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국가 안보를 위한 전략 자산으로 급부상하면서 세계 각국이 자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책에 총력을 펴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인도까지 공장 건설에 수조 원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미·중 패권경쟁이 시작된 뒤 반도체는 전자부품을 넘어 전략물자 반열에 오르며 인공지능(AI) 칩 같은 첨단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까지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치열한 각축은 기업과 정부가 ‘2인 삼각’이 되어 벌이는 국가대항전으로 진화 됐다 과거 세계 반도체 업계를 이끌었던 미국과 일본이 최근 천문학적인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부활을 노리고 있다. 이렇듯 반도체 투자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움직임도 더 빨라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Inte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22년 3월 23일(현지 시각) 미국 경제 방송 CNBC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50년 동안은 석유 매장지가 지정학적 패권을 결정했다.”라며, “디지털이 지배하는 미래에는 반도체 생산 기지가 어디 있느냐가 이보다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겔싱어 CEO는 “반도체 생산 기지를 우리가 원하는 곳에 지어야 한다.”라며 “미국과 유럽 내에 둬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말 그대로 반도체를 둘러싼 요즘의 경쟁은 경제논리를 넘어선 ‘반도체 아메리카 원팀’을 노골화한 인텔의 대역습 선전포고이자 디지털 미래에서 ‘회복 탄력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정학적으로 자국 중심의 세로운 균형 잡힌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라는 함의(含意)가 담긴 듯 하다.

작금의 반도체 시장은 자유무역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각국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고, 기업은 자기 나라 업체를 성의껏 밀어주는 형국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국제분업 구조에 올라타 성공의 기회를 잡은 듯 했는데, 지금은 바람이 거꾸로 불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촉발한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가 격화되면서 ‘K-반도체’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지각변동을 틈타 AI 반도체 패권을 쥐기 위한 경쟁국들의 공습이 예상보다 거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일본의 ‘반도체 역습’이 무서울 정도로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 우선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의 연구·개발, 설계, 생산이 자국에서 이뤄지는 압도적인 지위로 돌아가려 하고 일본도 민·관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모두가 발 벗고 나서니 경쟁의 압박은 날로 커진다.

미국은 1980년대 일본 반도체를 주저앉히고도 자국만 독주하지 않고 국제 분업의 틀을 조성했으나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다. 그동안 잘하던 시스템반도체뿐 아니라 최첨단 메모리반도체도 생산하고 AI 발달로 중요성이 더 커진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위탁 생산)’도 강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인텔은 지난 2월 21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자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포럼인 ‘인텔 파운드리서비스(IFS) 다이렉트커넥트 2024’ 행사에서 비전발표를 통해 올해 말 1.8나노미터 공정급인 18A(옹스트롬 1A = 0.1㎚) 공정 양산을 1년 앞당기고,“오는 2027년 14A 공정을 양산해 오는 2030년까지 (삼성전자를 제치고) 업계 2위가 되겠다”고 야심차고 당찬 계획을 밝혔다.

특히, 미국 기업과 정부가 인텔의 파운드리 생태계 조성을 위해 지원 사격에 나선 만큼 파운드리 시장 2위인 삼성전자에 대한 추격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시장점유율 1%의 후발 주자임에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기업은 150억 달러(약 20조 원)의 주문을 몰아줬다. 인텔은 이날 MS 외에도 ARM·지멘스·케이던스·시놉시스·앤시스 등 파운드리 주요 파트너사도 공개했다. 미국 업체들끼리 일감 몰아주기와 반도체 역습을 예고하는 불길한 대목이다. 미국 정부도 100억 달러의 보조금을 곧 내줄 계획이다. ‘지나 러몬도(Gina Raimondo)’ 미국 상무장관도 “인텔은 미국의 챔피언 기업”이라고 치켜세우며 힘을 실어줬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 2월 21일(현지 시각) ‘인텔 파운드리서비스(IFS) 다이렉트커넥트 2024’ 행사에서 “미국이 반도체 제조업의 글로벌 리더십을 되찾고 AI 기술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실리콘(반도체)을 실리콘밸리로 되돌려 놓자”라며 “과거 세계 반도체의 40%를 생산했던 것처럼 미국이 주요 반도체 생산을 주도하기를 원한다”라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은 2030년까지 1,400억 달러 규모로 확대할 전망이이어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도 세계 D램 시장에서 3위에 해당하는 미국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테크놀로지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지난해 3분기 D램 매출 기준으로 22.8% 수준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했다. 보조금과 자국 기업 밀어주기를 등에 업은 마이크론은 삼성전자(시장점유율 38.9%)와 SK하이닉스(시장점유율 34.3%)가 개발해 미래 먹거리로 키우는 AI반도체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시장에 우리와 근접한 기술 수준의 제품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지난 2월 26일(현지 시각) 홈페이지를 통해 HBM3E을 본격 생산해 올해 2분기에 출하한다고 알렸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세계 최초로 AI용 반도체 핵심 부품인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양산에 들어간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엔비디아(NVIDIA)의 신제품인 H200에 탑재되고 대만 TSMC와 패키징을 협업한다며 업체 실명까지 공개한 점도 부담스럽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올 상반기 HBM3E 양산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D램 분야에서 ‘만년 3위’로 불리던 마이크론이 먼저 치고 나온 것은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전이다. HBM은 미세한 구멍을 맞추면서 D램을 여러 층 쌓아 올리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며, 혁신적인 처리 속도와 저전력으로 AI용 GPU(그래픽처리장치)에 필수불가결한 핵심 부품이다. D램보다 4배 비싸고 수익성은 5∼10배 높은 그야말로 고부가가치 ‘미래 먹거리’다. AI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떠오르는 HBM 시장에서 점유율이 4∼6%에 불과하던 마이크론이 시장을 사실상 양분해 오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치고 가장 먼저 양산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맞서 삼성전자는 마이크론이 양산 계획을 밝힌 8단 HBM3E보다 기술력이 뛰어난 12단 HBM3E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하며 맞불을 놨다. 프랑스 IT 시장조사업체 욜 그룹(Yole Group)에 따르면 HBM 시장 규모는 23년 55억 달러(약 7조 원)에서 2024년에는 141억 달러(약 19조 원)로 약 150%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연간 약 40%의 성장률을 보이며, 2025년에는 199억 달러(약 26조 5,000억 원), 2029년에는 380억 달러(약 50조 5천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꿈의 블루오션이다.

한편 일본도 지난달 말 준공한 구마모토현 TSMC 파운드리 공장이 상징적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TSMC의 제1공장에 보조금으로 4,760억 엔을 보조금으로 지원해 주고 50년간 묶어둔 그린벨트까지 해제하는 행정편의를 제공해 5년 걸릴 공장을 그 절반에 지었다. 추가로 제2공장에는 최대 7,320억 엔(약 6조 5,000억 원)을 지원한 방침임을 밝혔다. 외국 기업에 무려 1조 2,000억 엔의 현금을 지원하는 셈이다 일본은 자신이 가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의 강점을 TSMC의 제조 능력과 결합해 국내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반도체 강국 복귀의 시동을 걸려는 게 일본의 꿈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대만의 밀착이 두드러지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모양세다. 대만 TSMC의 ‘모리스 창’ 창업자는 지난 2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열린 ‘TSMC 제1공장 개소식’에서 “일본 반도체 생산의 르네상스(부흥)이 시작됐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고, 이날 개소식에 참석하지 못한 일본 기시다 총리는 영상 메시지를 보내 “반도체는 디지털화와 탈탄소화의 실현에 불가결한 핵심 테크놀로지”라며 “일본 정부는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기반 정비를 위해 전례가 없는 대담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요즘 불붙은 인공지능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는 미국, 일본과 대비되는 우리의 주가가 방증(傍證)하고 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가 흔들리는 듯해 안타깝다. 삼성은 메모리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시장 전망을 과소평가했다가 SK하이닉스에 선수를 뺏겼다. 선단 공정을 미세화하는 데는 빼어난 능력을 보여줬지만, 패키징 같은 후공정을 소홀히 해 엔비디아(NVIDIA)나 애플(APPLE) 같은 대형 거래처를 대만의 TSMC에 내주고 말았다. 다행히 SK하이닉스는 4세대 HBM 시장을 선점하면서 지난해 4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삼성전자도 이날 마이크론 8단에 맞서 12단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초격차 혈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각축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칩4 동맹은 소리소문없이 슬그머니 미·일·대만 그들만 손잡고 한국은 이들의 협공을 받는 구도로 바뀌고 있어 K-반도체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로 위기는 가중되고 있다.

작금의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는 경쟁국들처럼 수조 원의 보조금을 재정으로 지원할 수도, 행정 편의를 과감하게 제공하기도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다. 일찌감치 2위를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초격차’ 전략은 오늘날 반도체 강국으로 만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초격차를 만들어내려면 장기적으로는 인재들이 기초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성장해가야만 한다. 단기적으로는 당연히 품질과 가격경쟁력, 수율(收率 │ 투입된 원재료 대비 정제된 제품의 비율) 등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기술 혁신과 양산 노하우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국가 대항전이 된 반도체 전쟁에서 범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현실이다. 정부는 아낌없는 통큰 지원을 해야만 한다. 대기업은 규제 대상이란 고정관념 탓도 크다. 특히, 글로벌 대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지원대상으로 인식 전환이 긴요하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거대한 변혁의 문턱에 서 있다. 반도체는 그 핵심 중에서도 핵심에 있다. 위기(危機)는 위대(偉大)한 기회(機會)의 줄임말인 위기(偉機)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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