조짐을 보이자 5월 7일 일시 화약을 맺는다. 이때의 '폐정 개혁안'은 동학의 인정, '왜'와 교역 파기, 노비의 해방 등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12개의 항목으로 구성된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월 7일 화약 이후에도 개혁안이 정상적으로 실행되지 않자,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 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입한 왜군에 의해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게 되며, 전봉준 등의 지도층이 처형당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는다.

5월 11일은 황토현 전승일로, 이름처럼 황토현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주권과 농민들을 지키려던 동학농민운동, 그들의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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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은 누구? 5월 11일은 '동학농민운동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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