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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만 5,694명에 달하는 직장여성들이 유산 또는 사산을 경험하고 있는 가운데, 유산 또는 사산할 당시 “몸이 아파도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힌 여성 임금노동자가 10명 중 8명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여성 임금노동자에게 유해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는 이유다. 특히, 유산 또는 사산을 겪은 여성 임금노동자 70%가 임신기간 중 노동시간이나 업무량을 조절할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과로, 야간 근무 등 장시간 노동이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도 불구하고 ‘모성보호 제도’가 직장 내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傍證)이 아닐 수 없다. 임신 임금노동자를 보호하고 유산이나 사산을 겪은 여성 임금노동자의 치유와 회복을 돕는 노동환경 조성과 실효성 있는 실질적 ‘모성보호 제도’ 개선이 시급해 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31일 펴낸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 연구 : 유산·사산을 중심으로’란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최근 5년(2017〜2021년)간 유산 또는 사산을 경험한 여성 임금노동자는 32만 8,471명(2017년 74,301명, 2018년 70,621명 2019년 65,726명, 2020년 61,053명, 2021년 56,770명)으로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매년 6만 5,694명에 달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유산 또는 사산을 겪은 노동자 859명(유산 94%, 사산 6%)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임신한 임금 여성 노동자의 80.8%가 유산 또는 사산 당시 “임신으로 몸이 아팠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고 일한 적이 있다.”라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유산 또는 사산을 경험한 여성 노동자들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유산·사산 당시의 업무가 임신 유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매우 그렇다”가 9.2%, “그렇다”가 42.3%로 답해 전체의 51.5%가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특히, 장시간 노동은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현장에서는 임신기간 근로시간 단축·업무 교체 등 ‘모성보호 정책’을 활용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유산·사산 당시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는 응답자일수록 노동시간이 길었다. 유산 또는 사산을 경험한 여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8.47시간으로 나타났는데 노동시간이 길수록 관련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됐다.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라고 답한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38시간으로 가장 길었고, “그렇다”라고 답한 응답자의 경우 하루 평균 8.80시간으로 조사됐다. “그렇지 않다”라고 답변한 이들은 8.12시간,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이들의 경우 평균 7.55시간을 일했다. 특히,‘유산·사산이 업무와 연관성이 있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라고 밝힌 응답자들도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9.42시간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업무와 유산 또는 사산 간 관련성을 인정한 응답자들의 노동시간은 약 9시간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들보다 1시간 정도 더 많았다. 이들 중 70%가 하루 8시간 이상 일했고, 54%는 휴일 근무까지 경험했다. 게다가 70% 넘는 이들이 회사 근로시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고 응답했다.

한편 법이 보장하는 ‘모성보호 제도’를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가 시행 중이지만 응답자 72.1%가 유산·사산 당시 ‘회사의 근로시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근로기준법」 제70조(야간근로와 휴일근로의 제한) 제2항에서 “사용자는 임산부와 18세 미만자를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시간 및 휴일에 근로시키지 못한다. 다만, 임신 중의 여성이 명시적으로 청구하는 경우로서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74조(임산부의 보호) 제1항에서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에게 출산 전과 출산 후를 통하여 90일(한 번에 둘 이상 자녀를 임신한 경우에는 120일)의 출산 전후 휴가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휴가 기간의 배정은 출산 후에 45일(한 번에 둘 이상 자녀를 임신한 경우에는 60일) 이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제5항에서는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 근로자에게 시간외근로를 하게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그 근로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쉬운 종류의 근로로 전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7항에서는 “사용자는 임신 후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에 있는 여성 근로자가 1일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하는 경우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 다만, 1일 근로시간이 8시간 미만인 근로자에 대하여는 1일 근로시간이 6시간이 되도록 근로시간 단축을 허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모성보호 제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업무가 유·사산과 연관성이 있다’에 “매우 그렇다”라고 답한 여성 노동자 중 50.9%는 연장근무를 “자주” 혹은 “항상” 했다고 응답했다. 임신 임금노동자의 업무량이 많을 경우는 쉬운 업무로 교체해야 하는데도 현실은 달랐다. 대체 인력 부재(65%), 휴가 사용 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 때문(25%)이라는 이유가 컸다. 제도는 있어도 시행되지 않거나 임신을 개인 문제로 간주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10년간 산업재해로 인정된 유·사산 사례가 고작 10건에 그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응답자 중 “원할 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라고 답한 비율은 38.4%, “업무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라고 밝힌 비율은 30.7%에 불과했다. 또 응답자의 76.8%가 유산·사산 당시 “감정을 숨기고 일해야 했다”라고 답했고, 70.4%는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연구진들은 “유산·사산은 모든 일터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고용이 불안정한 경우, 일터 내 유해인자(작업 자세, 업무량, 중량물 취급, 화학물질, 소음·진동 등)에 노출되는 빈도가 많은 경우, 감정노동 등 스트레스가 심한 일터에서 업무를 하는 노동자의 경우, 유산·사산에 상대적으로 취약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밝혔다. 특히 여성 노동자 중에 「근로기준법」에서 보장하는 유산·사산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고 개인 연차를 사용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는데, 회사 쪽에서 “연차 사용을 권유한 사례가 있었다.”라고 설명하며,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유산·사산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기 위한 정부의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초저출산 시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여야가 앞다퉈 지원책을 내놓고 있으나 임신한 여성 임금노동자를 과로하지 않도록 챙기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출생률이 올라갈 리는 만무하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임신부가 건강에 위험이 있다고 평가가 내려진 업무를 수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 법률도 유·사산을 겪은 여성 노동자의 회복을 돕는 다양한 지원책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선 노동 현장에선 ‘모성보호 제도’를 모두 다 자유롭게 이용하기도 어렵거니와 그에 따른 차별과 불이익이 발생하는 것마저 자연스럽게 목도되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유·사산을 예방하기 위해 임신기 근로시간 1일 2시간 단축을 임신 후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에 있는 여성 근로자가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하는 경우’에서 이를 과감하게 ‘임신 전(全) 기간으로 확대’하고, 신청하는 경우에만 국한했던 것을 아예 의무화하는 등 직장 내 ‘모성보호 제도’ 확대시행은 물론 ‘모성보호 제도’가 제대로 활용되고 작동되는지를 포함 사용자의 임신부 보호 의무 위반 여부 확인을 위한 근로감독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또한, 유산·사산에 대한 ‘산재 인정기준’ 마련에 있어 장시간 서서 일하는 등 업무 자세의 인체공학적 요인, 감정노동 등 심리적·사회적 인자, 연장·야간·교대 근무 노출 정도와 업무 부하 등 다양한 노동 환경적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업장을 상대로 여성 임금노동자의 유산 또는 사산 등을 예방하기 위한 ‘산업안전 보건교육’을 강화하고, ‘모성보호 제도’ 시행 모범기업에 대한 세제 등 재정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제안한다.

사진=박근종
사진=박근종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

(현,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서울특별시자치구공단이사장협의회 회장 역임
/ 전, 소방준감, 서울소방제1방면지휘본부장, 종로·송파·관악·성북소방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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