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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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심리학자가 참가자를 상대로 ‘카드의 선’이라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참가자는 5명. 그들에게 카드 한 장을 보여줬다. 그 카드에는 직선으로 된 선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다른 카드를 또 보여줬다. 다른 카드에는 직선으로 된 선이 다섯 개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각기 길이가 달랐다.

참가자들에게 문제를 냈다.

[첫 번째 그려진 카드의 선과 길이가 같은 선을 두 번째 카드에서 고르시오.]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한눈에 봐도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선 중에서 ‘C'라고 적힌 선의 길이가 같았다. 그런데 다들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D'선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참가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답은 분명 ‘C’인데 왜 다들 ‘D’라고 하는지 이상했다.

‘내 눈이 어떻게 된 건가?’

처음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심했지만 다수의 선택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 참가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됐고 결국 ‘D’가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참가자들처럼 정답을 ‘D’라고 말했다.

사실은 4명의 참가자는 가짜 실험자였다. 실험 전에 오답을 말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심리학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누구나 집단의 의견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엇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일명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인데 미국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사위의 방문으로 집안이 활기가 넘쳤다.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식사 때가 되었다.

장인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애빌린에 가서 식사나 할까?”

가족 모두 다 에어컨이 없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에빌린을 향해 출발했다. 꽤 오랜 시간을 달린 끝에 애빌린에 도착했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다시 집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허비됐다.

집에 도착한 가족들은 모두 다 파김치가 됐다. 사위가 분위기 전환용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오늘 식사 참 즐거웠죠?”

그러자 갑자기 여기저기에게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즐겁긴 뭐가 즐거워? 그 먼 곳까지 가는데 죽는 줄 알았어.”

“살인적인 더위에 에어컨도 안 되고 완전 지옥과도 같았어.”

“식사도 형편없었어. 세상에 그렇게 맛없는 집은 처음이야.”

가족 모두 다 원치 않는 외식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가지 말자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카드의 선’ 실험이나 ‘애빌린의 역설’을 보면 알 수 있듯 사람들은 집단의 눈치를 본다.

왜 눈치를 보는 걸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단 내의 동료와 잘 어울리길 바라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 때문에 집단의 의견에 배치되는 걸 두려워한다. 자칫 집단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고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집단의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게 익숙해졌다. 특히,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가 힘들어진다.

일상에서도 흔히 그런 일이 일어난다.

사장과 직원들이 중화요리 집에 식사를 하러 갔다.

사장이 메뉴판을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일하느라 고생들 많지? 오늘은 내가 낼 테니까 다들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나는 짜장면!”

사장은 정말로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시킨 건데 직원들은 일종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저도 짜장면 먹겠습니다.”

“저도요.”

“역시 짜장면이 최고죠.”

눈치 빠른 임원들이 짜장면으로 통일하자 그 밑 부하직원들도 순식간에 짜장면으로 정리가 된다.

사장은 허허 웃으며 말한다.

“자네들 모두 짜장면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종종 와서 짜장면을 먹세.”

모두가 짜장면이라고 말할 때 혼자서 짬뽕이라고 말하는 게 어렵다. 더군다나 탕수육은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괜히 말했다가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찍혀 뒷담화가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다.

집단의 의견에 동조하는 게 과연 올바른 처세일까?

집단에 잘 묻어가고자 한다면 모난 돌이 되기보다 둥글한 돌이 사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런데 동조만 하다보면 자칫 자기주장이 없는 무채색 인간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누군가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을뿐더러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색깔을 갖고 살고 있는가.

‘원숭이의 시소’라는 말이 있다.

시소가 하나 있다. 한쪽에만 원숭이가 몰려 있다. 한쪽에만 있으니 당연히 반대쪽은 높이 치솟아 있다. 그 반대쪽 위에 열매가 있다. 원숭이 하나가 용기를 내어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반대쪽에 도달한 원숭이는 손을 뻗어 열매를 얻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원숭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반대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소의 무게 중심이 옮겨져 다시 아래로 기울고 말았다. 당연히 그 반대쪽이 시소가 올라갔다.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숭이 한 마리는 쑥 올라갔다. 그 원숭이도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다.

집단의 의견에 동조하는 게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늘 그런 식으로 눈치만 본다면 결코 발전할 순 없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이 옳다면 모두다 ‘Yes’라고 말할 때 당당하게 ‘No’로 말할 수 있는 용기도 때론 필요하다.

문화뉴스 / 김이율 hyunta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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