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문학의 대가, 얄바츄 우랄
자연과 인간, 문명과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을 길고양이의 시선과 각도로 담아낸 이야기

사진 = 책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 왼쪽 원서, 오른쪽 번역서
사진 = 책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 왼쪽 원서, 오른쪽 번역서

[문화뉴스 강경민 칼럼니스트] 카잔연방대학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019년, 우연한 기회로 출판사 '책공장더불어' 김보경 대표님과 함께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문학가 얄바츄 우랄(Yalvaç Ural) 선생님의 자연을 향한 어른들을 위한 시집 책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원제: Mırname – Büyüklere Kedi Şiirleri)를 터키어에서 한국어로 번역 출판했다. 이 책은 글과 삽화가 어우러진 시집으로 변해가는 자연과 인간, 문명과 도시화의 명암을 길고양이의 시선과 각도에서 표현한 어른들을 위한 시집이다. 

국내에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이난아 교수님을 통해 자연과 동물을 주제로 삽화 동화책을 여러권 출판하신 튀르키예 유명 화가 페리툰 오랄(Feridun Oral) 선생님께서 삽화가로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장르로 정호승 시인이 쓰고 박항률 화백이 그린 '수선화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시집이 있다. 

얄바츄 우랄 작사님의 문학을 영광스럽게도 터키어에서 한국으로의 번역가로 참여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 여전히 이스탄불과의 인연을 문학번역가로서 이어가며 종종 작가님과 안무를 묻곤 했다. 그리고 이번 이스탄불 여행에서의 중요한 일정으로 얄바츄 우랄 선생님을 뵙는 것으로 정했다.

사진 = '찻 주전자 끄는 고양이'-'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 중에서
사진 = '찻 주전자 끄는 고양이'-'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 중에서

몇 년 전부터 문학 번역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가에 관한 번역계의 논쟁이 뜨겁다.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은 경험에 따라 축척되니 학습 경험이 쌓일수록 번역 가능한 범위 또한 확장되긴 하겠지만 문자로 그려내는 문학이란 장르를 과연 인공지능 기술로 다른 언어로 전달이 가능할까. 문학 번역은 단어뿐만 아니라 문장과 단어 그리고 단락 내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전달하며 기존의 문학을 새로운 문학으로 창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쌍방 번역이 어렵지는 않을까. 기계 번역은 작가의 세상을 투영하지 못한다. 작가님의 책을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어 대 단어 번역으로는 시문학을 번역할 수 없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에 등장하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는 적당히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살면서 때로는 말없이 먼 길을 떠나기도 하고, 상처받은 어린 어린이들의 영혼을 살펴주기도 한다. 시문학의 특성상 은유법, 직유법, 의인법, 활유 등 문학적인 특성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작가님은 왜 길고양이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 문명과 도시와 그리고 삶을 고양이에게 투영시켰을까, 번역을 하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고양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튀르키예의 고양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불리는데 작가님의 작품 속 고양이는 쓸쓸한 뒷모습을 하고 우리와 한 발자국 건너편에 서 있다. 이스탄불, 서울, 지금 살고 있는 타타르스탄의 카잔은 도시가 개발되고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을 겪고 있지만, 내가 본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은 저개발지역이든 부촌이든 어디서든지 도시에서 도시 사람들과 공존하고 공생한다. 

사진 = 책의 모델인 턱시도 고양이 마르슥
사진 = 책의 모델인 턱시도 고양이 마르슥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했다. 작가님과의 만남, 대화는 이스탄불의 작가님의 집에서 작가님의 오랜 반려묘였던 마르슥(Marsık)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했다. 

작가님의 반려 고양이 마르슥은 18년간 작가님과 함께 살다 고양이별로 떠난 스트릿 출신의 고양이다. 고양이는 스스로 자신의 집사(반려인)를 선택한다는 도시 전설(?)이 이스탄불에도 통했던지, 며칠은 못 먹었는지 뺴쩍 마른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작가님 집 마당에 나타났고, 이것에 인연이 되어 묘생을 작가님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고 작가님은 회상했다. 

튀르키예의 저널리스트이자 문학가인 얄바츄 우랄 선생님의 작품에는 유독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학 장르와 우리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한 메시지가 많다. 작가님의 인생에 등장한 이 길고양이는 작가님을 자연과 동물, 길고양이와 같은 우리 주변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인도했다. 한 마리의 작은 고양이가 한 명의 작가의 작품 세계와 세상을 표현하고 노래하는 시선을 바꿔놓았다.

환경문제가 대두되기 전부터 인간은 자연의 신비와 경의, 전쟁과 파괴에 관한 비판적인 성찰 등을 문학 세계에서 관심을 보였다. 20세기 초 제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필요에 의한 도시화가 진행됐고, 기존에 살던 동식물은 멸종하거나 또는 생태환경이 옮겨갔다. 그러나 인간과 생활권 겹치는 길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은 생태환경을 이동할 수 없었고, 인간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자연의 가치를 논하게 된 2000년대 이후가 되면 어느 나라에서는 길고양이와의 공존을 택했고, 여러 이유에서 당장의 공존이 어려운 나라에서는 길고양이가 인간 삶에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스탄불의 얄바츄 우랄 작가님은 길고양이와의 공생을 허락한 이스탄불의 보편적인 도시 문화처럼 길고양이를 거뒀다. 턱시도 고양이 마르슥이 고양이별로 여행을 떠난 후 지금은 흰색 털의 길고양이에게 집의 앞마당과 거실을 허락했다. 

사진 = 얄바츄 우랄 작가 집 마당에 사는 흰 고양이
사진 = 얄바츄 우랄 작가 집 마당에 사는 흰 고양이

그러나 작가님은 이스탄불에서 길고양이 문제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튀르키예서도 겪고 있는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2007년 이후부터 이스탄불에서는 낙후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도시정비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재개발로 쏟아져나오는 갈 곳 잃은 길고양이들과 이들에 대한 관리문제가 지금까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2017년에 개봉한 튀르키예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케디'(원제: Kedi film)에는 어촌, 시장, 주택가, 부촌 등 이스탄불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일곱 마리의 길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감독 제이다 토룬(Ceyda Torun)은 길고양이의 시선과 각도에서 이스탄불의 도시화와 쭃겨 나가는 원주민과 길고양이 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작가님은 영화 '고양이 케디'에 등장하는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탄불 내 부촌 지역 니산타쉬(Nisantaşı)에 얄바츄 아비 서점(Yalvaç Abi Kitabevi)를 운영하며 지역 내 도시화로 갈 곳 잃은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먹을 곳과 쉴 곳을 제공하고 있다. “길고양이들의 고단한 삶에 관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듬는 것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사진 = 영화 '고양이 케디' 포스터
사진 = 영화 '고양이 케디' 포스터

작가님의 반려묘 길고양이는 말 없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인간세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의 본질, 세계관, 존재와 지식, 가치와 이성, 인식, 언어와 논리 그리고 윤리를 인간을 대상으로 실체를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작가님은 고양이를 통해 작품을 통해 인간 세계의 자연에 대한 윤리, 본질, 가치 등을 탐구하게 됐으니 고양이 마르슥은 철학가임이 분명하다. 

철학에는 정답과 결론이 없다, 개개인의 논리가 개개인의 정답이다. 도시화와 길고양이 문제도 정답이 없다. 길고양이와의 공통된 공간에서 공생하는 문제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모두에게 정답이다. 

얄바츄 우랄 작가님과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였다' 작품에 대한 생각들과 번역가의 생각을 고루 나누며, 한국의 독자들에게 원문에 담긴 감정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듯하여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길 위의 고단한 삶을 말한 길고양이들의 편지를 도시화에 사는 우리가 언제까지 귀 기울일 수 있을지 몰라 책 속의 길고양이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글=강경민, 편집=최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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