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창작춤에게···예술은 이야기, 우리는 허구에 열광한다 

깜빡 깜빡, 파아란 반딧불이가 어두운 허공을 날아간다. 요기서 깜 그 옆에서 빡, 잠시 후 조기서 깜 그 옆에서 빡. 깜은 빛이 켜지는 현상, 빡은 꺼지는 현상이다.

뽕나무 밑에서 새로운 빛이 나타나 함께 어울린다.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의 유희가 펼쳐진다. 깜빡깜 빡깜 빡깜 어두운 캔버스에 나타나는 깜과 빡의 그래프로 녀석들의 춤을 본다. 사랑의 이중주다.

‘도깨비불이에요?’

도시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녀석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 추락하던 나는 두 팔을 벌려 양력을 만들어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았다. 이상하다? 새벽인데도 해가 중천에 있다. 나는 백사장에 안착했다. 사람들이 갈채를 보낸다.

꿈은 비현실적이다. 낯설고 모호하다. 그러나 분명 꿈은 존재한다. 며칠 전 나는 딱정벌레가 되었다. 내가 왜 딱정벌레란 말인가? 어째 이런 불합리한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꿈은 낯설지만 우리의 일상이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어젯밤에는 빈 물레를 돌리고 있는 요술쟁이를 보지 않았던가. 일탈이다. 일탈에서 창작이 이루어진다.

‘사람은 저마다 별이 있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밤하늘 이야기가 할머니에게서 아기에게로 이어졌다. 별똥별이 쉭! 하고 떨어진다. 별똥별은 잠시 움직이고 사라지는 빛이다. 소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쉭!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 누가 세상을 떠났구나.’ 불합리다. 유성이 지는 일이 어찌 누가 세상을 떠난 것이란 말인가? 허구다. 허구에 의해 별이 지는 순간이 슬픔을 머금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밤하늘에서 할머니를 본다. ‘사람은 저마다 별이 있단다’ 곁의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별똥별의 순간은 소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영속성을 얻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파아란 불빛을 춤이라고 했다. 새로운 불빛이 더해지자 유희라고 했다. 사랑의 이중주라고도 했다. 이를 두고 도시에서 온 아이는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단지 반딧불이가 아니던가? 어둠 속 반짝인 불빛이 어떻게 춤이고 유희인가? 더구나 도깨비불이라니. 사진은 우리 반도 최남단 무인도에서 진도 팽목항의 등대를 찍은 것이다. 당신은 저 불빛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는가?

소리와 빛은 닮은 점이 많다. 물리적 파동에서도 유사하다. 춤과 음악 역시 닮은 점이 많다. 우리는 반딧불이의 이동을 ‘깜빡’이라는 의태어로 표현한다. 별똥별의 순간이 쉭! 소리를 동반한다. 빛이 소리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움직임의 소리다. 이미지의 흐름이다. 춤과 음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태생적으로 같다. 그 본질은 하나다.

음악은 귀로 듣는 춤이고, 춤은 눈으로 보는 음악이다. 여기에 이야기가 배이면 예술이 된다. 예술은 이야기다. 허구의 이야기다. 별똥별은 슬픔이기도 하고 할머니 이미지를 통해 영속성을 얻기도 하고 반딧불이가 도깨비불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하고 사랑의 이중주라는 동경이 되기도 한다. 

허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창작이다. 창작은 꿈을 꾸는 일이다. 낯선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일탈이다. 피카소의 이야기는 화가 나면서 어지럽다. 백남준의 이야기는 웃긴다. 세익스피어와 톨스토이 이야기도 좋다. 이태백에 이르러 웃음과 눈물이 작열한다. 스트라빈스키도 피나 바우쉬도 자기 이야기를 했다. 박시춘과 방탄소년단도 … 우리는 그 허구에 열광한다. 

김진묵/음악평론가
김진묵/음악평론가

글 : 김 진 묵(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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